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감독의 전술 키워드는 스쿼드 로테이션 시스템입니다. 다른 팀들은 주전과 후보 선수가 뚜렷히 구별되지만 맨유는 다릅니다. 20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상대팀 전술 및 팀의 경기 일정, 컨디션과 맞물려 번갈아 경기에 투입하죠. 그래서 주전인지 아니면 후보인지 개념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선수들도 몇몇 있습니다. 이것은 맨유가 빠듯한 경기 일정을 이겨내기 위한 체력 안배 효과 및 선수들의 치열한 경쟁을 유도합니다.
특히 박지성은 퍼거슨 감독이 신봉하는 로테이션 기용의 대표적인 선수입니다. 붙박이 주전보다는 띄엄띄엄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공존하던 지난 시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8일 볼턴전에서는 이청용과의 코리안 대결로 주목을 끌었지만 끝내 결장했습니다. 오는 31일 바이에른 뮌헨과의 원정에서 선발로 투입 될 예정이기 때문이죠. 강팀에 강한 박지성을 필요로하는 경기는 볼턴이라는 약팀과의 경기가 아닌 뮌헨(31일)-첼시(4월 3일)-뮌헨(4월 8일)으로 이어지는 강팀과의 강행군 이었습니다.
물론 박지성은 강팀과의 경기에 자주 선발 출전하기 때문에 주전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즌에는 루이스 나니와 출전을 번갈아갔지만 강팀과의 선발 출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전으로 분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지성이 맨유의 주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 맨유라는 시스템에서는 주전이기 이전에 로테이션 멤버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강팀과 약팀과의 경기 출전이 구분되는 것 자체가 로테이션 기용이기 때문이죠.
박지성이 강팀과의 경기에 출전해 공격형 미드필더 전환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면 또 한 명의 선수는 약팀과의 경기에 출전해 맨유의 승점을 벌어줍니다. 박지성과 동갑인 베르바토프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박지성이 강팀전에 줄곧 선발 출전하면서 약팀전에 체력을 안배하면, 베르바토프는 약팀전에 선발로 모습을 내밀며 강팀과 경기하면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합니다. 최근 맨유의 로테이션 흐름에서는 박지성과 베르바토프가 경쟁자가 되었고, 두 선수의 출전 기용 방식도 서로 대조적입니다.
맨유는 지난 시즌부터 강팀과 경기하면 4-2-3-1 혹은 4-3-3, 약팀과의 경기에서는 4-4-2를 즐겨 썼습니다. 강팀과의 경기에서 미드필더를 두껍게 배치하는 것을 비롯 트라이앵글 형성의 용이함을 위해 원톱 시스템 체제를 고수합니다. 특히 강팀전에서 상대 후방 옵션 뒷 공간을 노리는 역습을 즐겨 쓰는데, 힘을 들이지 않고 경기하는 타입의 베르바토프 보다는 종적인 움직임과 종패스에 강한 박지성이 선택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4-4-2의 쉐도우를 맡았던 베르바토프가 아닌 박지성이 강팀과의 경기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환했습니다.
물론 맨유는 지난 7일 울버햄턴전과 28일 볼턴전에서 베르바토프를 원톱으로 배치하는 4-2-3-1을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두 경기에서는 루니가 무릎 부상으로 결장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루니-베르바토프로 짜인 4-4-2를 통해 울버햄턴-볼턴과 상대했을 것입니다. 베르바토프가 쉐도우로서 공격 조율 역할을 맡아 타겟맨인 루니의 골 역량을 도왔겠죠. 4-4-2는 공격형-수비형 미드필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박지성은 자신의 주 포지션인 윙어로 뜁니다. 그리고 박지성은 울버햄턴전과 14일 풀럼전에서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었고 볼턴전을 결장합니다.
반대로 베르바토프는 강팀과의 경기 선발 출전 빈도가 낮습니다. 올 시즌 빅4 라이벌 클럽과의 경기에서 유일하게 선발 출전한 경험이 단 한 번 뿐이며 지난해 10월 25일 리버풀전 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바토프는 리버풀의 타이트한 압박에 막혀 최전방에 고립되더니 후반 28분에 교체되었고 팀은 0-2로 패했습니다. 최근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줄곧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2차전, 리버풀전, 아스날전이 대표적 예입니다. 반대로 박지성은 4경기 모두 선발 출전해 3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박지성과 베르바토프에 대한 퍼거슨 감독의 로테이션 기용 방식이 서로 대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박지성이 강팀과의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치려면 무리한 경기 출전보다는 몇몇 약팀과의 경기에 결장시키거나 조커로 투입해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더 낫다는 퍼거슨 감독의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지성은 강팀전에서 공수 양면에 걸친 맹활약을 펼치며 '강팀 킬러'의 이미지를 부각 시켰습니다.
박지성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상대팀 공격의 핵심 역할을 하는 선수를 꽁꽁 견제했습니다. 리오넬 메시(FC 바르셀로나) 조세 보싱와-조 콜(이상 첼시) 더글라스 마이콘(인터 밀란)을 측면에서 제압했고 최근에는 안드레아 피를로(AC밀란) 루카스 레예바-하비에르 마스체라노(이상 리버풀)의 중앙 공격을 봉쇄하며 맨유가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는 밑바탕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상대 공격 옵션을 끈질기게 마크했던 박지성의 수비력은 상대팀의 전술 운용을 어렵게했고 특히 강팀을 상대로 빛을 발했습니다.
또한 박지성은 맨유의 역습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입니다. 역습의 필수 요건인 종적인 움직임과 종패스에 능동적으로 강한 모습을 나타내는 선수이기 때문이죠. 부지런한 움직임과 넓은 활동 폭, 상대 후방 옵션 뒷 공간을 파고들며 상대 수비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움직임 및 그 과정에서의 절묘한 위치선정, 공간 창출, 강철같은 체력, 정확한 짧은패스, 빠른 타이밍에 의한 전진패스 등의 요소들이 자신의 공격력을 키웠습니다.
일각에서는 박지성의 공격력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박지성의 개인 공격이 메시-호날두처럼 화려하지 않은 것에 따른 편견일 뿐, 역습을 기반으로 삼는 맨유는 박지성의 공격력을 필요로 합니다. 역습에 강한 박지성의 공격력은 밀집수비를 펼치기 쉬운 약팀보다는 맨유전에서 승부를 걸기 위해 공격적으로 나오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빛을 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베르바토프는 강팀에 약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박지성-나니-발렌시아-루니-오언 같은 공격 옵션들에 비해 순간적인 공격 전환 속도가 느리며 상대팀의 압박을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굳이 강팀과 상대하지 않아도 포백과 미드필더들의 간격을 좁혀 타이트한 압박을 펼치는 약팀과의 경기에서 부진했던 빈도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난 1월 3일 FA컵 3라운드 경기에서는 리그1(잉글랜드 3부리그) 클럽인 리즈 유나이티드 수비수들의 타이트한 압박에 막혀 부진을 거듭했고 그 여파는 맨유의 0-1 패배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르바토프는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27경기에서 12골 4도움을 기록했다. 얼핏보면 준수한 기록 같지만 강팀과의 경기에서 부진하거나 상대팀의 거센 압박에 막혀 부진했던 경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최근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베르바토프가 줄곧 벤치를 지켰습니다.
이러한 베르바토프의 행보는 12골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골을 넣은 상대팀이 대부분 약체이기 때문. 위건(2경기 2골), 볼턴(1경기 2골), 스토크 시티, 블랙번, 선덜랜드, 헐 시티, 번리, 포츠머스, 에버턴, 풀럼을 상대로 넣었으며 강팀을 상대로 골망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12골 중에 결승골이 블랙번전 뿐이었고 대부분이 맨유가 앞선 상황에서 추가골을 넣었을 만큼 영양가가 안좋습니다. 지난해 10월 3일 선덜랜드전에서는 동점골을 넣었고 지난달 20일 에버턴전에서는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각각 2-2 무승부, 1-3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볼턴전에서도 베르바토프는 약팀에 강한 선수임을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볼턴의 포백이 전반전부터 나니-발렌시아의 잦은 문전 침투에 의해 공간이 뚫리면서 베르바토프가 최전방에서 공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주어졌습니다. 이날 볼턴은 맨유 중원과의 기싸움을 제압하기에는 레벨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압박에 약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후반 중반부터 후방 옵션들의 경기 집중력이 급속하게 떨어졌습니다. 그 틈을 타 베르바토프는 자신의 강점인 문전에서의 절묘한 위치선정 속에 두 골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베르바토프가 왜 약팀과의 경기에 강한지를 인지할 수 있었던 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