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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팬이 본 WBC, '야구는 아름다운 꽃'

 

어쩌면 축구팬인 제가 야구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하는게 다른 사람에게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야구와 축구가 한국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축구팬이 야구를 논하고, 야구팬이 축구를 논하는 정서가 그동안 우리들에게 달갑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구팬들이 유명 축구 게시판을 공격하고 축구팬들이 야구를 비방하는 일이 오랫동안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온라인 공간에서의 전쟁이 길고 치열했습니다.

물론 야구와 축구 중에 어느 종목이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인지는 쉽게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야구가 세계 빅3에 들어갈까 말까한 자국 프로리그를 운영하고 있다면 축구는 3부리그(K3리그) 운영에 세계 정상급의 시설을 자랑하는 축구장만 여러개를 보유한 인프라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기 축구회까지 활성화 될 정도로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 차이점이 있지만 워낙 우리나라의 스포츠 파이가 적다보니, 야구팬들과 축구팬들이 No.1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돌아오는 것은 소모적인 경쟁 뿐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야구와 축구 모두 한국 스포츠에 없어선 안될 '히트 상품'이라는 점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사실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축구처럼 완전히 미칠듯이 좋아하지 않았는데다 모 프로축구팀 서포터로 활동했기 때문에 '완전한 축구팬'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군 입대 전까지는 야구 경기를 TV로 보는 것이 곤욕이었습니다. 3시간 넘게 진행되는 야구 경기 시간이 너무 길고 따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쫒기느라 야구 경기를 볼 시간이 없었고 대학교때는 '지루한 야구를 보느니 90분 동안 하는 축구가 다이내믹하다'며 1년에 50차례 넘게 축구장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때는 야구의 전반적인 인기가 지금에 비해 떨어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야구의 '진짜 매력'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축구 경기에 쫓기면서 야구를 즐겨 볼 시간이 많지 않았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야구가 많은 사람들의 매력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한때 연간 관중 300만이 되지 않았던 프로야구가 지난해 500만 고지를 넘어서면서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 종목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제가 주로 찾는 유명 축구 게시판 여러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야구 이야기로 꽃을 피울 정도로 이 땅에 '야구 열풍'이 불어닥친 것입니다. 야구를 비방하는 이들도 아직은 존재하고 있지만 야구 인기의 오름세 분위기를 누르기에는 역부족인 모습입니다. 축구와 야구를 모두 좋아하는 스포츠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열린 베이징 올림픽은 야구와 축구의 명암을 엇갈리게 하는 결정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축구는 이탈리아전 0-3 완패의 무기력한 경기력을 일관하며 '축구장에 물채워라'라는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고 야구는 9전 9승에 힘입어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더욱이 허정무호가 지난해 9월 요르단전과 북한전에서 답답한 경기를 펼치면서 두 스포츠 종목의 인기 구도는 '축구<야구'로 완전히 기울어졌습니다. 특히 북한전 이후에는 '축구를 다루는' 제 블로그에 몇몇 네티즌들이 '아직도 축구 즐겨 봅니까? 정신건강에 해로우니까 절때로 보지 마세요', '요즘 시대에 축구글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까?'라는 내용의 악성댓글을 달으며 축구를 깎아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하 WBC)에서 야구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길 바랬습니다. 축구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하다 이듬해 베트남과 오만에게 발목 잡히고 K리그 흥행까지 저조했던 것 처럼 야구도 거품이 빠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시끄러웠던 감독 선임 과정을 비롯해 박찬호-이승엽의 불참,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부담감이 한국 야구 대표팀의 발목을 잡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발판삼아 축구의 인기가 회복되길 바라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그려봤습니다. 참으로 못된 축구팬이죠.

하지만 한국인의 끊어오르는 피는 절때로 못속이겠더군요. 한국이 도쿄돔에서 일본에게 2-14 콜드패를 당할때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WBC는 절때로 보지 않겠다'던 제가 주말에 우연히 TV를 틀어 보니까 김광현이 1회초부터 일본 타자들에게 무더기 안타를 맞더니 무라타 슈이치에게 스리런 홈런을 허용하면서 8실점으로 고개를 떨구고 강판당한 것입니다. 김광현의 모습이 어찌나 승부차기에서 결정적인 실축을 범한 선수의 심정과 비슷하게 느껴지던지 모르겠습니다. 12점차 패배 및 콜드패라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지만 '일본킬러' 김광현이 무너지는 모습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습니다. 어찌나 위로해 주고 싶었던지...

그 이후부터는 WBC 한국 경기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챙겨 봤습니다. 'WBC 우승은 못하더라도 일본의 콧대를 완전히 눌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제 마음속을 야구로 이끌리게 한 것이죠. 특히 '의사' 봉중근이 일본 타선을 두번이나 요리했던 경기는 정말 시원하고 화끈했습니다. 그런데 탈락 위기에 있던 일본이 2라운드 패자부활전에서 쿠바를 꺾은뒤 1~2위 결정전에서 '여유있게 경기하던' 한국까지 이기더군요. 마치 미꾸라지처럼 지지리도 운이 좋았던 겁니다. 그 모습이 명랑만화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나애리처럼 얼마나 얄미웠던지요.(일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WBC 일정이 석연찮은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WBC 우승 트로피는 한국이 아닌 일본 선수들이 하늘 위로 치켜 세웠습니다. 1회 대회때도 한국에게 두번이나 지면서도 우승하더니만 2회 대회에서는 봉중근에게 두 번 당하고도 결승전에서 한국을 누른 것입니다. 결승 한국전에서 6타수 4안타에 결승 2타점을 올린 스즈키 이치로와 한국전 선발투수로 선전했던 이와쿠미 히사시의 안정적인 볼배합을 우리 선수들이 정면공략하지 못한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김광현이 결승전에 마지막 구원 투수로 등판해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고 '특유의' 웃음을 짓기를 바랬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지요.

그 보다 더 아쉬운 것은 우리 선수들이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을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것입니다. 봉중근과 정현욱이 여러차례의 잔루 위기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대량 실점을 주지 않으려 했던 것, 추신수가 이와쿠미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뽑은 것, 고영민의 다이빙 캐치, 9회말 2사 상황에서 이범호가 동점 안타를 날린 것 그 외 등등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한 우리 선수들의 똘똘 뭉친 집념은 일본을 충분히 압도했습니다. 야구는 엄연히 팀 플레이가 중심이 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우리 선수들의 하나된 마음이 9회~10회 즈음에 좋은 결실을 얻을것이라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비록 결승전은 아쉽게 패했지만, 우리 선수들의 뜨거운 승리욕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2-14 콜드패라는 시련이 있었지만 이러한 기억은 한국 야구 대표팀이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게한 '힘'이었던 겁니다. 1루-2루-3루, 그리고 홈플레이트를 밟기 위해 일본을 상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선수들의 끈기는 마치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리는 우리들의 인생사와 다름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이 단순한 '반짝 성적'이 아니라는 것을 지구촌 야구팬들에게 당당히 증명한 것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야구라는 매력을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WBC를 보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축구보다 야구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사랑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전 2-14 콜드패의 압박 속에서도 다시 피고 또 피어나는 향연은 마치 꽃 한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비단 WBC 뿐만은 아닙니다. '도하의 굴욕'을 당한 한국 야구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21타수 1안타로 눈물을 흘린 김현수가 이번 대회에서 3번 타자로서 제 몫을 다한 것, '노예'로 여겨졌던 정현욱이 '국노'로 급부상한 장면 등이 어찌나 '아름다운 꽃'과 같았는지요. 어쩌면 우리 선수들이 국민들에게 안겨준 최고의 선물은 WBC 우승이 아닌 '야구의 진정한 매력'이었을지 모릅니다.

이제 한국 축구도 야구가 WBC에서 보여준 저력을 보면서 좀 더 분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짧게는 다음달 1일 북한전에서 지난해 4연속 무승부의 징크스에서 벗어나 화끈하게 승리하기를, 길게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맹활약 및 앞으로의 모든 국제 대회 선전으로 국민들에게 '축구는 행복한 스포츠'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굳혀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야구도 지금의 인기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축구와 야구는 한국에서 대립적인 관계지만, 두 종목 모두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쏘아 올리는 '인간승리의 드라마'임을 오랫동안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두 종목의 진정한 '선의의 경쟁'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