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는 역할을 맡는 포지션은 공격수입니다. 축구는 상대팀보다 더 많은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최전방을 맡는 공격수의 골 여부가 중요합니다. 공격수가 골을 넣어야만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죠.
하지만 현대 축구에서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이 골을 넣는 경우가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실점을 헌납하지 않기 위해 수비 벽을 두껍게 쌓으면서 상대팀 공격수를 철저히 견제하는 것이 그것이죠. 그러면서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의 공격 역량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득점 상위권에서 미드필더의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세트 피스 상황에서는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여 골을 터뜨리며 '골 넣는 수비수'의 진가를 알렸습니다.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두 팀 모두 당대 최고의 공격수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이 골을 터뜨릴 가능성 또한 배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결승전은 단판 경기이기 때문에 실점을 내주지 않도록 수비에 무게감을 두는 경기 운영을 펼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두 팀의 공격수들은 상대 수비수들과 미드필더들의 철저한 견제를 이겨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겠죠.
이번 결승전에서는 많은 골이 터지지 않을 공산이 있습니다. 토너먼트에서는 좀 처럼 골을 넣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특히 지난 시즌에는 32강 조별 예선에서 1경기당 2.79골이 나왔지만 16강 토너먼트 이후에는 2.14골로 줄었습니다. 그러더니 맨유와 첼시가 맡붙은 결승전에서는 120분 공방전 끝에 단 2골(1-1)만 나왔죠. 그것도 미드필더 두 명(호날두, 램퍼드)가 넣은 골입니다. 반면 두 팀 공격수들은 상대 수비수들의 촘촘한 압박을 받은 끝에 부진 했습니다. 그 중 디디에 드록바는 네마냐 비디치의 집요한 밀착 견제에 화를 참치 못하다가 상대편의 뺨을 때려 퇴장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결승 무대에서 공격수가 골을 터뜨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역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총 43골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공격수는 22골을 넣었고 수비수와 미드필더는 총 19골을 기록했습니다. 수비수와 미드필더가 골을 넣는 비중이 공격수 못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결승전 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두 시즌 동안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올랐던 카카(AC 밀란, 2006/07시즌 10골) 호날두(맨유, 2007/08시즌 8골)는 당시 챔피언스리그에서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 오른쪽 윙어로 뛰었습니다. 올 시즌에는 바르셀로나의 공격수인 리오넬 메시가 8골로 득점 1위를 기록중이지만 그의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가 아닌 오른쪽 윙 포워드입니다. 최전방 공격수가 많은 골을 넣는다는 상식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으며 결승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통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산소탱크' 박지성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골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국내 축구팬들에게는 박지성의 결승전 골 여부를 단순한 희망사항으로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축구는 그저 각본없는 드라마일 뿐입니다. 언제 어느 선수가 골을 넣을지 알 수 없는 데다 그것이 축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매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골 부족에 시달렸던 박지성이 결승 무대에서 골을 넣는다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파급 효과가 클 것임에 분명합니다.
박지성은 전형적으로 큰 경기에 강한 선수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 한국 대표팀의 주전 선수로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치더니 PSV 에인트호벤과 맨유에서도 이 같은 기세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강팀과의 빅 매치에서 골을 넣는 경우도 여럿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아스날을 상대로 두번이나 골망을 흔든것을 비롯해서 포르투갈, 잉글랜드, 첼시, 아스날, AC밀란, 그리고 강팀 못지 않은 전력을 보유한 팀들을 상대로 골을 넣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강팀에 강한 선수'라는 찬사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 박지성의 경기력은 늘 꾸준합니다. A매치 차출 이후를 제외하면 부진한 경기가 손에 꼽을 만큼 드물 정도로 거의 매 경기마다 고른 활약을 펼쳤습니다. 감독 입장에서도 들쑥날쑥한 선수를 기용하는 것 보다는 안정적인 선수를 기용해야 벤치에서 마음 편하게 경기 보면서 전략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박지성이 올 시즌 루이스 나니를 제치고 주전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강팀에 강한 임펙트 그리고 꾸준함이라는 키워드가 있었기 때문이죠.
이번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도 마찬가지 입니다. 박지성은 바르셀로나와의 경기 전 연습 경기에서 주전 팀의 왼쪽 윙어로 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왼쪽 날개의 또 다른 후보군이 라이언 긱스라는 점을 미루어보면, 박지성의 선발 출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3-3의 핵심인 대런 플래처가 징계로 결승전에 못나오고 있는 것 까지 더하면 맨유는 바르셀로나전에서 4-4-2를 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박지성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포지션이 다름 아닌 4-4-2의 측면 미드필더 자리죠.
분명한 것은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죠. 그동안 강팀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의 진가를 믿고 여러차례 선발 출전시켰고 이에 박지성도 실력으로 보답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전에서 스타팅 라인업에 포함시킬 것임이 분명합니다.
박지성은 그동안 맨유에서 상대 측면 옵션의 침투를 철저히 봉쇄하는 수비적인 역할과 전방을 부지런히 움직이거나 빈 공간을 창출하는 공격적인 역할을 동시에 겸했습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공격수들이 골을 넣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지성도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맨유가 빠른 역습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박지성은 수비적인 역할을 맡을 경우 역습 과정에서 빠르게 상대 문전으로 침투하여 골을 노릴 것이고 공격적인 역할이라면 골에 대한 임무를 맡고 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퍼거슨 감독은 강팀과의 경기 혹은 중요한 고비때마다 변칙전술을 쓰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최근 9경기에서는 4개의 포메이션을 두루 구사하고 매번 베스트 일레븐에 변화를 주면서 상대팀에 혼란을 가중시켰죠. 이는 바르셀로나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며칠전에 구사했던 전술로 바르셀로나전을 치르면 상대방에게 그대로 읽히기 때문에 호셉 과르디올라 감독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꺼내들 것임이 분명합니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오언 하그리브스를 오른쪽 윙어로 투입시켰다면 이번에는 박지성이 퍼거슨 감독의 변칙 전술의 핵심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지성은 하그리브스처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미드필더이기 때문이죠. 그런 변칙적인 역할은 골이 될 여지가 분명합니다.
첼시의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중인 줄리아노 벨레티는 2006/07시즌 바르셀로나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던 당시, 결승전에서 후반 35분 역전골을 넣으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던 선수입니다. 박지성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선수 본인이 속한 위치가 골을 넣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바라보는 통계적인 관점에서도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의 골 비중이 웬만한 공격수 못지 않습니다. '강팀에 강한' 박지성의 바르셀로나전 골이 현실이 될지 그 결과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