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관중석에 가면 꼭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기 제대로 못하거나 실수하는 선수에게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 욕하거나 비방하는 사람들 말이죠. 물론 짜증이 나면 자연스럽게 안좋은 말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치지 않는다면 스트레스가 머릿끝까지 올라올 수 밖에 없죠. 왜냐하면 관중들은 돈을 내고 입장권을 구입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관중석에서 나쁜 소리들을 종종 하는 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욕을 많이하는데다 직설적인 사람이라 경기장에서까지 성격이 나타나더군요. 그런데 대 놓고 큰소리로 욕하거나 모욕하지는 않습니다. 경기를 조용하게 보고 싶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해전 농구장갔을때 특정 팀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는 아저씨들의 추한 모습을 보니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심하게 표현하면, 그 사람들 모습이 정말 쪽팔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톤의 혼잣말로 나쁜 말들을 내뱉죠. 마음속으로 스트레스를 끙끙 앓는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낫더군요. 저도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욕설 및 모욕이 안좋은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리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욕을 듣는 선수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경기장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하거나 열심히 뛰지 않는 선수는 몰라도(이것은 관중을 기만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경기장 많이 찾는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일리가 없죠. 저도 그런 선수들을 싫어합니다.) 좋은 활약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에게는 관중의 욕설에 마음의 부담이 되어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관중들의 심한 말이 가혹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유형의 선수들에게 "화이팅", "힘내"라는 큰 소리를 외칩니다.
그런데 얼마전 어린이날에 성남 종합 운동장에서 K리그 성남-전남의 경기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절실히 느낀게 있었습니다. 특정 선수에게 상당히 심한 모욕을 하는 축구팬을 보니까 '저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굳이 큰 목소리로 선수에게 험한 말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러웠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모욕을 계속 반복하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심리로 그러는지 모르지만요.
상황은 이랬습니다. 전남의 어느 모 선수가 공격 상황에서 슈팅 기회를 놓치거나 잦은 패스미스를 연발하더니 어느 한 관중이 "아이~저 녀석, 발 자르라고 그래"라고 크게 모욕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발 잘라"를 두번씩이나 크게 외치더군요. 한참 뒤에는 그 선수가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자 이번에는 그 관중이 있던 맞은편 스탠드에서 "소심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라는 괴성이 나왔습니다. 이는 "발 잘라"라는 관중의 모욕에 완전히 기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중석에서 무책임하게 나왔던 목소리가 선수에게까지 다 들렸던 것이죠.
관중의 목소리가 크게 들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남 경기장의 특성과 밀접합니다. 성남 경기장은 월드컵 경기장에 비해 규격이 크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 퍼져 나오는 큰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관중석에서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바깥에서 어떤 말들이 나오는지 잘 들리는 편이죠. 물론 경기장 관중들이 많거나 서포터즈의 응원소리가 컸다면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 없지만, 이날은 1만 1818명의 관중이 입장한데다 성남과 전남 서포터즈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관중석에 잘 들렸습니다. 아직도 제 머릿속에서는 정성룡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맴돌고 있죠.
문제는 "발 잘라"라는 모욕이 해당 선수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게 들렸다는 점입니다. 축구 못한다고 해서 발을 자르라고 화를 내는 것은, 한마디로 축구를 하지 말라는 소리죠. 지금까지 축구에만 몰두했고, 축구로 생계를 꾸리는 프로축구 선수들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것도 신체적인 것과 연관지어 비난한 것은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우리가 흔히 내뱉는 욕설은 "발 잘라"라는 말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죠.
그런데 그 선수는 다른 누구보다 골을 넣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당시 전남이 성남에게 1-3으로 밀렸는데, 전남은 후반 7분에 이천수를 투입하여 경기를 뒤집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여기에 이날 낮기온이 26도로 봄 날씨 치고는 무더웠는데, 그런 날씨 조건 속에서 뛰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그런 선수에게 "발 잘라"라는 말이 나온것은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2년전 수원-서울의 2군 경기에서 안정환이 경기 도중 관중석으로 난입했던 사건을 잊지 못합니다. 안정환은 한 여성 서울 서포터가 내뱉은 가족 모욕 및 지나친 비방을 참지 못해 관중석으로 달려가 거친 항의를 했습니다. 이에 안정환은 프로축구연맹 상벌위원회로 부터 벌금 1천만원 부과의 징계를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안정환이 아닌 서포터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 서포터의 철없는 행동이 안정환의 돌발 행동이 화나게 했던 것이죠. 저를 비롯한 많은 축구팬들은 관중의 모욕에 대한 심각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몇몇 축구팬들은 경기장에서 선수를 모욕하여 심리적으로 자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성숙한 관람 문화가 아쉽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관람 문화를 탓하기 보다는 관중 모욕에 대한 심각성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선수들은 각자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관중의 몰상식한 모습을 훌훌 털어버리거나 또는 마음속의 부담이 되어 심리적으로 흔들릴 것입니다. 문제는 후자 격에 속한 선수들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관중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느끼는데 앞으로의 경기에서 제 기량을 뽐내는데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일지 모릅니다. 마치 유럽 진출 초기에 네덜란드 홈팬들에게 거센 야유를 받았던 박지성과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남-전남의 경기는 어린이날에 열렸습니다. 이날 많은 어린이들이 무료입장하여 경기를 지켜봤는데, 관중석 어딘가에서 "발 잘라"라는 목소리가 들린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참 씁쓸합니다. '고객이 왕이다'라는 말이 있듯, 경기장에서는 돈을 내고 경기에 입장하는 관중이 왕입니다. 그러나 그라운드의 주인은 어느 누구도 아닌 선수입니다. 선수의 보다 나은 앞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질을 참으면서 아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