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 국가 대표팀을 지휘했던 허정무 감독이 재충전을 위해 사령탑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이 연임을 부탁했으나 가족들의 만류 의사를 받아들여 대표팀을 떠나게 됐습니다. 감독 계약 기간이 지난달 30일까지 였기 때문에 사퇴가 아닌 계약 만료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허정무 감독이 국내 사령탑 최초로 월드컵 16강을 이끈 '결과'는 박수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원정 월드컵에서 본선 탈락을 거듭했던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남아공 월드컵 16강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의 16강 진출 및 우루과이와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허정무 감독의 전술적 능력 보다는 선수들의 퀄리티 향상이 결정타 였습니다. 지도자의 철저한 지략이 돋보였다면 지금쯤 남아공에서 8강전을 치렀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한국 축구가 남아공 월드컵보다 발전된 행보를 거듭하려면 허정무 감독의 뒤를 이을 차기 대표팀 사령탑을 잘 뽑아야 합니다. 축구는 감독의 비중이 높은 스포츠이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의 감독 결정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짊어지는 결정타가 될 것입니다. 차기 사령탑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입니다.
우선,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들 중에 대부분은 국내파 감독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맡겨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허정무 감독이 월드컵 16강 진출을 일궈낸 성과가 결정타가 되어 국내파를 선호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정해성 국가 대표팀 수석 코치, 홍명보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며 최강희 전북 감독, 김호곤 울산 감독, 김학범 전 성남 감독이 또 다른 후보로 거론되는 분위기입니다. 최강희-김호곤 감독이 K리그의 현직 감독이고 김학범 전 감독이 1년 7개월 동안 현장을 비웠다는 점에서 정해성 수석코치, 홍명보 감독 중에 한 명이 대표팀을 이끌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국내파는 홍명보 감독입니다. 지난해 U-20 월드컵에서의 지략가적 향기로 8강 진출에 성공하여 많은 언론들의 전술적인 칭찬을 받았고, 현역 선수 시절 정신적 지주로서 선수들을 똘똘 뭉쳤던 것, 여론의 많은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에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상징성에 적합합니다. 하지만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2012 런던 올림픽 감독직을 겸임하고 있어 국가 대표팀 감독을 병행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으로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홍명보 감독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해성 수석코치는 앞으로 6개월 남은 아시안컵을 대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입니다. 아시안컵 준비하는 시간 및 평가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새로운 전술을 실험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전술을 유지하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합니다. 물론 아시안컵은 일부 축구팬들에게 월드컵보다 비중 낮은 대회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1960년 이후 51년 동안 아시아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대회를 통해 우승컵을 들어올려야 합니다. 반 세기 넘게 메이져 대회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한국 축구에게 아시안컵은 중요한 의미를 던져줍니다.
정해성 수석코치는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허정무 감독과 더불어 중동의 강호들을 상대로 선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원정 2-0 승리, 이란 원정 1-1 무승부가 대표적 예 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원정은 19년 만에 적지에서 거둔 승리였으며 이란 원정은 극성스런 이란팬들의 응원 속에서 패하지 않았고 전반 막판부터 한국이 경기 흐름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거스 히딩크 감독 체제에서 코치를 역임하며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도왔고 그 이후 제주 감독으로서 프로팀을 지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내공이 풍부합니다.
하지만 정해성 수석코치 체제로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대비하기에는 무리함이 있습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감독의 지략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선진적인 노하우를 습득해야 합니다. 허정무 감독이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공수 밸런스 유지 및 공격 과정에서의 연계 플레이, 수비 조직력 등과 같은 전술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한국 축구를 깊이 이해하면서 허를 찌르는 용병술과 파격적인 전술로 좋은 성과를 일궜던 브라질 출신의 세르지오 파리아스 알 아흘리 감독(전 포항 감독)이 적격입니다.
파리아스 감독은 포항 사령탑 시절 "내 조국인 브라질에서 열리는 2014년 월드컵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하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팀이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월드컵의 꿈을 간직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다할 스타 없이 K리그와 AFC 챔피언스리그를 비롯한 여러 대회를 제패했고, 압박 축구를 중요시하는 K리그의 환경에서 아기자기한 패스와 창의적인 플레이를 도입하여 남미식 공격 축구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던 파리아스 감독의 포항 시절 업적을 놓고 보면 대표팀 감독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파리아스 감독이 포항과 이별했던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지도자로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길 수 있는 최적의 지도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외국인 감독으로서 한국의 축구환경과 문화를 잘 이해하는데다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이 자연스러운 지도자라는 점은 다른 외국인 감독보다 플러스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알 아흘리와의 계약 기간이 내년 6월까지인 만큼, 소속팀에서 경질되지 않는 조건 하에서 현실적으로 아시안컵 이후에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습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입증한 것 처럼, 세계 축구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선수들과 그들을 하나의 팀으로 아우르며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감독의 능력이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8개 팀 중에서 4개 팀이 남미에 속했고, 남미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스페인과 외칠-뮬러 같은 테크니션들을 활용한 독일의 강세가 돋보였습니다. 가나 또한 기술과 순발력의 조화가 유기적이며 네덜란드는 압박 축구를 근간으로 삼지만 남미식 창의적인 공격 패턴으로 재미를 봤습니다. 한국 축구도 기술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선호받기 때문에 이제는 이들의 능력을 세계 무대에 꽃피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 적임자는 파리아스 감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