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감독의 얼굴이 단단히 구겨졌습니다.
맨유는 지난 14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라이벌 리버풀전에서 구단 역사에 남을 최악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전반 22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페널티킥 선제골로 기분좋은 출발을 했지만 토레스-제라드-아우렐리우-도세나에게 연속 실점을 허용한 끝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후반 31분 네마냐 비디치 퇴장 이후에는 내리 2실점을 헌납하며 진한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맨유는 올 시즌 리그 홈 경기에서 12승 1무의 무패 기록을 자랑했지만 리버풀전 1-4 패배는 예상외의 스코어였습니다.
경기 후 잉글랜드 스포츠 전문채널 <스카이 스포츠>는 비디치에게 평점 1점을 부여하며 '악몽 같은 경기(A nightmate match)'라고 혹평했으며 마이클 캐릭은 3점, 그리고 나머지 선수들은 4~6점 받을 정도로 홈팬들에게 무기력한 모습을 안겨줬습니다. 프리미어리그 3연패 및 올 시즌 5관왕을 노리겠다는 위용도 찾아볼 수 없는 답답한 경기 내용으로 실망스런 경기를 펼친 것이죠.
하지만 맨유가 리버풀에 참패했던 가장 큰 문제는 선수가 아닌 퍼거슨 감독의 '악수' 때문입니다. 올 시즌 기대 이하의 활약으로 로테이션 경쟁에서 밀린 카를로스 테베즈와 안데르손을 과감히 선발 출장시킨 것이 문제였지요. 두 선수의 빠른 기동력을 앞세워 '무한 스위칭' 공격 전술을 구사하려고 했지만 안데르손-테베즈-호날두-루니-캐릭의 몸은 평소와 다르게 무거웠습니다. 맨유가 전반 30분까지 경기 주도권에서 우위를 점하다 리버풀에 밀려 4실점한 이유는 공격 및 미드필더 옵션들의 컨디션 난조였으며 이들을 선발 출장시킨 퍼거슨 감독의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 27분 1-2 상황에서 호날두가 아닌 '잘 싸우던' 박지성을 교체시킨 것은 퍼거슨 감독의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일부에서는 퍼거슨 감독이 호날두를 믿고 맡긴 이유가 골을 넣기 위한 의지라고 주장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에게 골에 대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더욱이 박지성은 최근 5경기 중에 4경기에서 공격 포인트(1골 3도움)를 올린데다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꾸준한 경기 운영을 펼쳤기 때문에 퍼거슨 감독이 풀타임 출장을 보장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결국 맨유는 박지성이 벤치로 들어간 이후 원톱 베르바토프의 높은 키를 활용한 롱패스로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 상대 미드필더들에게 경기 주도권에서 밀리는 악순환에 빠져들었습니다.
퍼거슨 감독의 또 다른 실수는 포백입니다. '에브라-비디치-퍼디난드-오셰이'로 짜인 포백은 일주일 동안 3경기를 소화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체력 저하에 허덕인 것이죠. 특히 맨유 수비를 지탱하던 비디치는 리버풀전에서 집중력 저하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1-4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고 에브라는 스티븐 제라드에게 페널티킥을 내주고 자멸했습니다. 퍼디난드와 오셰이 또한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지요. 경기 이틀전 인터 밀란이라는 이탈리아 세리에A 1위 팀과 경기했다는 것을 감안할때, 실력보다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선발 투입시키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피로에 지친 수비수들 그리고 '혹사 논란'에 빠진 호날두의 체력적인 부담을 피할 수 없는 만큼 조율에 실패한 책임은 퍼거슨 감독의 몫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맨유가 리버풀전 1-4 참패로 인해 그동안 쌓았던 오름세가 완전히 꺾여 부진이 계속되면 리그 3연패는 물론 5관왕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례로, 아스날은 지난해 2월 22일 버밍엄 시티전 2-2 무승부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여 리그 1위에서 3위로 내려앉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아스날의 전례를 들추어 볼때, 맨유가 1-4 패배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우승을 향한 전진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의 생각은 다릅니다. 리버풀전 종료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리버풀전 1-4 패배는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다. 하지만 맨유는 언제나 패배 후엔 항상 승리를 거듭했다. 경기에서 패하면 우리가 하는 것이 바로 그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안좋은 날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다시 나아가야 한다"며 특유의 자신만만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일부에서는 '퍼거슨 감독이 오만한 것이 아니냐?'는 반응을 나타낼지 모르지만, 감독이 위기 상황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선수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이기 때문에 이를 오만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비단 축구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순간적인 위기 상황에서 당황한다면 그 조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팀 혹은 조직이 위기에 빠졌다면 이를 헤쳐나갈 선장의 역할은 감독 그리고 리더의 몫이 됩니다.
공교롭게도 35년 감독 경력을 자랑하는 퍼거슨 감독은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강한 모습을 발휘했습니다. 맨유 감독 초기였던 1980년대 말에 부진한 성적으로 팬들의 경질 압박에 시달렸지만 1990년 FA컵 우승으로 팀을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가지 위기 상황들이 있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맞게 잘 이겨내면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맨유에서 23년 동안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온갖 산전수전끝에 위기를 잘 이겨냈던 '임기응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의 임기응변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맨유에게 가장 절실한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23년 동안 줄곧 맨유 감독을 맡아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누구보다 강합니다. 1993/94시즌에는 맨유 전력의 중심이던 브라이언 롭슨이 은퇴하자 22세 영건 로이 킨을 영입하여 전력을 정비한 끝에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고 1990년대 후반에는 에릭 칸토나가 은퇴하면서 '맨유의 자랑'인 황금세대(베컴-네빌 형제-긱스-스콜스-버트)가 퍼거슨 감독의 믿음속에 팀의 전성기를 주도했습니다. 2006/07시즌 헨리크 라르손을 10주 임대한 것은 기존 공격수들의 이적 및 잦은 부상 공백이라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비책 이었습니다.
그리고 올 시즌에도 퍼거슨 감독의 임기 응변은 빛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맨유가 프리미어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 칼링컵, FA컵 참가에 시즌 도중 UEFA 수퍼컵 및 클럽 월드컵 참가에 이르는 살인적인 일정에 발목 잡힐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2007년 클럽 월드컵 우승팀 AC밀란이 2007/08시즌 세리에A 5위로 추락한 것이 사례가 되어 맨유 앞날에 대한 먹구름이 잔뜩 끼었던것이 사실이죠. 여기에는 선수들의 줄 부상이라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지난 1월 25일 토트넘전까지만 하더라도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팀 중에서 가장 많은 부상 선수(12명)을 보유하는 위기에 봉착 했습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두꺼운 선수층을 최대한 활용하는 '스쿼드 로테이션 시스템'으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그 결과 주전 선수들은 체력 안배를 할 수 있었고 백업 선수들이 주축 선수 못지 않은 쟁쟁한 실력으로 주전의 뒤를 받치며 경쟁 구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 결과 칼링컵 결승전에서 백업 및 신예 선수들을 위주로 선발 스쿼드를 꾸린 끝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만년 백업'이었던 오셰이와 플래처는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웰백-깁슨-하파엘-에반스 같은 신예들이 올 시즌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 또한 퍼거슨 감독의 로테이션 승리이자 임기응변 속에서 거둔 최고의 소득이었습니다.
아무리 퍼거슨 감독이 리버풀전 1-4 참패를 자초했다고 해서 맨유의 시즌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맨유는 리그 3연패 및 5관왕을 달성하기까지 아직 2개월의 시간이 남았으며 23년간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임기응변을 바탕으로 위기를 빠르게 수습할 것으로 보입니다. 체력 저하에 시달린 수비수 문제로는 조니 에반스라는 확실한 자원이 있으며 그동안 실력이 과소평가 되었던 파비우 다 실바의 적극 중용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 미드필더진과 공격진에는 로테이션 시스템이 위기 탈출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맨유 에이스' 호날두 문제입니다. 맨유의 공격은 항상 호날두가 중심이었으며, 호날두가 없는 맨유의 공격은 나사없는 안경테와 비유될 정도로 팀의 공격을 이끌 확실한 적임자가 없었습니다. 루니는 잦은 부상, 테베즈는 지난 시즌보다 떨어진 골 결정력 문제, 베르바토프는 낮은 볼 터치와 안정감 부족이 불안 요소입니다. 이들을 시즌 끝까지 에이스 자리를 맡기기에는 맨유 공격의 무게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날두가 꾸준히 좋은 경기를 펼쳐야 하지만 잦은 경기 출장으로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면서 시즌 후반 맹활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호날두의 체력과 내구성은 다른 누구보다 월등하지만 지난 시즌의 경기력보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잦은 경기 출장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퍼거슨 감독이 '호날두 카드'를 고집할 경우 맨유의 5관왕 달성은 힘들어질 것임이 분명합니다. 호날두에 의존하는 공격은 이번 리버풀전에서 증명한 것 처럼 더 이상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팀들이 이를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호날두는 지난해 11월 15일 스토크 시티전 이후 리그 9경기 연속 무득점에 시달리며 상대팀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은 적이 있었고 이 기간 동안 맨유는 0-0 혹은 1-0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맨유가 앞으로 강팀들과 경기하게 될 기회가 많은 만큼, 호날두에 의존하는 공격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더욱이 시즌 중이기 때문에 호날두의 부침을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선수의 영입은 불가피하며 기존 선수를 통해 적절한 '차선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항상 강팀과의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펼친 박지성은 퍼거슨 감독이 원하는 '임기응변 카드'가 될 것입니다. 지난 리버풀전에서는 동료 선수들이 전반 30분 이후 기동력 저하로 주춤하자 간결한 움직임과 한 박자 빠른 패스로 팀 공격을 주도하는 플레이메이킹을 펼쳤습니다. 수비진과 2선에서 호날두와 루니가 아닌 박지성에게 많은 공격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박지성이 리버풀 수비진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5경기 중에 4경기에서 공격 포인트(1골 3도움)를 기록하며 '골과 도움이 부족하다'는 외부의 편견을 이겨냈습니다. 최근에는 수비보다 공격에 치중하는 역할이 많아지면서 앞으로도 공격 포인트를 꾸준히 기록할 공산이 큽니다.
어쩌면 박지성의 존재는 퍼거슨 감독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18인 엔트리 제외라는 악몽을 떠올린다면 '박지성이 맨유 전력에 필요할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스쿼드 플레이어에서 주전급 선수로, '약팀 전용-긱스 백업'에서 '강팀용 선수'로 끌어 올린 것은 박지성이 퍼거슨 감독에게 확실하게 인정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버풀전 통산 5분 출장했던 그가 이번 리버풀전에서 선발 출장한 것 또한 비슷한 맥락입니다. 만약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 교체가 패인이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박지성의 진가는 리그 3연패 및 5관왕 달성에 빨간불이 켜진 맨유에게 더 없이 귀중할 것입니다.
박지성은 맨유 위기 탈출의 돌파구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극심하게 부진했던 경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강팀과 약팀을 가리지 않고 항상 꾸준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경기력을 발휘하는 '꾸준함'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공격 능력이 뛰어난 루이스 나니가 철저한 벤치 요원으로 전락한 것은 퍼거슨 감독이 선수가 지닌 화려한 공격력에 끌려다니는 지도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호날두가 부침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박지성에게 주어지는 공격 기회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며, 박지성 또한 그 기회를 잘 살리며 퍼거슨 감독 믿음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퍼거슨 감독이 노리고 있을 임기응변에는 '박지성 카드'가 적절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