"스페인 축구를 접목시키겠다"는 조광래 감독의 발언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1일 나이지리아전 2-1 승리는 '전원 공격, 전원 수비' 개념의 토털 사커에서 스페인 특유의 점유율 강화 및 날카로운 침투 패스, 적극적인 문전 쇄도가 접목된 극단적인 공격 축구를 펼쳤습니다. 조직력-체력-순발력이 강점인 한국 축구에 토털 사커와 스페인식 축구의 장점이 서로 결합되면서 '기술 축구'라는 대표적인 키워드를 화려하게 색칠했습니다. 조광래 감독이 가장 중점으로 삼은 것은 패스의 퀄리티 강화 였습니다.
특히 한국의 두 골 과정은 조광래호 기술 축구의 성공적인 정착 가능성을 알릴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들 이었습니다. 전방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볼을 배급하며 상대의 압박을 무너뜨리면서 한 번에 볼을 터치하는 원터치 패스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윤빛가람의 전반 17분 A매치 데뷔골은 최효진의 스로인을 받아 오른발로 한 번 터치하고 상대 골망을 갈랐습니다. 최효진의 전반 45분 결승골 장면은, 원터치로 최효진에게 스루패스를 연결했던 박지성의 볼 배급이 일품 이었습니다. '사람보다 패스의 속도가 빠르다'는 조광래 감독의 지론이 맞다는 것을 감탄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 기술 축구하면 개인기를 앞세워 볼을 끄는 스타일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볼을 끌면 상대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공격을 차단당하기 쉬운 문제점이 있습니다. 기술 축구의 강자인 스페인은 이러한 스타일을 기반으로 삼지 않습니다. 스페인이 짧은 패스를 통해 점유율을 끌어올리며 결정적인 공격 상황에서 볼 터치의 간결함을 앞세운 침투 패스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 처럼, 조광래 감독도 그 스타일을 대표팀에 접목시켜 상대 수비 뒷 공간을 노리는 패스의 날카로움을 키웠습니다.
스페인 축구는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가 90년대 초반 FC 바르셀로나에 접목 시켰던 토털 사커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유럽-월드컵을 제패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조광래 감독의 공격 전술은 패스 뿐만 아니라 토털 사커의 특징인 '전원 공격'의 이념을 충분히 구현했습니다. 미드필더들이 공의 위치에 따라 수비수 또는 공격수와 폭을 좁혀 압박을 키우거나 공격 전개의 효율성을 강화하는 컴펙트 축구를 펼칩니다. 그래서 허리가 뼈대를 형성하여 3선이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쳐 공수의 밸런스를 키우게 됐습니다. 스리백 또한 패스 과정에 참여하며 미드필더들의 볼 배급 부담을 덜어주는 든든함을 더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조광래 감독의 3-4-2-1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의 키워드였던 히딩크 감독 축구와 같은 포메이션 입니다. 당시의 히딩크 감독은 세계의 강호들을 줄줄이 격파하는 과정에서 토털 사커를 이식시켰는데 실리 강화를 목적으로 수비에 무게감을 두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그때의 축구 스타일이 마치 조광래호에서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줬습니다. 미드필더진이 3백과 폭을 좁히면서 철저한 지역 분담에 따른 압박을 통해 상대 미드필더진이 소유한 공을 빼앗는 즉시, 종패스를 연결하는 빠른 공격 전환으로 상대 진영을 휘젓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지금까지의 대표팀 전술은 박지성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본프레레-아드보카트-베어벡-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 전술을 통해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며 상대 진영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조광래 감독은 박지성이 아닌 좌우 윙백을 맡는 이영표-최효진을 공격의 중심으로 두고 있습니다. 3-4-2-1과 3-5-2 같은 3백 포메이션은 구조적으로 좌우 윙백에 많은 역할을 부여합니다. 좌우 윙백의 활동 폭을 넓히고 부지런한 움직임을 주문하는데다, 현란한 개인기와 빠른 드리블 돌파, 간결한 볼 배급을 주문합니다. 그 역할을 이영표-최효진이 나이지리아전에서 충분히 해냈습니다.
이영표-최효진은 대표팀의 에이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광래호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의 빌드업을 주도하며 공격의 템포를 끌어올리고 상대 진영을 파고들 수 있는 틈을 부지런히 찾아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측면은 중앙에 비해 상대의 압박을 덜 받는 공간적인 이점이 있는데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측면에 강했고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순발력과 체력이 있습니다. 그 특징이 이영표-최효진의 경기력에 투영되면서 조광래호의 공격 전개 방향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나이지리아전은 엄연히 평가전이고, 상대가 최정예 전력이 아니었고(한국도 마찬가지), 조광래 감독 부임 이후 첫 경기이기 때문에 과소평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광래 감독이 데뷔전에서 뚜렷한 전술 변화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남긴것은 우리들에게 강렬한 임펙트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비해 스쿼드가 바뀌었고, 소집 시간이 이틀에 불과했던 어려움 속에서 완벽한 경기를 펼친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경기 관점은 합격점이었고 앞으로의 긍정적인 행보를 엿보게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 대표팀이 2011년 1월에 카타르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우승에 대한 목적 의식이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 축구는 지금까지 아시안컵에 출전하면 '한국 축구는 아시아 No.1이기 때문에 아시안컵 우승은 당연히 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세기 동안 아시아를 제패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기술 축구로 세계를 제패했듯, 한국 축구가 아시안컵에서 토털 사커와 스페인 축구의 장점이 서로 결합된 기술 축구로 아시아를 정복하는 시나리오는 남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히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경기의 퀄리티를 키우며 한국 축구의 우수성을 아시아에 각인 시켜야 합니다.
조광래 감독의 기술 축구가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결정타는 패스-공간-스피드-기술-몸의 민첩성이 뛰어난 유망주들이 여럿 배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U-20 월드컵, U-17 월드컵 8강 진출의 배경에는 기술로 승부수를 띄우는 공격 옵션들의 유기적인 활약에 있었고 그들 개인의 기술력이 예전의 청소년 대표팀 세대보다 더 강했습니다.(2007년 U-20 대표팀은 논외) 2011년 아시안컵은 세대교체의 결정적인 신호탄을 쏘아올려 우승컵을 거머쥐을 수 있는 과제까지 부여된 상황입니다. 다음달 7일 이란과의 평가전은 한국 축구가 아시안컵 우승 가능성에 얼마만큼 가까워졌는지를 인지할 수 있는 경기입니다. 나이지리아전에서의 긍정적인 경기력을 놓고 보면 이란전까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