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한국 축구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 고종수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결국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선수 시절 내내 발목 잡았던 무릎 부상이 결국 은퇴로 이어지고 만 것이죠. 지난해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무릎 부상후유증에 재활까지 신통치 않아 결국 그라운드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대전 구단과 무릎 수술을 놓고 계약 포기까지 이어졌던 갈등을 나타낼 만큼 '자신의 천재성과 대조적으로' 말년 선수 생활이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고종수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대표팀과 K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입니다. 정확한 포지션은 이탈리아어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였죠. 이를 풀이하면 3/4지점에서 활약하는 선수로서 공격진 바로 아래서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경기를 하는 포지션을 의미하는데 그 자리가 처진 공격수 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입니다. 생각하는 축구 방식과 화려한 기술을 앞세워 경기를 치르는 고종수의 축구 스타일과 맥이 일치합니다. 다른 누구보다 독보적인 볼 재간을 자랑했던 선수였기에 국내 여론에서는 그를 '축구 천재'로 치켜 세웠습니다.
1996년 당시 중앙에서의 투박한 몸싸움과 측면 옵션의 빠른 발에 의존하는 공격이 주류였던 K리그에 고졸출신 신인 고종수의 창의적인 활약은 신선했습니다. 당시 18세였던 고종수는 시즌 후반기 수원 허리의 핵으로 자리 잡으며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포츠뉴스에서는 고종수 소식이 나올때마다 그의 덤블링 골 세리머니 장면을 집중적으로 방영하기도 했죠. 독특한 세리머니 또한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생팀이었던 수원은 김호 감독과 조광래 수석코치가 합심했던 4-4-2 포메이션의 아기자기한 공격 축구로 기틀을 다지면서 원년부터 K리그 인기 구단으로 거듭났습니다. 미드필더 형태 또한 다채로웠습니다. 바데아를 플레이메이커로 돌리고 이진행-이광종-조현두-김이주가 좌우 측면을 골고루 휘저었고 윤성효가 살림꾼 역할을 맡는, 그야말로 미드필더의 '분업화'가 철저하게 이뤄졌습니다. 소위 '무전술'이 팽배했던 당시 K리그의 열악한 환경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수원 홈 구장 관중 기록이 1위였지요.(한 가지 첨언하자면, 수원과 더불어 기술 축구로 주목 받은 팀이 바로 부천이었죠. 당시 수원vs부천은 라이벌 관계로 주목 받았는데, 오히려 김호vs니폼니시(훗날 조윤환) 대결 구도가 더 주목 받았습니다. 이는 K리그의 경기력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종수는 바데아에 가려져 있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이 되자 출장 시간이 늘어나면서 성인 축구 템포에 적응하더니 현란한 볼 재간과 출중한 개인기로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축구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예로 주목 받았습니다. 1997년 1월에는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팀에 합류하면서 한국 축구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켰죠.
그 이후, 고종수는 무서운 존재로 변신합니다.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은 '고종수 존'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유연한 왼발목 스냅으로 볼이 날아가다 어느 순간에 밑으로 떨어지는 '드롭 골'까지 넣었습니다. 1996년 신인 시절의 앳된 플레이는 프로와 대표팀 경험, 패기까지 더해지면서 패스-개인기-돌파력-경기를 조율하는 능력 등등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며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거듭났습니다. 1998년 정규리그 우승, 1999년 전관왕 달성, 2000년 더블 우승(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 2001년 아디다스컵 3연패 등, '신흥 명문'으로 불리던 수원의 전성기를 이끌었죠. 특히 1998년에는 정규리그 최우수 선수(MVP)에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 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고종수를 지지하는 수원팬들의 열기였습니다. '고종수=수원 블루윙즈'라는 공식이 성립될 만큼 고종수를 좋아해서 수원을 좋아했던 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박건하, 이운재 같은 스타 플레이어도 여럿 있었지만 고종수 만큼은 절대적이었습니다. '!! !!!! 고~종수' 콜은 경기장에서 자주 불려지던 응원 구호였고요.(!는 박수를 말함) 2002년 7월 빅버드(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 슈퍼컵 1차전 알 히랄 전에서는 수원 서포터즈 그랑블루 응원석에 걸어진 걸게 중에 거의 대부분이 고종수 관련 응원문구였을 정도였죠. 당시 고종수가 십자인대 부상에서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고종수의 존재가 수원팬들에게 애증 그 이상이었던 겁니다.
당시 고종수는 '수원의 영웅'이었습니다. 수원하면 고종수였고, 고종수하면 수원이었습니다. 수원의 공격 중심은 고종수였고, 아직까지 수원팬들에게 회자되는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는 수원 역사상 최강의 공격 삼각편대였습니다. 창의적인 실력 이외에도, 덤블링 세리머니, 1999년 올스타전에서 컨츄리 꼬꼬의 노래를 부른것에 모자라 연예계까지 진출했던 끼, 주로 대표팀에서 선을 보였던 노란색 머리 등등 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다재다능함이 있었습니다. 수원이 1998년 K리그 르네상스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K리그 최고의 인기 구단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인물이 고종수였던 만큼, 프랜차이즈 스타로 주목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종수는 수원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2001년 7월 십자인대 부상을 시작으로 끝없는 내리막에 빠집니다. 그동안 대표팀과 소속팀 경기에 많은 출장을 거듭했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었던 겁니다. 19세였던 1997년 수원과 청소년 대표팀, 국가대표팀을 오가는 혹사를 시작으로 적지 않은 체력 소모에 시달리더니 2001년에 이르러 주저 앉고 만 것입니다.
당시 고종수는 '히딩크호의 황태자'로 주목 받았지만 고강도 체력 훈련을 이기지 못한 상황에서 경기 출장을 거듭하다 결국 십자인대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김호 감독이 히딩크 감독의 체력 훈련에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로 고종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2001년에는 수원이 K리그와 아시안클럽선수권 대회(AFC 챔피언스리그 전신)에 참가하는 등 고종수의 출장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로 골절 증상으로 고생했던 그에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시련이 닥쳤던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1997년부터 각급 대표팀에 차출되었던 한국 축구의 후진적인 시스템에 발목이 잡힌 것이죠.(고종수 외에도 이동국, 최성국, 박주영 등도 같은 케이스죠.)
결국 고종수는 잦은 부상과 그로 인해 얻은 슬럼프로 팬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게으른 천재'라 했을 만큼 인내심과 의지력이 부족했던 고종수의 정신력을 비판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안좋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2003년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방출됐고 2004년 수원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11월 임의탈퇴 처리 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전남에서 재기를 노리다 방출되었고 2006년에는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1년간 실업자 상태로 지냈죠. 특히 2004 시즌 도중에는 서울 영동대교에서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우울증에 걸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2007년 9월 스포츠 2.0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말했죠.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종수를 대하는 언론 또한 문제였습니다. 1997년 청소년 대표팀 시절에는 고종수가 박이천 감독을 대신하여 사령탑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기사가 나왔고, 강남에 식당 차렸거나 술집을 한다는 거짓말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루머가 여럿 나올 만큼, 재기를 노리던 고종수를 괴롭혔죠.
그동안 당했던 시련 만큼, 2007년 대전에서의 재기 성공은 극적이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고종수가 뛸 수 있을까?'라며 의구심을 가졌지만, 고종수는 그해 여름 대전 사령탑을 맡은 김호 감독의 조련 속에 대전의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4-3-3 전형의 미드필더 꼭지점에서 이성운, 박도현(김용태, 나광현)과 유기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브라질리아-슈바-데닐손' 브라질 트리오의 공격력을 적극 도왔죠. 조광래 감독이 "고종수가 다시 축구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고 찬사를 보낼 만큼, 고종수는 다시 일어선 끝에 대전의 창단 첫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대전팬들이 경기 종료 후 그라운드에 내려가 고종수와 얼싸안을 만큼, 6강 진출의 주역은 고종수였던 겁니다. 그런 활약속에 지난해 대전의 주장을 맡을 수 있었죠.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한 대전구단과의 갈등은 재계약 포기로 이어졌고, 결국 재활마저 신통치 않아 은퇴를 했습니다. 비록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떠나며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지만,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은퇴'가 악플 및 조롱 대상이 되면서 또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분명 고종수는 한국 축구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선수로 남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한때 한국 축구를 화려하게 장식하다 내리막길을 걸었던 '비운의 축구천재' 말이죠.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종수가 현역 K리그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고종수는 2007년 9월 스포츠 전문 잡지 <스포츠 2.0>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랜기간 나를 아껴준 그랑블루가 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그랑블루랑 따로 은퇴식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며 수원팬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전성기 시절 자신을 영웅처럼 지지했던 수원팬들과 다시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죠.
결국 고종수는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은퇴식 없이 쓸쓸히 떠났지만 수원과 많은 추억을 함께 했던 만큼 마음만은 '영원한 수원맨'이었던 겁니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수원팬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만큼, 그는 앞으로도 수원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수원의 영웅' 고종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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