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선수에게 있어 유럽에서 뛰는 것은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였습니다. 과거 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 무대를 평정하며 한국 축구의 위상을 세계에 떨쳤고 같은 시기 허정무도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는 두 선수만 뚜렷하게 성공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현지 적응 실패, 감독과의 불화, 실력 부족 등의 이유로 유럽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쓸쓸히 국내에 귀국했습니다. 유럽 클럽의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하는 불운 또한 마찬가지 였습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이 유럽에서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 였습니다. 설기현이 2000년 벨기에 로얄 앤트워프에 명문 클럽 안더레흐트를 거쳐 잉글랜드 무대에 입성하면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에서 롱런할 수 있는 힘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2005년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이적 및 맹활약을 발판으로 한국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하는 기회가 점점 늘어나면서 유럽 축구와의 거리감을 좁혔습니다. 최근에는 박주영-이청용 같은 젊은 선수들까지 두각을 떨치면서 '한국 선수가 유럽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같은 유럽 팀에서 한국인 선수 2명이 함께 활약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박지성과 이영표는 2003년 부터 2005년까지 PSV 에인트호벤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지금의 차두리와 기성용은 올해 여름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의기투합하며 성공을 다짐했습니다. 에인트호벤과 셀틱이 명문 클럽임을 상기하면 한국인 선수 2명이 자리잡는 것은 단순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의 명문이자 세계 최정상급 클럽인 맨유에서 한국인 선수가 2명 활약하는 것은 어쩌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지난 18일 맨유 한국어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박지성을 영입하면서 우리가 한국 축구에 대해 눈을 떴다"고 운을 뗀 뒤 "한국의 젊고 재능있는, 잠재력을 갖춘 환상적인 선수들이 곳곳에서(프랑스, 스코틀랜드, 독일, 네덜란드, 중동 등)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한국의) 재능있는 선수들을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있다"며 한국인 선수의 영입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이어 "한국과 일본 대표팀이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며 한국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를 눈여겨 보고 있다는 힌트를 던졌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자신이 주시하는 한국인 선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볼턴의 에이스' 이청용이 유력한 선수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청용은 지난 시즌 볼턴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가지며 팀 전력에 없어선 안 될 핵심 자원으로 거듭났고, 남아공 월드컵 맹활약까지 더해지면서 박지성에 이어 한국 축구의 아이콘으로 급부상 했습니다. 박지성이 "이청용은 나를 능가할 선수"라고 칭찬할 정도로, 이청용은 앞으로 10년 동안 유럽 축구에서 두각을 떨칠 가능성-잠재력-실력까지 겸비했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네임벨류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이청용은 불과 얼마전까지 리버풀의 영입 관심을 받았고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에게 실력적인 칭찬을 받았던 한국 축구의 보물입니다. 프리미어리그 빅 클럽들과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퍼거슨 감독이 모를리 없습니다. 더욱이 맨유 홈페이지는 지난 11일 프리미어리그 프리뷰 볼턴편을 소개하면서 이청용을 '톱 맨(Top Man)'으로 선정했습니다. 맨유는 "지난해 여름 FC서울에서 이적한 이청용은 폭풍처럼 리복 스타디움(볼턴 홈구장)을 접수했다"며 볼턴 최고의 선수임을 인정했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직접적으로 이청용을 칭찬한 적이 없었지만 선수 개인의 가능성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맨체스터와 볼턴은 서로 가까이에 인접한 도시들입니다.
물론 퍼거슨 감독은 지난 2006년 9월에 "한국의 영보이(Young Boy)를 눈여겨보고 있다"며 한국인 선수의 영입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이듬해 7월 한국 투어에서는 국내 TV 방송국 인터뷰를 통해 그 영보이가 박주영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박주영의 맨유 이적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2006~2007년에 각급 대표팀 차출에 따른 혹사 후유증에 빠지면서 잦은 부상에 시달린 끝에 최상의 공격력을 과시하지 못했고 한때 FC서울의 벤치 멤버로 내려갔습니다. 2007년에는 같은 FC서울 소속의 기성용에게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지만 선수 본인은 소속팀에 잔류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청용은 3~4년 전 박주영의 경우와 다릅니다. 박주영은 당시 K리그에서 활약중이었지만, 지금의 이청용은 상대 수비의 집중 견제를 받을 정도로 볼턴에서 영향력을 발휘중인데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검증된 자원입니다. 퍼거슨 감독이 자신의 존재감을 가까이에서 인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또한 이청용은 병역 문제가 해결된 선수로서 오랫동안 유럽에서 뛸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박주영-기성용 같은 병역 미필자 선수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맨유를 비롯한 다른 빅 클럽에서도 군 문제가 해결 된 한국 선수에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청용은 최근 볼턴과의 계약 연장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볼턴 입단 과정에서 2012년 5월까지 뛰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그 기간이 더 늘어나는 것이죠. 오히려 이청용과 볼턴에게는 빅 클럽 이적을 향한 좋은 기회입니다. 볼턴에서의 맹활약을 통해 자신의 몸값을 키우며 볼턴에게 막대한 이적료를 안기고 빅 클럽으로 이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이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볼턴 입장에서도 이청용의 촉망받는 미래를 위해 빅 클럽 진출을 허용할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청용은 자신의 최종 정착지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고 밝혔고 FC서울 시절부터 스페인 무대에서 뛰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청용은 '온리 스페인'을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아스날 축구 스타일을 좋아했고, 많은 사람들이 실패할 것이라고 여겼던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 성공했습니다. 첼시 미드필더 마이클 에시엔이 과거 맨유팬이었던 것 처럼, 아무리 이청용이 스페인과 아스날에 관심이 있더라도 맨유의 러브콜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청용의 대표팀 선배인 박지성의 목표는 맨유에서 오랫동안 뛰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이적설 및 방출설에 시달렸으나 꿋꿋이 6시즌째 입지를 지키며 퍼거슨 감독의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자신보다는 팀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치면서 맨유의 알토란 같은 존재로 부각 되었죠. 그런 박지성의 존재감이 앞으로 꾸준히 빛을 발하면 맨유에서 롱런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청용이 볼턴에서 공격의 파괴력을 강화하며 '맨유에서 통할 수 있다'는 믿음감을 퍼거슨 감독에게 심어주면, 어쩌면 박지성과 이청용은 같은 팀에서 활약할지 모릅니다. 두 선수가 맨유맨으로서 올드 트래포드를 활발히 휘젓는 날이 다가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은 한국 축구의 이정표를 쓰는 상징적인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