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죽음의 조는 달랐습니다.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벌어지면서 강팀이 희생당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가 죽음의 조를 넘지 못하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했듯, 유로 2012에서도 그런 일이 되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페인, 독일과 더불어 유로 2012 우승 후보로 꼽히는 네덜란드가 본선 첫 경기부터 패배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은 10일 오전 1시(이하 한국시간) 우크라이나 카르키프 메탈리스트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유로 2012 B조 1차전에서 덴마크에게 0-1로 패했습니다. 전반 24분 미히엘 크론-델리에게 실점을 허용했으며 1967년 이후 45년 만에 덴마크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이날 경기에서 슈팅 28개 날렸음에도 유효 슈팅은 8개에 불과했으며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습니다. 14일 독일전에서 이겨야 8강 진출의 실낱같은 희망을 얻지만 패하면 본선에서 조기 탈락합니다.
네덜란드, 왜 덴마크에게 패했나?
네덜란드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준우승 당시 수비에 안정을 두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그 이후에는 공격 축구의 팀으로 변신하여 유로 2012 예선 10경기에서 37골 퍼붓는 파괴력을 과시했습니다. 유럽 예선 최다 득점 1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본선에서도 골 넣는 공격 축구로 재미를 볼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올 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판 페르시, 독일 분데스리가 득점왕 훈텔라르를 보유했으며 스네이더르-로번-카위트-판 데르 파르트 같은 득점력에 일가견 있는 2선 미드필더들이 존재했습니다. 2년 전에 비해서 화력이 부쩍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덴마크전 패배는 선발 라인업에서 패착이 있었습니다. 수비 성향이 짙은 판 보멀-데 용을 동시에 더블 볼란치로 기용했습니다. 덴마크가 강팀을 상대로 수비에 주력하는 팀 컬러임을 감안하면 네덜란드에게 공격적인 선수 배치가 요구됐습니다. 판 보멀-데 용은 좋은 선수들이지만 팀 승리가 우선되었다면 상대팀 전력을 고려한 맞춤형 전술이 필요했습니다. 데 용 대신에 판 데르 파르트가 선발이었으면 더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판 데르 파르트는 남아공 월드컵 시절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한 경험이 있습니다. 또는 PSV 에인트호벤의 신성 스트루트만을 믿었어야 합니다. 스트루트만은 중원에서 패스를 통해서 경기를 풀어가면서 결정적인 상황마다 킬러 패스를 찔러줍니다.
더블 볼란치에게 공격이 요구되었던 이유는 아펠라이-판 페르시-스네이더르-로번이 공격 옵션을 형성하기에는 덴마크의 단단한 수비 조직을 뚫는데 있어서 선수 숫자가 부족합니다. 더블 볼란치 2명이 모두 공격에 가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명이라도 전방 선수들을 공격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았습니다. 몇몇 수비수 부상으로 포백이 약화된 특성을 고려하면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는 전술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공격 축구를 펼치는 팀이라면 당연히 골이 필요하며 그에 맞는 전술이 필요합니다. 근본적으로는 판 페르시-훈텔라르 투톱 조합 실험이 실패하면서 4-2-3-1로 회귀하게 됐죠.
네덜란드 공격의 문제점은 28-8(개)라는 압도적인 슈팅 숫자에 비해서 골이 없었습니다. 판 페르시는 7개, 로번은 6개, 아펠라이는 5개의 슈팅을 날렸으나 무위에 그쳤죠. 그나마 아펠라이는 경기 내용상에서 좋았지만 판 페르시는 아스널에서 뛸 때 만큼의 결정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아스널 판 페르시' 였다면 적어도 1골 넣었을 겁니다. 로번은 너무 골 욕심을 부렸습니다. 박스 바깥에서 무리하게 슈팅을 날린 장면도 있었고 후반 30분 넘은 뒤에는 크로스를 올려야 할 타이밍에서 슈팅을 시도했으나 볼이 높게 뜨고 말았습니다. 소홀한 팀 플레이가 욕심이 앞선 개인 플레이로 이어졌고 네덜란드 공격에 독이 되었죠.
전반 24분 실점 당시에는 수비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헤이팅아를 비롯한 네덜란드 선수 2명이 크론-델리 돌파를 저지하지 못하면서 실점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공격 축구를 펼치는 팀으로서 무득점에 그친 것은 당연히 공격력을 꼬집을 수 밖에 없습니다. 네덜란드의 전방 옵션들이 덴마크 후방 옵션들을 상대로 좁은 공간, 박스 안쪽을 활용한 연계 플레이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수비형 미드필더 1명이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전방에 있는 선수들이 볼을 주고 받는데 있어서 패스 간격을 좁히며 상대 선수 뒷 공간을 벗겼을 겁니다.
네덜란드는 덴마크와의 점유율에서 53-47(%)로 근소하게 앞섰습니다. 전반 26분에는 65-35(%)로 앞섰으며 전반 24분 실점 이전에도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전반 30분 지날 무렵부터 덴마크의 점유율이 늘었습니다. 1-0 리드를 지키는 것이 아닌, 후방에서 수비수들과 골키퍼가 볼을 돌리면서 점유율을 회복하며 네덜란드 선수들의 조급한 공격을 키웠습니다. 수비시에는 전방에 있는 선수들이 포어 체킹을 했습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1차 볼 배급 속도가 느려지면서 공격이 둔화됐습니다. 먼저 선제골 넣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지만 현실은 덴마크 지략에 간파 당했습니다.
후반 25분에는 아펠라이-데 용을 대신해서 훈텔라르-판 데르 파르트가 교체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교체 타이밍은 더 빨리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판 데르 파르트는 0-1로 뒤진 순간부터 교체로 투입했어야 할 선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교체 작전 이후에는 훈텔라르가 원톱, 스네이더르-판 페르시-로번이 2선 미드필더를 맡는 체제가 형성 됐습니다. 로번은 왼쪽으로 스위칭을 시도한 적도 있었죠.
그러나 스코어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덴마크가 잠궜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네덜란드가 볼을 빼앗기면서 덴마크가 역습을 펼쳤습니다. 네덜란드 선수들이 후방 부담에 시달리면서 힘겨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네덜란드는 90분 동안 비효율적인 전술을 일관한 끝에 덴마크에게 45년 만에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