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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내가 기억하는 신영록, 강인한 사나이였다

 

2008년 4월 13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진행된 FC서울-수원 블루윙즈의 라이벌전. 수원 공격수 신영록은 2골을 넣으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수원이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서울을 상대로 K리그 3연승을 거두는 그 중심에 신영록이 있었습니다. 신영록은 그해 K리그 23경기에서 7골 4도움을 기록하며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특히 서울전은 수원의 주전 공격수로 발돋움하는 결정타가 됐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영록바(신영록+드록바)'라는 별명도 그 시절부터 알려지게 됐죠.

신영록은 16세였던 2003년에 세일중을 중퇴하고 수원에 입단했습니다. 당시 이강진, 김준 같은 수원 동료 선수들과 함께 U-17 대표팀에서 두각을 떨쳤고, 그 이후에는 청소년 및 올림픽 대표팀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수원에서는 쟁쟁한 선수들에 가려 2007년까지 5시즌 동안 주전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어린 유망주가 외국인 공격수들과 경쟁해야 하는 현실 이었습니다. 2007시즌 종료 후에는 대전행이 추진 되었지만 몸값 때문에 이적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2008년 '영록바'라는 별명을 얻었고, 올림픽 대표팀 주력 공격수로 활약하며, 수원의 K리그 우승 멤버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신영록의 시련은 2009년 부터 찾아왔습니다. 2009년 초 터키 부르사스포르로 이적했으나 임금 체불을 겪었고, 한때 러시아 톰 톰스크 진출을 추진했으나 부르사스포르가 이적 동의서를 발급하지 않아 상당 시간을 그라운드에서 보내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친정팀 수원 복귀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난해 K리그 후반기 9경기에서 3골 1도움을 기록했으나 올 시즌을 앞두고 제주로 이적했습니다. 수원을 떠난 사유는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아마도 전술적 요인이 있었을 겁니다.), 팀의 프랜차이즈나 다름 없었던 신영록의 제주행은 수원팬들이 원치 않았던 소식 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신영록의 터키 진출은 최악의 선택 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 뛰는 동기부여가 작용했기 때문에 터키 무대에서 처음으로 골을 넣을 때는 훗날 유럽 무대를 빛내는 한국인 공격수가 될 거라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임금 체불이라는 뜻하지 않은 시련, 러시아 진출 과정에서 부르사스포르가 무단 이탈로 규정하고 이적을 저지당했던 여파가 컸습니다. 그렇다고 부르사스포르 복귀를 원하기에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장기간 경기를 뛸 수 없었죠. 차라리 수원에 남았으면 좋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국내에서 꾸준히 몸을 만들며 남아공 월드컵을 준비했다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2008년의 신영록이라면 국가 대표팀 주전을 노릴 잠재력이 충만했습니다.

신영록 같은 문전에서 파워풀한 몸놀림으로 상대 수비수를 제압하는 타겟맨은 한국 축구에서 흔치 않았습니다. 특히 상대 선수와의 몸싸움에서 악착같은 면모를 발휘하면서 동료 공격수에게 골 기회를 내주는 이타적인 특징을 겸비했죠. 적어도 파워 만큼은 어느 누구에게 지지 않는 아우라가 있었죠. 지금으로 치면 박주영-정조국-지동원-유병수-이동국과는 엄연히 다른 타입의 공격수 입니다. 영록바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도 '한국의 드록바'라는 수식어와 일맥 상통했죠. 2003년 수원 입단때는 16세 나이가 믿기 어려울 정도의 파워를 발휘했습니다. 강인함 만큼은 천부적이었던 재능이 다른 한국 공격수들과 차별되었기에 많은 축구팬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1일 이었습니다. FC서울-포항 스틸러스의 경기를 보러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찾았는데, FC서울 서포터즈 수호신이 위치한 응원석 가운데에 "우리는 너를 믿는다! 일어나라! 신영록!"이라는 걸게가 공개됐습니다. 여전히 수원 공격수 이미지가 남아있는(저의 생각이지만) 신영록을 응원하는 걸게였습니다. FC서울이 가장 싫어하는 수원 출신 공격수를 상대로 말입니다. 엄연히 다른 팀에서 뛰는 공격수지만 서울의 걸게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신영록은 지난 5월 8일 대구전 경기 도중 부정맥에 의한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인천 골키퍼 윤기원 자살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벌어졌죠. 프로야구의 고 임수혁을 떠올리게 했던 아찔한 악몽이 재현됐습니다. 고 임수혁처럼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는게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초동 대처가 신속했기 때문에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한때 뇌에 간질파가 나타나 의식을 찾는데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마침내 지난 27일 기력을 되찾으며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그런 신영록이 의식을 찾기까지 50일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길고 길었던 시간 동안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힘든 나날을 보낸 끝에 쾌유 했습니다. '반드시 일어서겠다'는 마음이 육체와 정신을 움직이며 의식을 되찾았죠. 부정맥에 의해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던 케이스가 많았고 소생할 가능성이 2.5%에 불과했음을 상기하면, 신영록이 의식을 회복한 것은 매우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타고났던 강인함이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이어지면서 말입니다.

특히 신영록이 일어서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50일 동안 신영록 곁을 보살폈던 부모님을 비롯 제주 구단, 제주 한라병원, 동료 선수 및 축구 관계자들을 비롯해서 축구팬들이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신영록의 친정팀 수원의 서포터즈 그랑블루는 지난 11일 제주 원정에서 "이겨내라 신영록! 그랑블루는 널 사랑한다"는 걸게를 걸었고, 서울을 비롯한 다른 구단 서포터즈도 쾌유을 바라는 뜻으로 응원석에 걸게를 부착했습니다.

축구팬 뿐만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 심장마비 소식을 접하면서 신영록이 다시 일어서기를 바란다는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적인 염원으로 이어졌죠. 실제로 신영록은 의식 회복 이전에 사람들의 메시지를 들으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현역 선수 복귀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심장마비 소생 확률이 2.5%라는 점에서 그가 다시 돌아온 것 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의식을 회복한 것만으로 놀랍고 반가울 따름 입니다.

저는 신영록의 신인 시절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중학교 중퇴하고 수원에 입단했던 2003년 말입니다. 미성년자 답지 않게 파워풀하고, 과감한 몸놀림을 발휘했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강인했던 그의 마음은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함께 심장마비를 이겨내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언젠가는 그라운드에서 축구팬들에게 인사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짐작됩니다. 그 모습을 기약하며 앞으로 다가올 재활 치료를 이겨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