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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허정무호, '박지성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에이스의 위력은 실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위기 상황에서 에이스의 진가가 더욱 빛나듯 에이스들은 벼랑 끝의 순간에서 팀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등장합니다. 그 한 명이 팀의 성패를 쥐고 흔드는 것이죠.

허정무호에서 '산소탱크' 박지성(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은 에이스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지난 2004년 아시안컵을 시작으로 한국 공격을 이끄는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팀 전력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선수입니다. 팀에서 가장 기동력이 좋고, 패싱력이 정확하고, 공격 활로를 개척할 수 있고, 다른 선수보다 월등한 공격력을 앞세워 팀의 공격을 주도하고, 여기에 골 까지 넣으면서 대표팀의 경기 내용과 결과를 좌우하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말이 '박지성 시프트'였습니다.

그러더니 지난해 10월부터는 대표팀 주장을 맡아 후배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동안 박지성의 경기력은 '맨유에서 증명한 것 처럼'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꾸준한 경기력을 유지했습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의해 다양한 역할을 부여 받아 제 몫을 다했기 때문에 허정무 감독이 주장을 맡기려고 한 것입니다. 특히 축구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는 그라운드에서는 경기력이 가장 좋은 선수가 팀을 이끌어가기가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요즘에는 대표팀 소집 기간이 예전과 달리 짧기 때문에, 홍명보와 김남일 같은 카리스마형의 스타일이 팀을 하나로 뭉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박지성을 주장으로 맡긴 허정무 감독의 선택은 '기가 막히게' 절묘했습니다. 허 감독은 자신의 과제인 세대교체 완성을 위해 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좋은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캡틴 박' 카드라는 커다란 동기부여를 제공했습니다. 젊은 선수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팀인 맨유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는 박지성과 그라운드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것이 큰 힘이 되기 때문에 몸을 사리지 않으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뛰었던 것이죠. 결국 세대교체는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성과 속에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지난 17일 이란전은 박지성이 왜 대표팀의 에이스인지를 실력으로 증명했던 경기였습니다. 박지성은 후반 36분 아크 왼쪽에서 이근호와 2대1 패스를 주고 받은 뒤 문전으로 쇄도하여 상대팀 선수 3명의 압박을 제끼고 왼발 슛으로 이란의 골문을 갈랐습니다. 박지성이 혼자 만들어낸 동점골은 대표팀 선수 어느 누구도 만들어내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 골이 없었다면 허정무호는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의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동점골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대표팀은 0-1로 뒤진 상황에서 전방으로 띄우는 패스가 이란의 압박에 걸려 역습을 허용하자 공격의 물줄기를 박지성 쪽으로 틀었습니다. 박지성의 패스는 정확하게 연결되었고 동료 선수들 또한 캡틴의 패스를 받기 위해 위치를 조정하는 모양새였습니다. 중앙에서는 잦은 패스미스를 비롯 전방과의 간격을 좀처럼 좁히지 못했고 오른쪽에 포진한 이청용은 후반 중반부터 지친 기색을 나타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지성을 중심으로 왼쪽에 집중된 공격을 펼쳤던 것이죠. 선수들은 공만 잡으면 박지성쪽을 찾으며 캡틴쪽으로 패스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박지성 시프트는 어디까지나 '양날의 검'에 불과합니다. 뛰어난 에이스를 보유한 것이 허정무호 전력에 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특정 선수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팀 전체를 동맥 경화에 걸리게 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박성화 감독은 올림픽 본선 이전까지 박주영을 필두로 하는 공격력을 완성시켰지만, 정작 본선 무대에서 그의 의존도를 높이다 오히려 한국의 공격이 상대방에게 주춤하는 역효과를 맞아 무기력한 본선 탈락의 쓴맛을 맛봤습니다. 박성화호가 그런 전례를 남겼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허정무호에서도 한 선수의 공격력에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박지성 의존도에서 벗어나려면 다각적인 공격 전술이 필요한 것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대표팀은 2004년 아시안컵 부터 지금까지 박지성 중심의 공격력을 계속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허정무호에서 더욱 확고하고 견고해졌습니다. '쌍용' 기성용과 이청용에게 공격을 맡기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박주영은 덜 여물어졌고 이근호는 A매치 5경기 연속 골을 넣지 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박지성에 의존하는 공격을 풀어갔습니다. 특히 이란전 0-1 상황처럼 위기에 몰렸을때는 박지성 시프트를 고집했습니다. 만약 박지성의 컨디션이 안좋았다면 전술적인 역효과를 맞아 상대팀에게 흔들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 2월 이란 원정과 4월 북한전에서는 박지성이 몸이 덜 풀린 컨디션 상황에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러더니 한국은 상대 미드필더진과의 경합에서 밀리거나 혹은 잦은 패스미스로 역습 기회를 허용하는 문제점을 나타냈습니다. 전방으로 띄워주는 공격력도 힘을 잃었죠. 이는 박지성의 컨디션에 따라 대표팀의 공격이 좌우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박지성 만큼의 경험과 실력에 필적할 수 있는 공격수와 미드필더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문제는 박지성처럼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격수와 미드필더가 없습니다. 아드보카트호와 베어벡호에서는 이천수라는 또 한 명의 특출난 공격 옵션이 있었기에 대표팀 공격을 믿고 맡길만한 선수가 두 명이나 있었지만, 이제는 이천수가 빠짐으로해서 박지성의 공격력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나마 박주영이 어느 정도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이근호와 활동 반경이 겹치면서 공격 마무리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습니다. 지난 이란전에서는 상대 압박을 뚫지 못했음에도 쓸떼없는 슈팅을 날리며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이러한 경기력은 에이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결국 허정무호는 박지성의 활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지성은 부상이 많은 선수로 유명합니다. 지난 독일 월드컵에서는 잔부상이 있었음에도 경기에 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박지성이 남아공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부상으로 빠진다면 허정무호 전력에 엄청난 타격이 돌아갈 것임에 분명합니다. 또한 박지성이 본선에서 컨디션 저하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대표팀 공격의 구심점이던 황선홍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멕시코, 네덜란드전에서 졸전으로 고전했습니다. 그런 전례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또 한명의 공격 구심점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에이스 박지성의 비중을 줄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박지성이 부상으로 빠지거나 부진하는 상황, 그리고 팀의 공격이 안풀릴 때는 박지성에 의존하지 않고 동료 선수의 공격을 통해 골을 엮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로지 한 명만이 해결하려는 지금의 대표팀 경기력은 상대팀 입장에서는 '뻔할 뻔'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허정무호 전술이 업그레이드 되려면 '박지성 그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