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아스날의 경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두 팀 모두 파괴적인 공격 옵션을 보유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지만 맨유에게는 우승을 굳힐 수 있는 좋은 기회, 아스날에게는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경기에서 맨유에게 모두 패했던 설움을 복수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죠. 어찌보면 많은 골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웬만한 축구팬들이라도 골이 터지는 경기를 기대했던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0-0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듯 90분 내내 길고 지루한 공방전이 되고 말았죠. 공격 템포가 평소보다 느렸을 뿐더러 패스 전개 또한 활발하지 않았던 경기였죠. 특히 탐색전이 전반 45분 동안 계속 이어질 정도로 미드필더진과 수비벽이 좀처럼 뚫리지 않았습니다. 선수들 모두 가볍게 경기에 임하는 느낌이었죠.
그 이유는 맨유가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홈 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수비 지향의 전술을 운용하면서 수비벽을 두텁게 구축한 것이죠. 맨유는 아스날과의 슈팅 숫자에서는 10-12(유효 슈팅 0-2)로 근소하게 밀렸지만 볼 점유율에서는 38-62(%)로 경기 주도권을 상대팀에 내줬습니다. 전반전 볼 점유율 역시 39-61(%)로 밀렸지요. 패스는 총 278회를 시도했지만(215회 성공, 정확도 77%) 아스날의 510회와 비교하면(431회 성공, 정확도 85%) 공격적인 경기를 펼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0일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373회, 14일 위건전에서 540회의 패스를 시도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지요.
이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기 위해서 입니다. 맨유는 이날 경기에서 최소한 비기기만 하더라도 프리미어리그 3연패가 확정되기 때문에 좀처럼 무리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펼쳤습니다. 아무리 홈 경기라 할지라도 승리보다는 '우승'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아스날이 공격적인 경기를 펼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보다는 수비쪽에 숫자를 많이 두었던 것입니다.
이날 맨유 공격 옵션들의 발은 무척 무거웠으며 컨디션 또한 평소보다 떨어졌습니다. 지난 14일 위건 원정에서 힘겹게 2-1 역전승을 거두면서 이틀만에 경기를 치러야 하는 바쁜 일정 때문에 11일 첼시전 이후 5일만에 경기를 치르는 아스날 선수들보다 체력에서 열세였습니다. 평소처럼 공격 위주의 경기를 펼친다면 선수들이 힘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의도했던 전술을 구사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파가 28일 FC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이어진다면 퍼거슨 감독에게는 곤란하겠죠.
그래서 루니-테베즈-호날두의 3톱은 패스 횟수를 좀처럼 30회 이상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각각 24회(18회 성공) 9회(5회 성공) 26회(19회 성공)를 시도했을 뿐이죠. 특히 3톱의 중앙 공격수로 뛰었던 테베즈는 후반 21분 박지성과 교체되기까지 66분 동안 9회의 패스만 하고 교체 되었습니다. 이번 경기에서는 테베즈의 사기 진작을 위해 박지성을 대신하여 선발 라인업에 올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테베즈의 선발 투입은 전술적으로 실패작 이었습니다. 테베즈가 이날 경기에서 부진했던 것은 동료 선수들의 수비적인 경기 운영 때문에 좀처럼 공격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박지성의 교체 투입은 맨유가 수비를 두껍게 다지기 위한 퍼거슨 감독의 비책이었습니다. 이는 소위 '잠그기'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박지성은 후반 26분 아스날의 골망을 가르는 슈팅(원래는 골이었는데 부심이 오프사이드를 이유로 노골선언 되었죠. 이날 경기의 옥의 티가 이것이었습니다.)을 날리기 전까지 오른쪽 윙 포워드의 역할을 맡다가 그 이후부터는 미드필더 오른쪽 공간으로 깊게 들어가면서 수비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맨유 선수들 또한 다를 바 없었습니다. 루니-호날두마저도 경기 종료 시점이 가까워질 수록 수비 진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 시발점이 박지성의 교체 투입 이었죠.(일부 팬들은 박지성의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팀 전술에 맞춰가기 위해서이지 선수 본인의 능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후반 47분에 루니를 빼고 안데르손을 투입한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해서 였습니다. 인저리 타임이 3분 주어졌기 때문에 남은 1분을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퍼거슨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루니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교체된 장면 또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죠. 비기는 것만으로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아스날을 이기기보다는 아스날에게 실점하지 않는 경기 운영을 막판까지 철저하게 나타냈던 것이죠.
그리고 아스날의 전술과 연관된 요인도 있습니다. 아스날의 '데니우손-디아비' 더블 볼란치 조합은 경험 및 공격 전개의 능숙함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경기 장악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데니우손-디아비 조합과 공격 옵션 끼리의 간격은 지난 챔피언스리그 4강 1~2차전에서 계속 벌어지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렇다보니 나스리-판 페르시-파브레가스-아르샤빈, 이렇게 4명의 발을 묶기만 하더라도 상대에게 한 골도 허용하지 않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맨유의 미드필더들은 경기 초반부터 끝까지 공격보다 수비에 무게감을 싣는 경기 운영을 펼쳤습니다. 그래야 숫적 싸움에서 아스날 공격 옵션에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스날은 이번 경기 이전까지 올 시즌 맨유와의 3경기에서 모두 4-2-3-1 포메이션을 구사했는데(이번에도 4-2-3-1 이었습니다),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항상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진했습니다. 그런데 파브레가스는 대런 플래처 같은 수비 지향의 미드필더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경기에서도 같은 상황이 연출 되었습니다. 이는 퍼거슨 감독이 아스날 전술의 특징을 완전히 간파하여 수비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맨유의 수비 축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밑바탕에는 '에브라-에반스-비디치-오셰이'로 짜인 포백의 든든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맨유의 포백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탑클래스의 수비 능력을 자랑하는데다 지난 아스날과의 챔피언스리그 2경기에서(그때는 에반스 대신에 퍼디난드가 출전했지만) 단 한번의 필드골이라도 허용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상대의 공격 옵션을 봉쇄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 나스리-판 페르시-파브레가스-아르샤빈 모두 기대 이하의 공격력을 일관하면서 맨유의 수비 위주 경기 운영이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경기가 예상외로 지겨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두 팀 모두 공격적인 컬러를 자랑하는데다 라이벌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치열한 혈전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맨유는 그동안의 흐름을 깨고 수비 위주의 경기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승 확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맨유에게 많은 소득이 돌아갔던 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스날은 복수전을 다음 시즌에 벼르게 되었지요. 최근 13경기 연속 무패행진(10승3무)을 기록중인 맨유의 고공행진이 앞으로 남은 경기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