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탱크' 박지성(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이 칼링컵 결승전에 결장했습니다.
박지성의 맨유는 2일 오전 0시(이하 한국시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토트넘과의 결승전에서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4-1로 이겼습니다. 박지성은 안데르손, 네마냐 비디치, 라이언 긱스 등과 함께 교체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끝내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5월 첼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결장한 이후 10개월 만에 결승전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선수 본인으로서도 '마음 속 기분'이 좋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퍼거슨 감독은 경기 종료 후 현지에 파견된 국내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박지성이 다시 결승전에 나서지 못해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반전에)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존 오셰이가 부상 당하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5일 뉴캐슬전에 출장시킬 것이다"고 박지성의 결장 이유를 설명하며 오는 5일 뉴캐슬과의 프리미어리그 28라운드 경기 선발 출장을 약속 했습니다. 지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박지성을 18인 엔트리에 포함하지 않아 국내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던 그였기에 박지성의 결장을 의식했던 것이죠.
물론 필자도 한국인이기 때문에 박지성의 결장이 안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3일 전 필자의 블로그를 통해 박지성의 선발 출장이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결국 적중했지만 그래도 내심 아쉽습니다.) 그래도 경기에 나오길 바랬기 때문에 씁쓸할 수 밖에 없었죠. 적어도 교체 출장 정도는 예상을 했었기에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인 웸블리 그라운드를 밟는다면(한국인 선수로는 김두현이 유일) 선수 본인으로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교체 선수로서 팀의 우승을 공헌하는 활약을 펼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오셰이가 후반 30분 부상으로 교체되면서 박지성의 교체 출장은 물건너 갔습니다.
맨유의 경기력을 놓고 볼때도 박지성의 결장은 아쉬웠습니다. 이날 맨유 선수들은 평소와 달리 몸이 무거웠으며 오히려 토트넘과의 허리 싸움에서 밀리는 경기력을 펼쳤습니다. 후반 10분 안데르손의 교체 투입으로 만회할 수 있었지만 파트리스 에브라가 아론 레넌의 빠른 발을 공략하지 못했고 나니-호날두-테베즈는 후반 중반부터 상대의 두꺼운 수비에 발이 묶이면서 팀의 무득점을 가중 시켰습니다. 박지성이 후반전에 나니를 대신하여 교체 투입되었다면 왼쪽에서 레넌을 묶는데 주력하여 경기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에브라-나니가 포진한 왼쪽 선수들의 활약은 팀 전력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지성이 칼링컵 결승전에 못나왔다고 해서 그의 가치가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경기 전 "칼링컵 결승전보다 뉴캐슬과의 리그 경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칼링컵의 권위와 명성이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축 선수들보다는 신예들의 선발 출장에 무게감을 두었기 때문에 '박지성<나니', '벤치성'이라는 일희일비식 반응은 자제해야 겠지요. 비록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결장했지만 평소 자신을 애지중지하게 신뢰했던 퍼거슨 감독의 마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올 시즌에 이르러 스쿼드 플레이어에서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하면서 팀 내 입지가 부쩍 향상된 것이죠.
박지성의 결장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입니다. 퍼거슨 감독이 칼링컵 결승전 베스트 일레븐을 주축 선수가 아닌 칼링컵 공헌도를 기준으로 구성했기 때문이죠. 맨유 전력의 핵심인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 에드윈 판 데 사르는 올 시즌 칼링컵 출장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날 18인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고 올 시즌 1회 출장(지난해 11월 12일 퀸스파크 레인저스전)에 그친 박지성도 결승전 선발 출장을 하기에는 공헌도가 모자랐던게 사실입니다.
칼링컵 결승 진출의 주역이었던 깁슨-웰백-에반스 같은 신예들은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일찌감치 선발 출장을 약속 받았고 칼링컵 5경기에서 각각 6골 2도움과 3골의 맹활약을 펼친 카를로스 테베즈와 나니의 선발 출장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명의 선수들은 맨유의 베스트 일레븐에 속한 선수들이 아닙니다. 이는 맨유가 칼링컵 결승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결장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박지성의 칼링컵 결승전 결장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박지성은 지난달 25일 인터 밀란전에서 많은 체력을 소비하며 교체 되었기 때문에 결승전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날 박지성은 후반 30분 이후부터 체력 저하로 지친 기색을 내비쳤더니 팀의 실점 위기를 헌납하는 뼈아픈 실수를 허용했습니다. 그만큼 허리 진영에서 궃은 역할을 다하는 박지성의 역할이 팀 내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좋아하는 것이며 더욱 아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결장은 골 결정력 향상을 위한 자극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이번 칼링컵 결승전 결장은 체력을 고려한 선수 보호 차원이었습니다. 만약 퍼거슨 감독이 칼링컵 우승에 너무나 목이 말랐다면 감기로 결장한 웨인 루니를 비롯 18인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던 마이클 캐릭이나 대런 플래처까지 투입 시켰을지 모를 일이겠죠.
결과적으로, 박지성의 결장은 오히려 잘 되었을지 모릅니다. 맨유가 향후 3개월 동안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우승을 위한 중요한 일전을 벌이기 때문에 '강팀에 강한' 박지성의 활용 가치는 더 높습니다. 그래서 퍼거슨 감독은 2개월 전 박지성을 벤치로 내리며 체력을 보충시켰던 것이고 이러한 기다림에 단련된 박지성은 지난달부터 꾸준히 경기에 출장하면서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뉴캐슬전보다 중요하지 않은 칼링컵 결승전이 박지성에게 어울리는 무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프리미어리그 경기와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경기가 박지성의 옷에 잘 맞았던 것이죠. 다른 팀이면 몰라도 스쿼드 로테이션 시스템을 쓰는 맨유라면 이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만약 박지성이 칼링컵 결승전에 뛰었다면 '본인이 바라지 않는' 부상 위험성까지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박지성이 호날두처럼 거의 매 경기마다 선발 출장할 수 없는 이유는 활동량의 차이도 있겠습니다만(호날두는 현지 언론에서 수비 가담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부지런한 윙어라고 단정짓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부상이 많았기 때문에 매 경기에 모습을 내밀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2006년 9월부터 2년 동안 3번의 큰 부상으로 총 1년 2개월 동안 부상과 싸웠기 때문에 체력 조절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2007년 3월 31일 블랙번전 이후 무릎 연골이 파열되었을 때 퍼거슨 감독이 재활이 아닌 수술을 요구했던 것은 그만큼 박지성이 오랫동안 뛸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지성이 무리하게 경기에 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축구는 1명이 아닌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이지 박지성을 위한 개인 종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날두가 골을 넣으려면 10명의 선수들이 필요한 것이고 그 도우미 중에 한 명이 박지성입니다. 리오 퍼디난드 같은 경우에도 비디치 같은 존재가 있었기에 막강한 수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고요. 진정한 축구의 매력은 단 한명의 활약이 아닌 팀의 경기를 즐겨보는 것이 아닐까요. 엄연히 팀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수의 활약이 빛날 수 밖에 없는 법입니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팀인 맨유에서 당당히 주전으로 활약중인 박지성이 대단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비록 칼링컵 결승전 결장은 아쉬웠지만 박지성에게 어울리는 무대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박지성의 목표는 맨유의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 우승을 공헌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결장하는 시련을 겪었던 만큼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무대를 밟을지 주목됩니다. 칼링컵 결장으로 '산소탱크'를 충전한 박지성의 진가가 벌써부터 두근 기다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