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4년생으로서 올해 나이가 만 27세 입니다. 지금도 1984년생 또는 빠른 1985년생 친구들과 대화하면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이 고3 시절의 추억입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축제라고 불렸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저희는 고3 이었기 때문이죠. 대학 입시와 싸우는 시기라서 월드컵 전 경기(64경기)를 모두 다 보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한국전, 주말에 열리는 경기가 아니면 생중계는 꿈도 못꾸었죠. 당시 고3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나는 왜 고3 인걸까?'라며 마음속으로 괴로워 했습니다.
아무리 축구 경기를 즐겨보는 저였지만, 고3 신분이라서 월드컵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능이 끝난 이후에는 케이블에서 2002년 월드컵 경기들을 줄지어 재방송을 내보내면서 밀린 경기를 챙겨봤지만요. 그럼에도 2002년은 저에게 '좋지 않은 해'로 각인 되었습니다. 학교 방침에 의해 공부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음에도 성적이 오르기는 커녕 떨어지기 일쑤였고, 결국 수능에서 예상치 못한 점수를 받고 말았습니다. 재수를 할까 생각했지만 집안 사정상 바로 포기했죠. 그때를 생각하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답을 찾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2002년은 저에게 '희망의 해'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척도는 대학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대학 못나와도 성공하는 사람은 한국에서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으로 보였지만, 누군가를 보면서 그때의 시련을 이겨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이름을 떨쳤던 '산소탱크' 박지성(3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처럼 말입니다. 2002년의 박지성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2002년 박지성을 보면서 삶의 희망을 얻다
2002년의 박지성으로 되돌아가면, 그가 한국의 캡틴이자 아시아의 축구 영웅으로 군림하면서 맨유의 주축 선수로 활약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언론사에서는 2002년 월드컵 최종 엔트리 탈락 1순위로 박지성을 꼽기도 했죠. 이동국-고종수-안정환 같은 당시 한국 축구 최고의 스타들에 비해 무명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수비형 미드필더 및 윙백으로서 궂은 역할을 도맡았지만 포지션 한계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 및 주목을 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력 및 잠재력에 비해 저평가되었던 선수였죠. 그가 히딩크 체제에서 얼마만큼 실속이 강했는지를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박지성은 한국 축구의 역사에 없는 선수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수원공고 시절 어느 모 K리그팀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했고, 명지대 축구부에 들어가지 못할 뻔했던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명지대 테니스부가 정원 1명을 덜 채웠기 때문에 축구부 입단이 가능했지만요. 만약 그것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박지성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올림픽대표팀 발탁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죠. 허정무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과 김희태 당시 명지대 감독이 바둑을 두면서 박지성이 대표팀에 합류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박지성을 불신하는 어딘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죠.
그러나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 개막 이전의 평가전에서 자신의 '미친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잉글랜드-프랑스 같은 세계적인 강호들을 상대로 골을 터뜨리며 한국의 월드컵 돌풍을 이끌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실력으로 과시했죠. 공교롭게도 두 경기 모두 0-1 상황 및 한국이 경기 내용에서 밀렸을 때 동점골을 터뜨렸습니다. 잉글랜드전에서 헤딩 슈팅으로 상대 골망을 갈랐다면, 프랑스전에서는 김남일의 킬러 패스를 받아 상대 수비수 2명을 제치고 왼발 인스텝 슈팅으로 골을 터뜨렸죠. 특히 프랑스전 골은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 윙 포워드로 거듭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자신감의 토대가 됐습니다.
그런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 본선 포르투갈전 결승골 및 공수 양면에서의 준수한 활약을 펼친 끝에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21세의 어린 나이 속에서 강호를 상대로 흔들림 없는 침착한 활약, 경기 상황에 따라 측면 공격수와 중앙 미드필더를 오가며 맡은 역할을 성실히 소화했던 멀티 플레이어 기질, 매 경기 기복이 없는 꾸준함, 연장전에서도 바닥나지 않는 강철 체력, 승리를 위해 악착같이 덤벼드는 집념은 국민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됐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21세 윙어를 대표팀의 주전으로 발탁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게 됐죠. 그 분위기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오랫동안 회자되었죠.
당시 고3이었던 저로서는 박지성을 보면서 '노력하면 언젠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박지성은 축구에서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100% 밟았던 선수는 아니었고, 어렸을적 부터 '한국 축구를 빛낼 천재'로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예로 들면 항상 1등을 했던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노력이 습관으로 굳어지면서 좋은 지도자(김희태-허정무-히딩크 감독)에 의해 육성되었던 선수였죠.
그리고 저는 공부가 결코 저의 인생을 좌우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다른 분야에서도 열심히 하면 좋은 성과를 달성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비록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꿋꿋이 노력하면 그 실패를 만회하고 성공의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물론 저의 생각이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공부 열심히 했으면 정말 좋았다'는 후회를 지금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2002년 월드컵 활약은 입시 경쟁에서 위축되었던 저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박지성을 통해 삶의 희망을 얻었죠. 스포츠는 삶의 찌든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마음속의 희열을 안겨주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데, 나중에 생각해봤더니 그게 맞더군요.
저의 마음을 진솔하게 전하자면, 박지성이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주목 받는 기대주로 성장하기를 바랬습니다. 21세의 박지성이라면 월드컵 4강 만큼 값진 또 다른 업적을 달성하는 시간 및 기회가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대표팀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과연 유럽에 진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시기였지만 웬지 모르게 '성공할 것 같다'는 긍정적 느낌을 얻었습니다. 그 이후 박지성은 2003년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 진출 이후 부상 및 부진으로 힘겨웠던 세월이 있었고, 2005년 맨유 입단 뒤에도 부상 악령 및 로테이션 경쟁 속에서도 '맨유 롱런'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일취월장 했습니다. 지금은 맨유에 없어선 안 될 공격 옵션으로 거듭났죠. 마치 오뚝이 처럼 시련에 굴하지 않고 성공을 향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저 같은 축구팬을 가리켜 '박지성 세대'라고 합니다. 박지성 경기를 늘 지켜보면서 응원하고, 환호했고, 아쉬워했던 축구팬들 말입니다. 올드 축구팬들이 70~80년대 차범근의 활약상을 보면서 지금도 그 향수를 잊지 못하는 것 처럼 말이죠. 저마다 생각 및 가치관, 환경이 다르겠지만 성공을 향해 꿈꾸는 젊은 분들은 박지성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분들도 박지성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사회에서 입지를 키우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만큼, 박지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교과서'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지성은 오늘 국가 대표팀에서 은퇴했습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종횡무진 움직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맨유 소속으로서 앞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아시안컵에 차출되기 전까지 맨유 입단 이래 최고의 활약상을 펼쳤다는 평가가 결코 어색하지 않았죠. 그 기세가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맨유에서 오랫동안 뛰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현실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박지성의 활약에 힘을 얻으며 지친 일상을 해소하고, 삶의 기쁨과 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박지성 선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끝으로 포스팅을 마칩니다.
"박지성 선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국가 대표팀을 떠나셨지만, 국민들은 박지성 선수의 맨유 활약을 지켜보며 격려할 것임을 잊지 말아주세요. 2000년을 시작으로 국가 대표팀에서 헌신했던 11년은 정말 뜻깊은 시간 이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감동을 안겨줬던 21세의 청년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겁니다. 정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