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탱크' 박지성(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중에 하나가 바로 '수비형 윙어' 입니다. 지난 4월 잉글랜드 일간지 <가디언>이 "박지성 같은 수비형 윙어(defensive winger)'가 현대 축구의 키워드로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박지성을 현대 축구 윙어의 새로운 유형인 수비형 윙어로 평가했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박지성이 맨유에서 다른 윙어들에 비해 공격보다 수비에서 더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인 수비가담과 끈질긴 대인마크, 절묘한 커팅 능력으로 상대팀 측면 공격을 잘 끊었고 팀의 수비 밸런스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파트리스 에브라와 하파엘 다 실바 같은 공격적인 성향의 풀백들이 전방으로 침투할때는 공간 창출로 상대 선수의 시선을 분산시켜 풀백의 침투 공간을 열어줬습니다. 여기에 측면과 중앙, 최후방과 최전방을 부지런히 누비며 쉴세없이 압박을 가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박지성의 수비 능력은 지난해부터 맨유의 주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 2007/08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AS로마, 4강 FC 바르셀로나와의 1~2차전에서 모두 선발 출전하여 수비에서 두각을 나타내더니 어느새 '강팀용 선수'로 부각 되었습니다. 당시 바르셀로나와의 1~2차전에서는 '축구 천재' 리오넬 메시와의 정면 대결에서 투쟁적인 수비력을 발휘하며 여러차례 인터셉트 후 재빠르게 역습을 전개했습니다. 지난 시즌에는 조 콜, 조세 보싱와, 바카리 사냐, 더글라스 마이콘 같은 세계적인 풀백과 윙어의 공격을 철저히 차단하며 팀 전력에 힘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박지성은 지난 시즌까지 '이기적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공격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비 위주 또는 이타적인 성향의 경기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팀을 위해 희생하는 부분이 강했습니다. 호날두는 수비 가담을 꺼리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맨유는 호날두의 매직 드리블과 폭발적인 득점력에 치우친 공격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그에게 출중한 수비력을 기대하기 무리였습니다. 호날두와 반대되는 타입의 박지성이 맨유 전력에 꼭 필요한 존재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가디언은 박지성을 '수비형 윙어'로 규정했습니다.
박지성이 수비형 윙어로 부각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출중한 수비력에 비해 공격 포인트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국내 여론이 가디언의 시각을 참고하면서 공격 포인트 부족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죠. 박지성은 맨유에서 통산 129경기 출전 12골을 기록했습니다. 공격 옵션치고는 골 숫자가 저조합니다. 일각에서는 '이타적인 박지성에게 골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지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입버릇처럼 '박지성은 골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박지성이 공격에서도 팀에 크게 기여하기를 퍼거슨 감독이 바랬던 것이죠.
그래서 수비형 윙어는 박지성에게 있어 양날의 칼과 같은 키워드였습니다. 수비를 잘하는 윙어이자 공격이 떨어지는 윙어의 모든 뜻을 포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윙어는 수비보다 공격에서 강점을 발휘해야 인정받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박지성 같은 유형은 다른 윙어들과 차이점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박지성의 플레이는 나니-발렌시아-토시치-오베르탕 같은 드리블러 윙어, 예전의 긱스 같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윙어, 베컴과 피구 같은 크로스를 주무기로 삼는 윙어, 즉 세 부류를 포괄하는 공격형 윙어와는 엄연한 차이점이 존재했습니다. 수비가 강점인 박지성이 수비형 윙어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원래부터 수비형 윙어가 아니었습니다. 불과 2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윙어들과 두드러진 차이점이 없었습니다. 박지성은 2005년 유럽축구연맹(UEFA) 선정 올해의 공격수 베스트5에 선정될 만큼 유럽에서 공격력을 인정받은 선수였기 때문이죠. 그것도 셉첸코-아드리아누-호나우지뉴-에토 같은 세계적인 공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PSV 에인트호벤의 에이스로서 팀의 4강 진출 및 AC밀란과의 4강 2차전서 절묘한 선제골을 넣었던 것이 가장 큰 결정타가 되었기 때문이죠.
박지성은 불과 얼마전까지 12경기 연속 결장하면서 여론으로부터 '공격력이 좋지 않은 선수'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공격력이 좋지 않았다면 그는 에인트호벤과 대표팀에서 팀 공격을 이끄는 에이스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맨유 진출 초기에는 원톱으로 뛰었던 뤼트 판 니스텔로이의 '골 도우미'로서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2006/07시즌에는 멀티골을 비롯 5경기 5골을 넣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큰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음에도 5골 넣은 것은 스쿼드 플레이어로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박지성의 팀 내 역할은 점점 수비쪽으로 쏠립니다. 맨유가 호날두 시프트를 앞세워 공격을 주도하면서 박지성에게 희생적인 역할이 요구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박지성은 공격보다 수비에서 빛을 발했고 공격 과정에서는 동료 선수들에게 많은 패스를 받지 못하면서도 빈 공간을 창출하며 상대 수비의 시선을 분산 시켰습니다. 그래서 박지성의 공격적인 재능은 꾸준히 빛을 발하지 못했고 가디언으로부터 '수비형 윙어'로 평가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박지성이 수비형 윙어가 된 것은 맨유에서 부여받은 역할이 결정적인 몫을 했습니다.
만약 박지성이 원래부터 수비형 윙어였다면 올 시즌에도 수비 위주의 패턴으로 경기에 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26일 베식타스전을 비롯 올 시즌에 공격적인 비중이 커졌습니다. 지난 시즌보다 수비 가담을 줄이면서 공격 연결고리에 충실하는 것이 올 시즌 박지성의 경기 패턴입니다. 호날두를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보낸 맨유의 전술이 역습에서 점유율 축구, 속공에서 지공 형태로 바뀌면서 스타일 변화가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점유율을 중요시하는 맨유의 전술에서는 수비형 윙어의 꼬리표를 떼고 '공격형 윙어'로 변신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박지성의 시즌 초반 부진은 당연한 현상이었을지 모릅니다. 호날두와 균형을 맞추면서 수비와 역습이 몸에 익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공격에서 빛을 발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수비적인 역할에 치중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공격 과정에서의 파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2개월 동안 무릎 부상 및 감기 몸살로 빠지면서 맨유에서의 존재감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베식타스전에서 2개월 부상 공백을 잊게하는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왼쪽 측면에서의 패스 연결과 공간 창출, 그리고 패스 연결 과정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면서 팀의 점유율을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특히 문전 앞에서 상대 수비수를 제치려는 과감함과 3번의 슈팅이 골문쪽으로 날카롭게 향한것은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임펙트가 부쩍 좋아졌음을 엿보게 합니다. 물론 완성도가 떨어졌지만 시도 자체만으로도 박수 받을 수 있는 장면 이었습니다.
이것은 박지성이 맨유의 점유율 축구, 즉 공격적인 역할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호날두 같은 파괴적인 드리블러가 없는 맨유로서는 역습 축구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제는 점유율 축구로 승부수를 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지성은 맨유의 새로운 전술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며 진화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베식타스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것은 앞으로 실전에서 꾸준한 맹활약을 펼치기 위한 자신감과 직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박지성은 수비형 윙어가 아닙니다. 공격형 윙어로 변신중이고 팀에서도 그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들이 박지성의 변신 성공 여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박지성의 올 시즌 성공 여부는 공격력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공격적인 성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활약상이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