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엘 니뇨' 페르난도 토레스(26)는 소속팀 리버풀의 특급 골잡이로서 거의 매 경기에서 골을 넣었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무기력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스페인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 공격수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골잡이로서 남아공 월드컵 본선 6경기 무득점은 아쉬운 활약상입니다.
우선, 토레스는 2007년 여름 리버풀 이적 후 지금까지 클럽 축구에서 109경기에서 65골 12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프리미어리그 최정상급 골잡이로 떠오르면서 리버풀의 새로운 상징으로 거듭났고 첼시-맨시티 같은 부자 클럽들에게 거대한 이적료의 영입 제안을 받았던 선수였습니다.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다비드 비야와 함께 '영혼의 투톱'을 형성하여 유로 2008 우승을 기여했고 곤잘레스 라울 이후 스페인의 새로운 축구 아이콘으로 거듭나면서 앞으로의 축구 인생이 창창할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토레스는 남아공 월드컵에서 많은 축구팬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4강 독일전까지 본선 6경기 무득점에 그쳤으며 유효 슈팅도 5개에 불과합니다. 6경기 중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한 경기가 없으며 본선 2차전 온두라스전 부터 8강 파라과이전까지 4경기 연속 선발 출전했지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상대 수비수에게 공을 빼앗기거나, 상대를 제치지 못하거나, 결정적인 골 기회를 무산시키거나, 패스를 받을 공간으로 움직이지 못해 위치선정까지 문제점을 나타내는 일이 잦아지면서 부진이 장기화된 것이죠.
어쩌면 토레스의 부진은 예견된 결과였을지 모릅니다. 리버풀 이적 이후 살인적인 경기 일정을 소화하면서 사타구니 부상이 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친 슈퍼 스타들 중에서 이름값을 못한 선수들이 여럿 있는데 토레스도 그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습니다.(EPL의 저주) 시즌 중간 휴식기가 없고, 컵대회가 다른 빅 리그보다 1개를 추가적으로 병행하고, 상위팀은 유럽 대항전을 치르는 프리미어리그의 빡센 경기 일정이 선수들의 몸을 지치게 했고 토레스도 그 중에 한 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토레스는 지난 시즌 사타구니 부상에 따른 결장 횟수가 늘어나면서 꾸준히 경기 감각을 기를 수 있는 리듬을 잃었습니다. 거의 매 경기에 골을 넣었던 흐름도 무뎌지면서 리버풀 골잡이로서의 저력을 남아공 월드컵에서 떨치지 못했습니다. 다른 스페인 동료 선수들이 공수 양면에 걸쳐 펄펄 뛰고 있는 것과 달리 토레스의 몸은 여전히 무겁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스페인이 월드컵 결승에 진출했던 이유는 점유율을 강화하는 미드필더진의 짜임새 넘치는 공격 전개와 비야의 신들린 골 감각으로 지탱했습니다. 스페인은 다른 팀 들과 달리 공격수보다는 미드필더진에 전술적 초점을 강화하는 팀이고 허리의 튼튼함이 세계 최강이기 때문에 토레스의 부진 속에서도 끄떡없이 잘 버텼습니다. 공교롭게도 토레스가 선발 출전했던 4경기는 스페인이 모두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토레스가 골이 없는 현 상황에서 월드컵 우승에 도전하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스페인은 패스 게임 리드와 점유율 강화를 앞세운 공격적인 축구를 통해 여러차례 골 기회를 노리는 팀이지만 본선 6경기에서 7골에 그쳤고 그 중에 5골이 비야의 몫 이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공격축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독일이 4강 스페인전 이전까지 본선 5경기에서 13골을 넣으며 지구촌 축구팬을 사로잡은 것과 비교하면 스페인의 골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더욱이 최근 3경기에서 1-0 승리를 거듭하는 상황입니다. 탄탄한 수비 조직력의 힘이 컸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공격력이 문제였고 그 중심에 토레스가 있습니다.
토레스의 독일전 선발 제외는 스페인 대표팀 입장에서 성공적 이었습니다. 토레스를 대신해서 원톱으로 출전했던 비야가 상대 센터백을 흔들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지만, 비야의 대체 왼쪽 윙어 자원이었던 페드로가 쉴새없이 좌우 측면을 흔들며 여러차례 결정적인 공격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대표팀은 지금까지 원톱에서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습니다. 토레스는 이미 부진으로 귀결됐고, 비야 원톱 카드는 본선 1차전 스위스전과 독일전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5골을 넣었던 나머지 4경기에서의 비야 포지션은 왼쪽 윙어 였습니다.
물론 유로 2008에서는 토레스-비야 투톱이 4-4-2를 쓰던 스페인 우승의 결정타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스페인 대표팀은 4-2-3-1을 쓰고 있으며 토레스와 비야 중에 한 명은 공격수 출전을 포기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유로 2008에서는 아라고네스 감독이 지휘했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델 보스케 감독이 스페인 사령탑을 맡고 있습니다. 토레스 부진의 또 다른 원인은 유로 2008과 다른 팀 전술에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유로 2008에서 측면 돌파를 주로 활용하는 공격 패턴을 구사했습니다. 비야가 쉐도우로서 프리롤 역할을 맡아 측면까지 움직여 좌우 윙어와 공존했는데, 토레스가 전방에서 상대 수비를 앞쪽으로 끌어내거나 빈 틈을 노리는 움직임으로 빈 공간을 창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스페인이 공격 지역에서 다양한 패턴의 골 기회를 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표팀은 측면보다는 중앙 공격을 선호하며 좌우 윙어를 맡는 비야-이니에스타는 철저하게 중앙 성향 입니다. 팀 공격의 근간이 중앙에 쏠린데다 2선에서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토레스의 역할 비중이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4강 독일전에서 비야가 원톱을 맡아 기대 이하의 폼을 보였던 것도 같은 맥락 입니다.
공교롭게도 토레스는 리버풀에서 4-2-3-1의 원톱으로서 꾸준히 골을 넣었던 선수였습니다. 바벌(리에라)-제라드-카위트(막시)가 버티는 2선 미드필더들이 철저하게 토레스에게 골 기회를 밀어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4-2-3-1은 리버풀과 달리 원톱보다는 미드필더진이 중심입니다. 알론소-부스케츠가 중원을 버티면서 3경기 연속 무실점에 힘입어 결승에 진출했고 비야(페드로)-사비-이니에스타가 2선에서 유기적인 콤비 플레이를 펼치면서 공격적인 경기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골에 초점을 맞추는 토레스가 스페인 대표팀에서 영향력을 높이기에는 전술적인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그 약점은 스페인과 결승에서 상대하는 네덜란드가 간파했을지 모릅니다.
스페인은 오는 12일 오전 3시 30분(이하 한국시간) 네덜란드와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을 치릅니다. 두 팀 모두 월드컵 첫 우승을 꿈꾸기 때문에 결승전에서 그동안 비축했던 에너지를 모두 쏟을 것입니다. 단판 경기이기 때문에 상대팀 보다 골을 많이 넣는 팀이 우승하며 스페인은 목표 달성을 위해 원톱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토레스의 선발 기용 문제를 비롯해서 전술적인 보완에 이르기까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델 보스케 감독이 토레스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원톱으로 믿고 기용할지, 아니면 토레스보다는 비야에게 원톱 선발 출전을 맡길지 그 선택이 스페인의 월드컵 우승 여부를 좌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