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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삿포로 참사, 한국 축구 최악의 패배

 

저는 경기 전에 한일전 예상 스코어를 1:1 무승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국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저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은 일부 주축 선수들이 결장했거나 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전력 누수가 불가피했지만, 일본은 아시안컵 우승의 클래스가 남아있는데다 유럽파들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팀 전력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팀(한국) 이미 완성된 팀(일본)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국은 이번 일본전이 아시안컵 복수전이었기 때문에 상대팀 선수들보다 분발할 것으로 생각했고 무승부를 예상했었죠.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1974년 9월 28일 A매치 일본 원정 1-4 패배 이후 37년 만에 일본에게 3골 차 패배를 당했습니다. 카가와 신지에게 2골, 혼다 케이스케에게 1골을 내주면서 0-3으로 패했습니다. 그것도 후반 초반에 0-3으로 밀렸죠. 경기 내용에서도 일본이 강조하는 점유율, 패스, 기술 축구에 농락 당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일본 축구의 특징을 오랫동안 익히 알았고 J리그 전현직 선수들도 있었지만, 이번 경기는 상대팀의 특징을 알았음에도 졌습니다. 경기 시작부터 일본 선수들의 세밀한 패스워크에 끌려다니는 무기력한 모습을 거듭했죠.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겁니다.

한국의 일본전 0-3 패배는 '삿포로 참사'로써 한국 축구 최악의 패배 중에 하나로 남게 될 겁니다. 그 이전에도 최악의 패배는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오만쇼크'로 회자되는 2003년 오만전, 베트남전 패배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몰디브 원정에서 0-0 무승부로 비기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2월 A매치 중국전에서는 0-3으로 패하면서 공한증이 깨졌습니다. 박지성과 이청용 같은 유럽파들이 빠졌음을 감안해도 경기 내용에서 상대팀에게 압도당했고 3골이나 내줬습니다. 중국전 패배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죠. 오만-베트남-몰디브-중국은 한국보다 몇 수 아래의 팀들로써, 한국이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축구에서 이변은 늘 존재합니다. 세계적인 축구 강국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의 오랜 라이벌입니다. 문화, 산업, 역사, 정치 분야에 이르기까지 일본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죠. 특히 한국 축구는 1950년대 일본과 A매치를 치르면서 역대 전적 및 2000년대 이후 전적에서 상대팀을 앞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국이 일본보다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했죠. 한국에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프리미엄이 있었고 차범근-박지성이라는 세계적인 축구 영웅을 배출 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이루지 못했던 결과물이죠. 일본이 최근 4번의 아시안컵에서 3번 우승을 거머쥐었고 유럽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지만 한국 축구는 여전히 '아시아 최강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전 0-3 패배로 전세가 완전히 바뀌었죠.

이미 경기는 끝났지만, 일본이 한국보다 축구를 잘한다는 명제는 자존심이 상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 축구가 그동안 이루었던 성과물을 생각해서 말입니다. 객관적으로 '아시안컵 챔피언' 일본이 아시아 No.1인 것이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들 마음 속에서 라이벌의 저력을 아시아 No.1으로 치켜 세워야 할지 주저하게 됩니다. 적어도 일본에게는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일본전 0-3 패배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닌, 실력으로 패했던 결과입니다. 만약 실력으로 패하지 않았다면 0-3 패배는 둘째치고 경기 내용은 대등했을 겁니다. 한국의 공격은 일본이 자랑하는 엔도-하세베 더블 볼란치 조합을 뚫지 못했고, 한국의 수비는 일본의 집요한 공간 침투에 흔들리면서 경기 내내 불안했죠. 그나마 차두리가 분전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실점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차두리의 클래스는 일본전 참패 속에서 빛 바래고 말았습니다. 축구는 개인이 아닌 팀 스포츠이기 때문이죠. 흔히 한국 축구하면 정신력을 강조하지만, 현대 축구는 정신력이 아닌 팀으로 뭉치는 조직력과 기술 축구를 강조합니다. 일본 축구가 그 흐름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실력을 키웠죠.

많은 사람들은 박지성-이영표-이청용 공백을 아쉬워합니다. 지동원-손흥민도 빠졌지만 박지성-이영표-이청용 만큼은 전임 감독 시절부터 팀 전력에 없어선 안 될 선수들 이었습니다. 세 선수가 빠지면서 한국의 전력이 약해졌죠. 하지만 박지성-이영표는 이제 잊어야 합니다. 두 선수는 더 이상 대표팀에 존재하지 않을 선수들입니다. 특히 박지성 대표팀 복귀를 기대하기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무릎 부상이 신경쓰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박지성 대표팀 은퇴는 시의 적절했습니다. 이청용도 한동안 대표팀에서 볼 수 없습니다. 정강이 골절로 9개월 진단을 받았으며, 원래의 기량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반면 일본은 다릅니다.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 및 아시안컵 우승의 뼈대를 형성했던 엔도-하세베 조합은 여전히 굳건하며, 혼다는 에이스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카가와가 급성장하면서 일본 대표팀이 두 명의 에이스를 보유하게 됐죠. 일본 축구의 고질적인 단점이었던 원톱으로는 J리그 득점 1위 이충성이 새롭게 가세했고, 나카자와-툴리우 센터백 조합을 곤노-요시다가 성공적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리고 유럽파들이 점점 늘어난데다 그들의 퀄리티가 향상되면서 힘과 체력을 앞세운 상대팀 선수들(대표적으로 한국)과 싸우는 면역력을 길렀습니다. 특히 하세베는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전투적인 성향으로 변모했습니다. 자케로니 재팬의 성공은 감독 역량 이전에 '일본 축구의 저력'에서 만들어졌죠.

삿포로 참사는 조광래호가 자케로니 재팬에게 0-3으로 패했던 단순한 결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조광래 감독은 패스 축구를 선호하는 지도자로써 선 굵은 축구를 지향했던 한국 축구의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90년대부터 패스 축구에 눈을 뜨면서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미드필더들이 대거 배출됐죠. 패스를 정확히 연결하는 것에서 벗어나, 패스의 강약을 조절하고 경기 집중력을 높이면서 상대 수비 빈 공간을 노리는 볼 배급에 강한 선수들이 일본 축구에서 배출되고 있습니다.(일본의 한국전 승리 요인) 한국에서도 우수한 테크니션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그 주기가 더 빨랐고 인프라까지 강합니다. 이번 일본전 매우 뼈아프지만 한국 축구의 내실이 튼튼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