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007년 12월 이었습니다. 5개월째 공석이었던 국가 대표팀 감독직을 놓고 축구계 안팎에서 시끄러웠던 시기였죠. 당초 대한축구협회(KFA)는 그 자리에 외국인 감독을 앉히려고 했습니다. 제라르 울리에(전 리옹) 마이클 매카시(울버햄튼) 감독 중에 한 명을 영입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두 감독이 한국 대표팀 사령탑을 원하지 않으면서 끝내 물거품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국내 감독에 눈을 돌렸습니다. 울리에-매카시 감독 영입 실패 하루만에 허정무 전남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에 내정한 것이죠. 허 감독은 이미 대표팀 사령탑 경험이 있는데다 당시 2년 연속 FA컵 우승으로 토너먼트와 단기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가 주저없이 영입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허정무 감독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오락가락하는 대한축구협회의 감독 인선작업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허 감독의 자질이 끝없이 비판과 비난의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허 감독에 대해 '무승부가 너무 많다'를 비롯해서, '3백에 수비 축구를 하는 감독', '무전술로 유명한 감독', '답답하고 재미없게 경기하는 감독', '이미 대표팀 사령탑으로 실패했던 감독'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를 비롯해서 나중에는 '허정무 감독은 7무로 월드컵 우승할 사람이다'는 반응까지 나왔습니다.
그 여파는 허정무 감독의 사령탑 부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허정무호가 연이은 졸전을 거듭하면서 여론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던 것이죠. 특히 지난해 9월 10일 북한과의 최종예선 1차전에서는 졸전 끝에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허정무호를 향한 국민들의 질타가 어김없이 쏟아졌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여론으로부터 무의미한 전술, 용병술 부족 등을 이유로 경질 여론에 시달렸죠. 베이징 올림픽때 유행하던 '축구장에 물 채워라'라는 유행어가 북한전 이후로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에게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팀을 쇄신시키기 위해 중대한 변화의 카드를 꺼내든 것이죠. '한국 축구의 아이콘' 박지성을 주장으로 발탁하고 그동안 대표팀의 능률을 끌어올리기 어려웠던 4-3-3을 버리고 4-4-2라는 새로운 포메이션을 택했습니다. 4-4-2는 선수들의 콤비네이션 활약을 끌어올리는 대표적인 전술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 부합하는 젊고 싱싱한 선수들이 필요했고, 그동안 대표팀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꼽히던 세대교체를 꾀하여 이름값 보다 실력과 잠재력을 중요시 했습니다. 이 같은 허 감독의 결단은 대표팀이 지금까지 거침없이 순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벼랑끝에 몰린 대표팀을 구한 허정무 감독의 위기 대처 능력은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구사하지 않았던 4-4-2 포메이션으로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꾀했던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졸장은 어떠한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졸장과 차원이 다른 지도자 였습니다. 자신의 별명인 '진돗개'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승부근성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냈습니다. 아울러 '무전술 감독' ,' 3백 쓰는 지도자'와 같은 외부의 부정적인 편견을 이기고 자신의 지도자 역량에 대한 업그레이드에 성공했습니다.
만약 허정무 감독이 외국인 감독이었다면 지금쯤 실패의 기로에 접어들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외국인 감독들은 한국인 선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대표팀이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년 동안 쿠엘류-본프레레-아드보카트-베어벡에게 지휘봉을 넘겼지만, 대표팀 4백을 완성시킨 베어벡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한국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베어벡 감독이 그나마 3명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 체제와 아드보카트 체제에서 수석코치를 맡았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을 잘 알고 있었죠.
축구팬들은 '국내파 감독은 외국인 감독보다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인 감독들이 선진적인 전술 실행능력과 빼어난 축구 안목을 자랑하는 반면에 국내파 감독들은 이에 대한 부분이 취약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허정무 감독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안좋았던 근원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한국에서 외국인 감독들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대표팀 사령탑으로 성공한 지도자는 히딩크 감독 단 한 명에 불과하며 K리그에서는 발레리 니폼니시 전 부천 감독(현 톰 톰스크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 포항 감독, 세놀 귀네슈 서울 감독 뿐입니다. 그 중에 터키의 한일 월드컵 3위를 이끌었던 귀네슈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보여주기까지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만큼 외국인 감독들이 국내파 감독들에 비해 한국 선수를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한국식 스타일에 맞지 않거나 그에 대한 시간이 부족했던 외국인 감독들은 쓸쓸히 국내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외국인 감독과 달리 한국인 선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허 스카우터'로 통할 만큼 선수의 자질과 잠재력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국내에서 톱클래스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허 감독의 조련속에 걸출한 축구 스타들이 여럿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죠. 그런 능력이 있었기에 대표팀에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으며 더 나아가 세대교체에 성공했습니다.
차범근 수원 감독은 지난 7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을 계속 잘 이끌어서 국내 감독들이 팬들에게 편견없는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 국내 지도자가 (대표팀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말도 안 된다. 대표팀은 국내 지도자가 맡는 게 정서적으로 좋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허정무 감독의 승승장구가 그동안 팬들에게 평가 절하 되었던 국내 감독의 위상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것이 차범근 감독의 바람이죠. 이는 차 감독을 비롯해서 국내 감독 어느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죠.
히딩크 감독의 성공 신화는 외국인 감독 실패 사례가 많은 한국 축구에서 특별한 케이스였습니다. 팬들은 '히딩크 급'의 지도자가 대표팀 감독을 맡기를 원하며, 그런 과정 속에서 국내 감독들이 과소평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자신의 저력으로 그것을 이겨 냈습니다. 국내파 감독도 '한국판 히딩크' 감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허정무 감독이 보여준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울리에-매카시 같은 감독 보다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에 더 적합했다고 말입니다. '진돗개' 허정무 감독은 국내 감독에 대한 편견을 자신의 지도력으로 깨뜨린 '선구자'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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