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벵거 감독이 이끄는 아스날의 무관 징크스는 현재 진행형 입니다. 2004/05시즌 FA컵 이후 다섯 시즌 동안 우승에 실패했죠. 올 시즌 칼링컵 결승전은 우승을 달성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상의 기회였지만 그마저도 날렸습니다.
아스날은 28일 오전 1시(이하 한국시간) 웸블리에서 펼쳐진 2010/11시즌 잉글리시 칼링컵 결승전에서 버밍엄에게 1-2로 패하여 준우승에 만족했습니다. 전반 27분 니콜라 지기치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으며 전반 38분에는 로빈 판 페르시가 동점골을 넣으며 경기를 원점으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후반 44분 로랑 코시엘니가 볼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골키퍼 보이치에흐 스체스니와 위치가 겹치면서 헛발질을 범했고, 근처에 있던 오바 페미 마틴스의 결승골로 이어지면서 버밍엄의 우승 장면을 바라보고 말았습니다.
북런던의 강적을 제압한 버밍엄은 1963년 리그 컵 이후 4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다음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에 출전권까지 거머쥐었죠. 골키퍼 벤 포스터는 친정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시절을 포함해서 3시즌 연속 칼링컵 우승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아스날전에서 9개의 슈퍼 세이브를 기록하며 대회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습니다.
아스날, '승리 본능' 부족했던 칼링컵 결승전
아스날은 버밍엄전에서 4-3-3으로 나섰습니다. 스체스니가 골키퍼, 클리시-코시엘니-주루-사냐가 수비수, 윌셔-송 빌롱이 수비형 미드필더, 로시츠키가 공격형 미드필더, 아르샤빈-판 페르시-나스리가 스리톱을 맡았습니다. 파브레가스가 부상으로 빠진 공백을 로시츠키가 메우게 됐죠. '우승팀' 버밍엄은 5-4-1이라는 극단적인 수비 포메이션을 활용했습니다. 포스터가 골키퍼, 파헤이-리지웰-이라네크-존슨-카가 수비수, 가드너-라르손-퍼거슨-보이어가 미드필더, 지기치가 원톱으로 출전했습니다. 아스날 특유의 공격적인 팀 컬러를 무너뜨리겠다는 맞춤형 전술이었죠.
단순한 무게감을 놓고 보면, 아스날은 강팀이고 버밍엄은 약팀입니다. 하지만 아스날은 약팀과의 경기에서 꾸준히 승리하는 본능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상대 밀집 수비를 뚫지 못하면서 때로는 빠른 역습에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피지컬이 발달된 상대 공격수 제압에 어려움을 겪으며, 세트 피스에서의 집중력이 부족합니다. 고질적인 수준급 골키퍼 부재까지 포함하면 약팀과의 경기에서 고전했던 문제점이 두드러졌습니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공격 축구를 지향했던 벵거 감독의 전술 및 선수들의 특성을 다른 팀들에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아스날이 무관에 시달렸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버밍엄은 아스날 약점 공략을 위해 수비에 무게감을 두었죠.,
아스날은 경기 초반부터 버밍엄 밀집 수비에 고전했습니다. 버밍엄 선수들이 박스쪽을 중심으로 존 디펜스를 유지하면서 아스날 공격 옵션들의 침투 및 연계 플레이 완성도가 떨어졌습니다. 아르샤빈-나스리가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공격 분위기를 띄우는데 열을 올렸지만 평소보다 많은 상대팀 선수들과 싸워야 하는 부담감을 안았습니다. 특히 파브레가스 결장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파브레가스는 박스쪽으로 깊게 침투하면서 판 페르시의 골 기회를 도와주거나, 또는 스스로 골을 해결하거나, 능수능란한 경기 컨트롤을 통해 측면쪽을 활용하는 공격 루트를 확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시츠키는 상대 중원에 봉쇄당하면서 파브레가스가 소화했던 역할을 소화하지 못했죠. 그 결과는 아스날 공격이 반감되는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진=후반 44분 통한의 실책을 범했던 로랑 코시엘니 (C)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사진(arsenal.com)]
아스날은 전반전에 슈팅 10-5(유효 슈팅 5-4, 개), 점유율 53-47(%)를 기록했습니다. 버밍엄보다 앞섰지만, 점유율에서는 일방적으로 리드하지 못했습니다. 버밍엄이 경기 분위기를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버밍엄은 밀집 수비로 아스날 공격 템포를 늦추면서, 상대 공격을 차단하면 아스날 선수들이 전방쪽으로 올라왔던 공간의 뒷쪽을 노리는 종패스 위주의 공격 패턴을 펼쳤습니다. 그라운드를 넓게 움직이면서 선수들의 활동량이 많아졌죠.(후반 25분 이후부터 체력이 떨어진 이유) 또한 미드필더들은 적극적인 수비까지 펼치면서 아르샤빈-로시츠키-나스리 견제까지 도맡았습니다. 전반 27분 지기치 선제골 이후에도 경기 분위기를 주도했죠. 허리 싸움에서 버밍엄의 우세였습니다.
전반 27분 지기치의 골은 아스날 약점을 재입증하는 장면입니다. 존슨의 오른쪽 코너킥이 지기치의 헤딩골로 이어졌습니다. '신장 202cm' 지기치 높이를 이겨낼 아스날 수비수가 없었죠. 하지만 지기치가 헤딩을 준비하는 사전 동작을 차단할 타이밍이 늦었고 마크맨이 1명 이었을 뿐입니다. 버밍엄 공중볼이 지기치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음을 상기하면, 또 다른 선수가 지기치에게 붙어주면서 코너킥과 동시에 거칠게 밀어 붙였어야 했습니다. 상대 공격수의 슈팅을 방해할 수 있는 명분이 실리기 때문이죠. 반면, 전반 38분 판 페르시 동점골은 버밍엄 수비진의 문제였습니다. 골문쪽을 둘러 쌓았던 버밍엄 선수 6~8명의 동선이 겹치면서, 아르샤빈이 박스 오른쪽에서 상대 수비를 등지고 크로스를 띄웠고 판 페르시가 오른발 발리 슈팅으로 골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아스날의 가장 큰 문제는 후반전에 있었습니다. 공격 상황에서 세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죠. 첫째는 판 페르시-나스리가 시야를 넓히지 못하면서 볼 배급 공간이 좁아지는 단점을 노출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동료와 볼을 주고 받으려 했지만 빈 공간에 있는 또 다른 동료의 움직임을 못봤습니다. 그래서 아스날은 공격 옵션끼리 상대 수비 뒷 공간을 노리는 2대1 패스 연결이 잘 안됐습니다. 버밍엄 수비 공세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도 있지만, 2대1 패스는 상대 밀집 수비를 벗겨내는데 유용한 공격 패턴 입니다. 아스날은 엄연히 패싱력이 뛰어난 팀이지만 상대 수비를 이용하는 볼 배급에는 늘 기복이 있었고 버밍엄전에서 그대로 재현됐죠.
둘째는 후반 25분 이전까지 속공이 잘 안됐습니다. 버밍임이 후반전에는 3백으로 전환하면서 공격에 초점을 맞췄죠. 아스날이 골을 넣으려면 버밍엄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쏠린 것을 이용하기 위해, 빠른 볼 배급에 의한 역습 전개로 공격의 임펙트를 키웠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후방에서 볼 처리게 계속 늦어졌습니다. 특히 사냐는 볼을 끄는 단점을 노출했죠. 아스날 빌드업을 빠르게 전개해야 할 적임자는 사냐였습니다. 또한 로시츠키가 공격 조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스날 패스 줄기가 좌우 측면쪽에 쏠리는 단점을 노출했습니다. 2선 중앙을 거치지 않고 측면에 이어 박스쪽으로 전달되는 패턴이었죠. 버밍엄 수비 입장에서 아스날 공격 패턴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아스날이 교체 작전에서 버밍엄에게 패했습니다. 아스날은 후반 24분 벤트너(out 판 페르시) 후반 31분 샤막(out 아르샤빈)을 교체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벤트너-샤막은 팀 공격에 이렇다할 기여를 하지 못했죠. 그런데 버밍엄은 후반 4분 보세쥬르(out 가드너) 후반 37분 마틴스(out 파헤이), 후반 46분 제롬(out 지기치)을 조커로 활용했습니다. 보세쥬르의 투입으로 기동력을 강화했다면 마틴스 출전은 골을 의식했습니다. 제롬의 내보낸 것은 2-1 리드에 따른 시간 관리 차원이었죠. 정작 아스날이 빼야 할 선수는 로시츠키 였습니다. 하지만 로시츠키를 대신할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 아스날의 문제였죠. 파브레가스 결장 여파가 컸던 이유입니다.
아스날은 후반 25분 이후 공격에 자신감을 얻으면서 여러차례 슈팅을 날렸습니다. 버밍엄 선수들의 체력이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9개의 슈퍼 세이브를 기록했던 포스터의 벽을 넘는데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후반 44분 코시엘니의 실책으로 마틴스에게 통한의 골을 내주는 장면을 연출했죠. 후반전 공격의 패착까지 포함하면, 아스날의 칼링컵 우승 실패는 '스스로 자멸한 결과'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버밍엄에 우세였지만,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승리 본능'이 부족했습니다. 아스날이 무관의 불운을 떨치지 못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