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은 세계적인 축구천재로서 카카-호날두-메시의 이름을 집중적으로 거론합니다. 세 명의 축구 천재는 출중한 공격력으로 유럽 축구를 호령했고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수식어를 다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지난 시즌까지 각각 이탈리아-잉글랜드-스페인 리그의 아이콘으로 활약했던 이들의 영향력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축구천재는 카카-호날두-메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실력과 맞먹거나 버금가는 또 다른 축구 천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리그 및 유럽 축구 판도를 좌우하는 영향력이 축구천재 3인방보다 모자라지만 적어도 기량에서는 세 선수에 뒤지지 않습니다. 축구 선수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기량이며, 축구 선수는 실력으로 말합니다. 분명 누군가는 범상찮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축구천재 3인방에 가려 과소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선수 중에 한 명이 바로 세스크 파브레가스(22, 아스날)입니다. 파브레가스는 2007/08시즌부터 '앙리가 빠진' 아스날의 에이스로 자리 잡으며 가파른 성장을 거듭하더니 올 시즌 자신의 천부적인 공격력을 맘껏 뽐내고 있습니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6경기에서 4골 8도움을 기록했고 지난 8월 15일 에버튼전에서는 2골 2도움, 지난 4일 블랙번전에서는 1골 4도움의 대활약을 펼쳤습니다. UEFA 챔피언스리그 2경기 2도움까지 합하면, 올 시즌 8경기에서 4골 10도움에 1경기당 1.25 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아스날이 6-2 대승을 거두었던 블랙번전은 파브레가스의 독무대였습니다. 전반 17분 박스 왼쪽에서 짧은 패스로 토마스 베르마엘렌의 왼발 중거리골을 도왔고 33분에는 상대팀 선수 3명을 뚫는 대각선 킬 패스로 로빈 판 페르시의 동점골을 엮었습니다. 4분 뒤에는 박스 부근에서 오른발로 가볍게 전진패스를 이어준 것이 안드리 아르샤빈의 역전골로 이어졌고 후반 12분에는 문전 정면에서 자신이 직접 왼발 로빙슛으로 상대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30분에는 횡패스로 테오 월컷의 오른발 중거리골을 어시스트했습니다.
파브레가스의 진가는 움직임과 패스에서도 빛났습니다. 아스날 진영과 하프라인 부근, 상대팀 진영, 그리고 좌우 측면과 중앙을 활발히 오가며 팀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60개의 패스를 시도하여 52개를 동료 선수에게 정확하게 연결하고 1골 4도움의 기록을 올렸을 정도로(패스 성공률 : 86.7%) 적시 적소의 공간에서 상대 수비망을 뚫는 날카로운 패스를 활발히 연결했습니다.
특히 빌드업 과정에서 아르샤빈-로시츠키와 스루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격을 전개했던 장면이 인상적 이었습니다. 이러한 파브레가스의 경기력은 아스날이 수비 불안 속에서도 미드필더진을 손쉽게 장악하여 대량 득점을 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됐습니다. 무리한 공격시도보다 자기 위치에서 차근차근 팀 공격을 전진시키는 경기 운영과 상대 수비 숫자에 따라 빠른 역습을 주도하는 컨트롤 능력도 인상적 이었습니다.
파브레가스의 화력이 올 시즌 폭발한 원인은 아스날의 전술과 밀접합니다. 아스날은 지난 여름 엠마뉘엘 아데바요르를 맨체스터 시티로 보내면서 4-4-2와 4-2-3-1을 혼용하던 팀의 전술을 4-3-3으로 변경했습니다. 아스날은 팀의 확실한 주득점원이자 타겟맨이었던 아데바요르를 떠나보내고 빠른 기동력과 정교한 패싱력을 자랑하는 공격 옵션들이 남으면서 기존 공격 자원들의 역량을 최대화 할 수 있는 4-3-3을 주 포메이션으로 채택 했습니다. 팀의 플레이메이커인 파브레가스의 능력이 아스날 전력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진 셈입니다.
아스날은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최다득점 1위(24골)를 기록중입니다. 하지만 아데바요르가 존재하던 시절처럼 누군가의 특출난 득점력에 의해 최다득점 1위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3골을 넘긴 선수가 3명(파브레가스, 베르마엘렌, 판 페르시)에 불과할 정도로 득점 자원이 다양합니다. 리그에서 8도움을 기록중인 파브레가스의 어시스트 능력이 팀의 최다 득점에 높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스날이 올 시즌 빅4 탈락 위기론을 이겨내고 리그 3위를 기록중인 원동력은 파브레가스 효과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난 8월 30일 맨유전에서는 파브레가스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빠진 끝에 1-2로 패했으며 공격 전개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파브레가스의 활약 및 경기 출전 여부에 따라 팀의 성적 및 전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만약 아스날이 맨유처럼 중요한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팀이었다면 파브레가스의 가치는 지금보다 더 화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스날은 2004/05시즌 FA컵 우승 이후 네 시즌 연속 무관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파브레가스가 카카-호날두-메시 같은 축구천재에 과소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에서는 호날두라는 No.1 스페셜 리스트에 가려진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파브레가스가 아스날의 에이스로 자리잡은 2007/08시즌에는 호날두가 세계 최고의 선수로 도약했기 때문입니다.
파브레가스로서는 2007/08시즌이 아쉬웠을지 모릅니다. 호날두를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로 이름값을 떨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그 당시의 아스날은 시즌 중반까지 맨유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였고 그 중심에는 파브레가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스날은 시즌 후반부터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과 체력 저하로 부침에 시달렸고 파브레가스도 고전을 거듭했습니다. 팀 선수층의 여건이 더 좋았다면 파브레가스의 능력이 호날두 못지 않게 빛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파브레가스는 팀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꿋꿋이 성장했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21세의 나이에 아스날 주장을 맡아 팀의 리더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올 시즌 8경기에서는 4골 10도움의 괴력을 발휘하며 아스날의 공격축구를 주도했습니다. 비록 카카-호날두-메시와는 조금 다른 성장 배경이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른 축구 천재들에 비해 과소평가 되었으나 올 시즌 만개의 꽃을 피운 파브레가스의 거침없는 성장이 계속될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