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의 한국 축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어 있습니다. 지난 5일 한국의 본선 B조 상대로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가 배정된 이후부터 한국 대표팀의 16강 진출 여부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축구 관련 매스컴 소식에는 월드컵 관련 이야기들이 상당수 눈에 띄고 있습니다. 여기에 박지성과 이청용의 유럽파 근황 소식과 축구 스타들의 결혼 소식에 이르기까지 축구 관련 보도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근간' K리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매스컴에서 외면 받고 있기 때문이죠. 공중파에서 K리그 생중계를 보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이제는 케이블 마저도 생중계를 거르는 실정입니다. 녹화 중계는 기본, 최근에는 후반전 생중계까지 빈번하게 방영되는 현실입니다. 녹화 중계라면 경기 결과를 알아버린 상황에서 브라운관을 바라봐야 하며 후반전 생중계는 전반전 없이 경기를 봅니다. 지방에서 열리는 K리그 빅 매치는 중계 일정을 잡지 않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K리그 팬들이 K리그를 마음껏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가운데, 12일 오전 1시 국제축구연맹(FIFA) 2009 클럽 월드컵 6강전 포항과 마젬베의 경기는 국내에서 중계되지 않았습니다. 국내 방송사들이 방송 중계권을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항의 경기를 중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축구팬들은 포항 경기를 생중계하는 외국 방송을 인터넷으로 봤습니다. TV 브라운관보다 화질이 좋지 않고, 버퍼링 때문에 동영상이 종종 끊기고,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중계되는 포항의 경기를 바라보는 한국 축구팬들의 현실은 그저 씁쓸할 따름입니다.
효리사랑은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 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일본 TV 생중계 방송을 찾아서 경기를 봤으니까요. 일본어를 조금 알아듣기 때문에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랍어와 중국어로 해설 듣는 것보다는 '일본어를 배운' 한국인에게는 일본 방송이 더 편했습니다. 누군가는 그럴 것입니다. '외국어로 방영되는 축구 경기를 쓰잘데기 없이 왜 보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K리그 팀의 국제 대회 경기를 한국어가 아닌 외국 방송으로 들어야 하는 현실 말입니다.
물론 포항의 경기는 비중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미 K리그 일정은 끝났고 포항은 한달 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K리그에 대한 열기가 식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포항은 세계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클럽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아시아의 챔피언 자격으로서 이번 대회에 출전했고 '아프리카 최강자' 마젬베를 물리치고 4강에 진출했습니다. 4강에서는 후안 베론의 소속팀인 아르헨티나의 에스투디안테스와 맞붙습니다. 그리고 결승에 진출하면 2008/09시즌 유럽 축구 트레블을 달성한 스페인 명문 FC 바르셀로나와 붙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포항과 에스투디안테스의 경기는 마젬베전에 이어 국내에서 중계되지 않습니다. 포항과 FC 바르셀로나의 매치가 성립되면 그 경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K리그의 자존심을 걸고 세계 축구계에서 파란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포항 선수들의 승리욕을 한국 축구팬들은 TV 생중계로 볼 수 없습니다. 클럽 월드컵은 포항이 우승했던 AFC 챔피언스리그보다 권위가 높으며 그것도 FIFA가 주최합니다. 각국의 클럽들이 모여 친선경기를 갖는 개념의 경기가 아닌 세계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공식 경기입니다. 그럼에도 방송사들은 포항의 클럽 월드컵 경기를 외면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지난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클럽 월드컵 경기는 어느 케이블 방송사에서 생중계로 방영했습니다. 맨유에 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맨유는 한국 축구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팀이고 박지성까지 있으니 당연히 생중계를 보여줄 수 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케이블 축구 중계 중에서 가장 선호도 높은 경기가 맨유 경기입니다.(그렇다고 맨유를 비하하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올해 포항의 클럽 월드컵 경기는 중계일정 조차 편성하지 않았습니다. 포항은 엄연히 한국 클럽이고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클럽 자격이자 K리그와 아시아의 자존심을 걸고 대회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포항 경기가 방송사에서 외면받는다면, 포항은 도대체 어느 나라 클럽이란 말입니까. 지난해 맨유의 클럽 월드컵 경기를 생중계했던 그 방송사는 올해 포항의 AFC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경기를 생중계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프랑스리그 중계권을 따면서 축구 중계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포항의 클럽 월드컵 경기는 왜 안됩니까.
물론 포항 경기는 다른 케이블 방송사에서도 생중계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 케이블 중계를 보니까 다양한 경기들이 생중계 되더군요. 남녀 프로농구와 프로배구는 물론이요, 국내 여자 실업축구인 WK리그, 사회인 야구를 생중계하고, 김연경의 일본 여자 배구 경기까지 녹화 중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포항 경기는 안됩니까. 생중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녹화 중계권이라도 따야하는거 아닌지요.
이러한 방송사들의 K리그 중계 외면에 프로축구연맹은 최근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개 했습니다. K리그 TV중계 확대를 위해 내년부터 월요일에 K리그 경기를 열겠다는 것입니다.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는 월요일에 K리그 경기를 진행하여 TV 생중계를 추진한다는 것이죠. WK리그가 월요일 저녁 케이블 방송사에서 생중계 된 것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또한 프로축구연맹이 연예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대형 가수의 공연을 월요일 경기 하프타임때 진행하는 아이디어가 최근 프로축구연맹 워크숍에서 논의 되었다고 합니다. 얼핏보면 월요일 경기는 TV 생중계를 위한 틈새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K리그 경기를 프로야구 때문에 월요일에 열겠다는 발상은 매우 잘못 됐습니다. 월요일은 회사들의 업무가 많은 날이자(그렇지 않은 회사들도 있겠지만) 일주일 중에 첫 날을 업무로 보냅니다. 또한 학생들은 공부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관중들을 기대할 수 없으며 TV 시청률 효과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월요일 경기가 중계되면 관중석이 썰렁한 경기들 때문에 대중들에게 'K리그=텅 빈 관중'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월요일 경기는 'K리그가 프로야구에 완전히 밀렸다'는 사람들의 인식과 함께 K리그라는 브랜드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겁니다.
더 걱정되는건 내년입니다. 내년에 스포츠 케이블에서는 한국 프로야구를 비롯 일본 프로야구 생중계에 열을 올릴 겁니다. WBC 신화의 주인공인 김태균과 이범호가 각각 지바 롯데와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했기 때문이죠. 특히 신동빈 지바 롯데 구단주 대행인은 김태균 영입 직후 "지바 롯데 TV 중계권을 한국에 판매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케이블 방송사들은 야구 중계에 열을 올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죽어나는 것이 바로 K리그 입니다. 이제는 케이블 방송사에서 K리그 경기를 얼마나 보게 될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축구팬들이 K리그 경기를 인터넷을 통해 직접 중계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지만 어느 모 포털 사이트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어 중계가 쉽지 않습니다.
2009년 12월의 한국 축구는 남아공 월드컵 분위기가 고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K리그는 거센 찬바람과 눈보라를 쓸쓸하게 맞고 있습니다. K리그의 정규리그 스폰서가 없고, 현직 감독이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고, 한국 축구의 특출난 유망주들이 K리그 진출에 등을 돌리고 있고, 이제는 방송사 마저 중계에 소극적입니다. 포항의 클럽 월드컵 경기가 녹화 중계마저 열리지 않는 지금의 K리그 현실이 그저 씁쓸하고 안타깝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전후로 K리그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방송사들이 이제는 K리그 흥행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