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에서 23년 장기집권하여 24개의 크고 작은 우승 메달을 받았던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68). 상대팀의 허를 찌르는 용병술과 두꺼운 선수층을 최대한 활용하는 스쿼드 로테이션 시스템, 목표에 대한 동기부여, 선수를 아들처럼 아끼는 친근함, 강력한 카리스마 등등 명장의 요소를 모두 갖춘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에게는 자신을 괴롭히던 천적이 한 명 있었습니다.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조세 무리뉴 인터 밀란 감독이 있기 때문이죠. FC 포르투와 첼시 사령탑을 맡았던 무리뉴 감독에게 12전 1승4무7패(맨유vs인터밀란 1~2차전 전적 제외)로 부진했으니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무리뉴 감독은 포르투 사령탑을 맡던 2003/04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맨유를 누르고 대회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던 달콤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첼시 사령탑으로서 맨유를 따돌리고 프리미어리그 2연패를 이끌면서 '맨유 킬러'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에 퍼거슨 감독은 지난 11일 인터밀란전을 앞둔 공식 기자회견에서 "무리뉴 감독을 상대로 한 번 밖에 이기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는 내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다른 감독들도 약점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다"며 무리뉴 감독이 자신의 천적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던 퍼거슨 감독의 맨유가 12일 오전 4시 45분(이하 한국시간)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인터 밀란과의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2-0으로 승리했습니다. 경기 결과와 내용 모두 맨유가 우세를 점했으며 지략 또한 퍼거슨 감독의 승리였습니다. 반면 무리뉴 감독은 후반 초반과 중반에 걸쳐 조커 3명을 투입하여 승부수를 띄웠지만 맨유를 공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물론 2000년대 중반의 첼시와 지금의 인터밀란 전력은 엄연히 다르지만, 무리뉴 감독이 포르투 시절 맨유를 꺾었던 전적이 있다는 점에서 퍼거슨 감독이 천적과의 정면대결에서 이긴 것입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퍼거슨 감독이 무리뉴 감독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을 당시의 맨유와 지금의 맨유는 전혀 다른 팀이라는 점입니다. 전자의 맨유가 리빌딩이 진행되는 형태였다면 후자의 맨유는 전력이 완성궤도에 오른 상태이기 때문이죠. 가령,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경우에도 전자의 맨유에서는 미완의 대기였을 뿐이지만 2006/07시즌부터 기량이 급성장하면서 맨유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2006/07시즌에는 맨유가 첼시를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때였습니다.
물론 무리뉴 감독이 지휘봉을 잡던 첼시는 풍부한 자금력으로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던 이점도 빼놓을 수 없겠죠. 어쩌면 퍼거슨 감독이 팀을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무리뉴 감독을 상대로 1승밖에 그쳤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결국, 퍼거슨 감독이 인터 밀란전에서 '맨유 킬러' 무리뉴 감독을 꺾고 승리했다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리빌딩의 승리'이자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드윈 판 데 사르는 1999년 맨유 트레블의 주역인 피터 슈마이켈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했으며 마이클 캐릭과 호날두는 로이 킨과 데이비드 베컴의 존재감을 지우며 맨유 전력의 중심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날 인터 밀란전에서는 라이언 긱스와 폴 스콜스가 선발 출장했지만 그들의 대체자로 박지성과 대런 플래처(또는 안데르손)가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니-베르바토프(테베즈)' 투톱은 킹 뤼트 시스템의 주인공인 뤼트 판 니스텔로이보다 더 효율적인 공격을 구사했고 맨유의 포백은 리그 13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을 거듭할 정도로 이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이러한 퍼거슨 감독의 세대교체는 올 시즌에 무르익었습니다. UEFA 슈퍼컵과 클럽 월드컵까지 치르는 바쁜 일정과 선수들의 줄 부상 속에서도 순항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전보다 더 두꺼워진 선수층의 저력이 빛났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퍼거슨 감독은 선수층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신예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여 점진적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여유를 부렸습니다. 특히 칼링컵을 통해 하파엘 다 실바, 조니 에반스, 대런 깁슨, 대니 웰백 같은 앞날이 출중한 신예들을 발굴했고 지난 1일 칼링컵 결승전에서는 백업과 영건 선수들을 주축으로 스쿼드를 꾸려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쾌거를 누렸습니다.
이는 맨유가 빠듯한 일정과 선수들의 줄부상 속에서도 두꺼운 선수층의 효과를 강하게 다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퍼거슨 감독이 신봉하는 '스쿼드 로테이션 시스템'을 통해 20여명의 주요 선수들을 경쟁시켜 많은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는 효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효과 속에 한때 노쇠화로 은퇴 기로에 놓였던 긱스는 올 시즌 중앙 미드필더 전환으로 전성기 시절 못지 않은 맹활약을 펼치고 있으며 테베즈와 안데르손 같은 백업 멤버들에게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오른쪽 풀백에는 존 오셰이가 부상으로 신음하는 네빌-하파엘의 공백을 충분히 메워주면서 맨유의 전력이 탄탄해진 것입니다.
비단 세대교체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맨유가 올 시즌 순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포백과 허리라인의 견고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에브라-비디치-퍼디난드(에반스)-오셰이(하파엘)'로 짜인 포백은 이탈리아 세리에A 1위팀인 인터밀란에 단 1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유럽 최강의 방패를 자랑하며 리그에서는 13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을 달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맹활약에는 미드필더진이 부지런한 활동량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면서 활동 반경에 별 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상대팀 공격수의 발을 묶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겁니다. 뛰어난 수비 능력을 지닌 박지성이 올 시즌에 이르러 맨유의 주전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특히 '벽디치' 네마냐 비디치의 활약이 가히 눈부셨습니다. 그동안 리오 퍼디난드에 가려 2인자의 인상이 짙었지만 올 시즌 41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골 넣는 수비수'의 명성을 떨친 것과 동시에 맨유의 고공 행진을 이끈 수비수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맨유는 불과 지난 시즌까지 호날두-루니 같은 공격 옵션들의 의존도가 팀 전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차지했지만 올 시즌에는 비디치를 비롯한 여러명의 수비수들이 '무결점 수비'를 펼치면서 공격수들이 이전처럼 골을 많이 못넣더라도 꾸준히 승리할 수 있는 '탄탄한' 팀이 되었던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은 얼마전 "지금의 스쿼드는 1999년 트레블 달성때의 스쿼드보다 더 강하다"고 치켜 세웠습니다. 이는 리빌딩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시기이자 무리뉴 감독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때보다 강력한 선수층을 지닌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이번 인터밀란과의 경기에서 2-0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천하의 맨유 킬러였던 무리뉴 감독이 상대하지 못할 만큼, 퍼거슨 감독이 더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천적을 누른 퍼거슨 감독의 올 시즌 5관왕 행진은 점점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