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잉글랜드 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났습니다. 최근 대표팀 주장직에서 박탈된 존 테리와 관련해서 잉글랜드 축구협회(FA)와 의견 충돌을 빚은 끝에 스스로 감독직을 그만뒀습니다. 테리는 4개월전 퀸스 파크 레인저스전에서 안톤 퍼디난드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내뱉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습니다. 그러자 FA로부터 주장에서 물러나게 됐죠. 하지만 카펠로 감독이 반발하면서 FA와 대립각을 세웠고 결국 사임했습니다.
[사진=파비오 카펠로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C) 잉글랜드 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사진(thefa.com)]
카펠로 감독 사임이 석연치 않은 이유는 테리의 인종차별 발언이 사실인지 불분명합니다. 테리는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지만 검찰의 기소를 당했고 FA에 의해 대표팀 주장을 반납했습니다. 문제는 FA가 카펠로 감독 동의 없이 테리에게 불이익을 받도록 했죠. 카펠로 감독 입장에서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테리가 인종차별을 시인할지라도 FA가 카펠로 감독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주장 박탈을 결정한 것은 절차상 문제가 있습니다. 또 테리의 재판 날짜는 7월 9일이며 유로 2012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재판에서 무죄를 받을 경우 FA가 비판 받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카펠로 감독을 옹호하기 힘든 이유는 테리가 인종차별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리버풀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가 얼마전 인종차별 발언으로 8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당했던 사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인종차별 발언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강조하는 페어 플레이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만약 카펠로 감독 뜻에 따라 테리가 유로 2012까지 주장직을 유지하면 잉글랜드 축구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울 것입니다. 인종차별 구설수로 얽힌 선수가 중요한 대회에서 주장으로 나서는 것은 잉글랜드 대표팀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FA의 테리 주장직 박탈은 과정에서 아쉬웠을지 몰라도 팀의 이미지 제고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카펠로 감독은 유로 2012 개막이 불과 4개월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을 떠났습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겠지만 그 지도자 성향에 맞는 전술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어떤 감독이 삼사자 군단을 이끌어도 4년 동안 이어왔던 카펠로 체제의 틀을 바꾸기가 벅찹니다. 최악의 경우 유로 2012 본선에서 팀의 확고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답답한 경기력을 연출할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의 감독 사임을 봐도 우승 전망이 어둡습니다.
그런 카펠로 감독은 '우승 청부사'로 불릴 만큼 지금까지 스페인과 이탈리아 클럽을 맡아 여러차례 우승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2008년 초에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맡아 삼사자 군단의 숙원이었던 우승의 갈증을 풀어줄 적임자로 손꼽혔죠. 당시 잉글랜드는 유로 2008 예선 탈락으로 축구 종주국 체면을 잔뜩 구겼습니다. 하지만 카펠로호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대회 기간 동안 무기력한 경기 내용을 거듭했고 16강 '라이벌' 독일전에서는 1-4로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유로 2012 예선 G조 1위(5승3무)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지난해 11월 A매치 스페인전에서 1-0으로 승리했지만, 테리 주장직 논란을 계기로 선장을 잃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의 '카펠로 효과'는 없었습니다. 유로 2008과 비교하면 유로 2012 본선 진출은 나름의 성과로 치켜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대표팀이 카펠로 감독을 영입한 목적은 우승 때문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실패했지만 유로 2012는 현실적인 우승을 노려볼 수 있었습니다. 카펠로 체제가 4년 동안 이어지면서 남아공 월드컵 시절보다 경기력이 숙성되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죠. 카펠로 감독 입장에서도 그동안 클럽팀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실현했던 기세를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재현하기를 원했겠죠. 하지만 카펠로호는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항해를 접었습니다. 테리의 인종차별 혐의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