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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맨유는 패했지만 퍼거슨은 잘했다

 

올 시즌 5관왕 및 프리미어리그 3연패를 노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가 그것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굴욕을 당하리라 예견한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올 시즌 리그 홈 경기에서 12승1무의 높은 성적을 자랑했고 지난 12일 인터 밀란과의 홈 경기에서도 2-0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번 리버풀전에서도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맨유가 2004년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 부임 이후 리버풀을 상대로 7승1무2패의 높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 경기에서 패하리라 예상한 이들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축구는 '각본없는 드라마'라는 말이 있듯, 맨유가 리버풀에게 1-4 대패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맨유전 이전까지 리그 3위였던 리버풀이 우승 레이스에서 멀어지는 절박감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응집력을 앞세워 승리한 것은 극찬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반면 안방에서 대패의 충격을 받은 맨유 입장에서는 이번 경기 패배를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 했습니다.

많은 축구팬들은 맨유의 결정적 대패 원인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박지성 교체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은 루니-호날두-테베즈가 전반 30분 이후 기동력 저하로 주춤하자 적시적소에 맞는 빠른 타이밍의 패스로 팀 공격을 주도했지만 후반 27분에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후반 중반까지 공격 주도권에서 우세를 점하던 맨유의 공격이 리버풀의 역습에 밀리는 역효과로 이어졌으며 '비디치 퇴장과 맞물려' 후반 막판 2실점을 헌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리버풀전에서 좋은 경기력을 펼친 박지성을 뺀 퍼거슨 감독의 용병술 실패였던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의 악수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3경기를 소화했던 '에브라-비디치-퍼디난드-오셰이'로 짜인 포백을 리버풀전에서 그대로 들고 나온 것입니다. 지난 8일 풀럼전과 12일 인터 밀란전에서는 무실점 수비를 펼쳤지만 지친 몸 상태에서 리버풀전을 치렀기 때문에 퍼거슨 감독의 로테이션 작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네 명의 수비수들을 리버풀전에 그대로 투입시키더니 '제토라인' 제라드와 토레스에 끌려다니는 불안한 모습을 일관했던 것입니다. 호날두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공격 전술과 지난 시즌에 비해 활약상이 떨어지는 안데르손 투입에 이르기까지, 여기까지는 퍼거슨 감독의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리버풀전은 퍼거슨 감독의 전술적인 패착에서 비롯된 대패였지만 한편으로는 퍼거슨 감독이 이번 경기에서 자신이 명장임을 또 한번 증명했기 때문이죠. 지난 2007년 9월 잉글랜드 대중지 <타임즈>로 부터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받았단 그였기에 리버풀전 한 경기 패배 만으로 '졸장'처럼 다루는 것은 분명 무리가 큽니다.

명장은 크게 3개의 조건으로 구별됩니다. 때로는 따뜻한 마음으로 선수들을 격려하고(덕장) 때로는 야단치면서 선수들을 휘어잡고(용장) 때로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짜내며 온갖 전술들을 구사하는(지장) 장점들을 모두 갖춰야 명장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은 이번 리버풀전에서 자신의 판단 미스로 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덕장으로서의 면모 만큼은 칭찬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퍼거슨 감독은 경기 종료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후반 31분 퇴장 및 1-4 대패의 빌미를 제공했던 비디치를 꾸짖기는 커녕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다음 경기에서 좋은 모습 보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네마냐) 비디치는 올 시즌 우리를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꾸준한 활약을 펼친 선수다. 선수들은 쉬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인데 비디치는 한 명의 사람이고, (리버풀전에서) 실수를 범했다. 모든 선수들은 실수를 한다. 단지 우리의 희생이 컸을 뿐이다(Nemanja has been unbelievably consistent for us this season. Players do have off days, and he’s made a mistake. He’s a human being, all players make mistakes. It’s just a costly one for us.)"라며 1-4 패배로 절망하고 있을 비디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위로의 말을 꺼낸 것입니다.

다른 감독이라면 비디치에게 엄청난 질타를 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퍼거슨 감독은 오히려 비디치를 옹호했습니다. 맨유가 올 시즌 5관왕을 바라보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선수가 다름아닌 비디치이기 때문이죠. 비디치는 올 시즌 42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여 '골 넣는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지만 다른 누구보다 많은 경기에 출장하면서 최근 수비에서의 집중력과 체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비디치를 많은 경기에 선발 출장시켰던 퍼거슨 감독으로서는 제자에게 미안할 수 밖에 없는 법이죠. 수비수는 10경기 중에 1경기만 못해도 사람들의 욕을 먹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퍼거슨 감독이 이를 모를리 없는데다 이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퍼거슨 감독이 비디치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위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비디치를 향한 퍼거슨 감독의 발언을 립서비스로 여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경기 종료 후 퍼거슨 감독이 선수들에게 화를 냈냐는 기자의 질문에 "큰 소리로 이야기하시지는 않았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다"고 말한 것 처럼 퍼거슨 감독은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디치를 향한 퍼거슨 감독의 발언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진심' 이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비디치를 옹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경기 내용이 좋지 않을 경우 라커룸에서 스코틀랜드 특유의 거센 억양(퍼거슨 감독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엄청난 화를 내는 것과 동시에 주변 집기를 발로 걷어차거나 물건을 내던지며 선수들을 독려하는 등 승부에 대한 집착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지도자였습니다. 평소 다혈질 성격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죠. 2002/03시즌 도중 맨유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데이비드 베컴의 얼굴에 축구화를 던진 사례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유명한 이야깃거리로 회자되고 있습니다.(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불만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승부에 대한 집착을 하기 이전에 선수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덕장 이었습니다.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간단하고 힘이 실린 발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촌철살인'이 바로 그것이죠. 퍼거슨 감독이 비디치를 위로하는 것 역시 촌철살인의 대표적인 예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박지성도 퍼거슨 감독의 배려 속에 맨유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박지성은 2006/07시즌 초반 부상으로 장기간 엔트리에서 제외되자 현지 언론으로부터 팀 전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이에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은 맨유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수 중에 한 명이다. 그는 맨유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라고 박지성을 극찬한 것입니다. 이에 박지성은 2006년 12월 부상 복귀 후 10경기에서 5골 2도움을 기록하며 자신을 향한 비판을 모두 잠재운 것과 동시에 퍼거슨 감독의 믿음에 부응할 수 있었습니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는 올 시즌 초반 기대 이하의 활약으로 먹튀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지만 퍼거슨 감독의 보호속에 이름값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지난해 11월 1일 맨유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베르바토프가 게으르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움직임에 있어 매우 효율적이며 골 넣을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움직임이 환상적이다"며 외부 여론에서 게으른 선수로 낙인찍힌 베르바토프를 옹호한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난 4일 잉글랜드 일간지 <데일리 스타 선데이>를 통해 "나는 베르바토프가 느리거나 게으르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웨인 루니보다 더 많이 움직인다"고 주장하며 제자에게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이에 베르바토프는 퍼거슨 감독의 기대에 힘입어 시즌 중반부터 골을 몰아치면서 맨유 공격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퍼거슨 감독이 비디치에게 의미심장한 긍정적 말을 내뱉은 것은 그가 박지성과 베르바토프의 전례처럼 앞으로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비디치는 비록 리버풀전에서 1-4 대패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앞으로 중요한 경기들이 여럿 남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좋은 수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겠지요. 무엇보다 퍼거슨 감독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얻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그라운드에서 최상의 활약을 펼칠 것으로 기대됩니다. 비록 퍼거슨 감독은 리버풀전에서 자신의 판단 미스로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선수를 애뜻하게 아끼는 덕장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