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호지슨 감독이 이끄는 풀럼이 지난 4일 더 호손스에서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08/09시즌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경기에서 0-1로 패했지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스나이퍼´ 설기현(29)이다.
후반 25분 팀이 0-1로 뒤진 상황에서 보비 자모라와 교체 투입된 설기현은 이날 공수 양면에 걸쳐 강한 위용을 발휘한 웨스트 브롬을 맞아 수준급의 공격력을 선보이며 주전 공격수로 발전할 가능성을 엿보이게 했다.
오랜만에 출장한 설기현은 그라운드를 밟자마자 침체되어 있던 팀의 경기 흐름을 뒤집는 공격력을 펼쳤다. 27분 문전 오른쪽에서 상대팀 선수 1명을 제치고 오른발 슈팅을 날린 것이 골대 바깥을 스쳤고 1분 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르게 쇄도하는 과정에서 빨랫줄 같은 왼발 슈팅을 뿜으며 동점골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후반 30분에는 골문 가까이에서 강력한 포스트 플레이를 바탕으로 상대팀 선수를 제압하는 몸싸움을 과시했다. 자신에게 향하는 롱패스를 받기 위해 상대팀 수비수 요나스 올손과의 치열한 공중볼 다툼 과정에서 그를 힘으로 쓰러뜨린 뒤 슈팅 기회를 잡았던 것. 자신의 가까이에 있던 상대팀 골키퍼 스콧 카슨이 공의 방향을 놓칠 정도로 몸싸움의 위력이 대단했다.
비록 공은 설기현의 뒷머리를 맞고 아웃되었지만 만약 자신의 몸에 강하게 맞았다면 절묘한 동점골이 나왔을 것이다. 이후 설기현은 최전방과 좌우 측면을 부지런히 오가며 경기 페이스를 주도했고 상대팀 선수의 마크를 가볍게 뿌리치고 문전을 빠르게 침투했다. 동료 선수들의 안이한 공격 연결 속에 동점골을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설기현의 이 같은 활약은 잉글랜드 현지 언론의 극찬으로 이어졌다. 잉글랜드 축구 전문 언론 스카이스포츠는 이 날 경기를 마친 뒤 설기현에게 "분위기를 살렸다(Livened thihgs up)"는 평가와 함께 평점 7점을 부여하며 8점 받은 골키퍼 마크 슈워쳐에 이어 팀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평점을 받았다. 이는 4점과 6점 받은 동료 공격수 보비 사모라와 클린트 뎀프시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일부 팬들은 설기현이 모처럼 찾아온 기회에 골을 넣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자모라-존슨' 투톱에 이어 제3의 공격 옵션 자리에서 뎀프시에게 밀린 설기현에게는 '골'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
그러나 설기현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풀럼은 90분 내내 웨스트 브롬에 끌려 다녔거나 추가골을 허용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가 이전처럼 부진했다면 '질책성 교체'가 많기로 유명한 호지슨 감독에 의해 후반 43분 대니 머피 대신에 교체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건 설기현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호지슨 감독에게 새로운 인상을 심어준 것이었다.
그동안 설기현은 풀럼 이적 후 소극적인 움직임을 일관하며 팀 플레이에 융화되지 못했다. 여기에 호지슨 감독과 불화에 빠져 연이은 결장까지 거듭했고 지난 8월 헐 시티와의 리그 개막전서 공격수로 변신하여 시즌 첫 골을 터뜨리고도 결장의 악몽이 계속됐다.
그러나 설기현은 웨스트 브롬전서 이전과 다른 '킬러 본능'을 당당히 드러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시절의 몸놀림 처럼 상대팀 수비진을 초토화시켜 골 기회를 노렸던 것. 자신을 뒷받침하는 동료 선수들의 볼 배급이 정확했다면 분명 동점골은 설기현의 발에서 터졌을 가능성이 컸다. 이날 풀럼 미드필더진이 웨스트 브롬위치의 공세에 막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
웨스트 브롬전서 킬러 본능을 되찾은 설기현의 주전 도약 가능성은 밝다. 팀이 공격력 침체로 3연패 부진에 빠지면서 설기현이 다시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경기 감각을 회복 시킨다면 공격수의 주 임무인 '골'을 터뜨리며 위기의 풀럼을 구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풀럼은 2승4패로 리그 16위에 자리하고 있다. 과연 설기현이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팀 승리를 이끄는 맹활약을 펼쳐 그동안 자신을 출장시키지 않았던 호지슨 감독의 판단을 틀리게 할지 그 몫은 설기현 본인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