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을 기록한 것은 아니고, 공격쪽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던 것도 아닙니다. 화끈한 플레이를 펼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저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역시 그는 팀 플레이의 귀재였습니다.
'산소탱크' 박지성(3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이 라이벌 첼시전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팀 승리를 공헌했습니다. 박지성의 맨유는 7일 오전 3시 45분(이하 한국시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진행된 2010/11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전반 24분 웨인 루니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박지성은 후반 48분 크리스 스몰링과 교체되기까지 수비적인 역할에 주력한 것이 맨유가 첼시전에서 승리하는 발판으로 연결됐습니다. 첼시전 승리의 또 다른 주역 이었습니다.
[사진=박지성 (C) 유럽축구연맹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사진(uefa.com)]
'수비형 윙어'로 돌아온 박지성은 여전히 강했다
박지성은 첼시 원정에서 4-4-2의 왼쪽 윙어를 맡았습니다. 지난 2일 웨스트햄전에서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첼시전에서 같은 역할을 소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본래의 포지션에서 임무 수행했습니다. 퍼거슨 감독이 첼시전 공격의 키 플레이어를 루니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루니가 웨스트햄전에서는 4-2-3-1에서 부진했지만 4-4-2로 전환한 이후에는 페널티킥 및 프리킥 골을 포함해서 3골을 터뜨렸습니다. 쉐도우로서 활동 폭을 넓히며 '루이스가 빠진' 첼시의 중앙 수비를 교란하겠다는 뜻이죠. 여기에 에르난데스가 타겟맨을 맡으면서 화력을 강화하는 4-4-2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맨유의 4-4-2는 평소보다 수비쪽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포백과 미드필더 사이의 폭을 좁히고, 박지성-발렌시아로 짜인 좌우 윙어의 적극적인 수비 가담을 주문하며 두꺼운 수비벽이 형성됐죠. 첼시 공격 옵션들의 빠른 침투를 견제하기 위해 커버링에 심혈을 기울이며 미드필더들의 수비 가담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4-2-3-1보다 효과적이었죠. 4-2-3-1에서는 2선 미드핃더들이 공격 밸런스를 잡으면서 2와 3 사이에 측면 공간이 벌어지는 구조적 문제점이 있습니다. 맨유는 그동안 강팀과의 경기에서 4-2-3-1을 선호했지만 첼시전에서는 그 흐름을 포기했죠. 수비 강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4-4-2를 선택했습니다.
퍼거슨 감독의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수비적인 4-4-2 콘셉트에 적합한 선수들이 박지성-발렌시아였죠. 많은 축구팬들은 박지성의 수비력에 감탄하지만, 발렌시아의 수비력도 퍼거슨 감독의 인정을 받았고 전 소속팀 위건의 동료였던 조원희도 극찬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유는 첼시 특유의 빠른 공격을 약점으로로 분쇄시켜 '맨유의 강점' 역습으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90분 동안 수비 축구를 펼친 것은 아니지만, 첼시의 공격을 끊는 것 부터가 중요했기 때문에 수비력이 뛰어난 윙어들의 선발 출전이 필요했습니다. 나니의 선발 제외는 퍼거슨 감독의 '전술적 선택'이었죠.
그래서 박지성은 첼시전에서 '수비형 윙어'로 돌아섰습니다. 지난 1~2시즌 동안 윙어로서 공격 성향의 콘셉트가 두드러졌지만, 첼시전은 맨유에게 중요한 원정 경기였기 때문에 무실점 경기가 중요했고 윙어들까지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지성이 수비형 윙어로 각광을 받았던 2008/09시즌에는, 일각에서 '박지성은 공격력이 약하다'는 시각을 가지면서 수비형 윙어를 저평가했습니다. 실제로는 호날두(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적 성향을 보완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첼시전은 박지성-발렌시아가 모두 수비적 이었습니다. 상대를 이기겠다는 맞춤형 전략 이었습니다.
박지성은 두 가지 형태의 수비를 취했습니다. 첫째는 수비 범위를 앞쪽으로 넓히면서 첼시 오른쪽 풀백 보싱와가 오버래핑 펼치는 타이밍을 놓치는 이득을 안겨줬던, 상대팀 오른쪽 윙어였던 하미레스의 활동 반경을 자신쪽으로 유도했습니다. 전방을 부지런히 드나들었기 때문에 하미레스-보싱와가 후방쪽에 부담이 커진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첼시는 후반 24분에 4-3-3으로 전환하기 전까지 오른쪽 측면에서 공격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문제점이 벌어졌습니다. 하미레스-보싱와가 박지성에게 발이 묶였기 때문이죠. 특히 보싱와는 박지성과 세 번의 매치업(2008/09시즌 2경기 포함)에서 모두 패했습니다. 후반 중반부터는 공격적인 움직임이 살았지만 볼 배급의 세밀함이 부족했습니다. 첼시의 0-1 패배를 키우고 말았죠.
그리고 두번째는 왼쪽 측면 뒷 공간 및 중앙까지 수비에 가담하는 넓은 활동 폭을 나타냈습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 선수가 소유한 볼을 빼앗으며 맨유의 역습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주변 동료 선수들이 역습 과정에서의 빌드업 속도가 늦었던 아쉬움이 있지만 공격으로 전환하는 장면이 많은 것 자체만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토대를 박지성과 '애슐리 콜이 타겟이었던' 발렌시아가 마련했죠. 후반 37분에는 맨유 진영에서 미켈이 소유했던 볼을 빼앗으며 경기 막판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 집념을 나타냈습니다. 그때는 맨유가 4-2-3-1로 전환했는데,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루니-나니와 동일선상을 유지하며 첼시의 빌드업을 늦췄습니다.
물론 박지성은 공격에서 루니의 결승골 만큼 강렬한 임펙트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일부에서는 박지성의 공격력 저하를 꼬집으며 혹평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박지성을 후반 중반에 교체하지 않았던 것은(후반 32분까지 하파엘-에르난데스 교체) 수비쪽에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옵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후반 5분 하파엘이 부상으로 교체 될 때는 발렌시아를 오른쪽 풀백으로 내렸습니다. 그런 박지성은 후반 48분 스몰링과 교체 되었지만 엄연히 시간을 끌겠다는 퍼거슨 감독의 의도였을 뿐입니다. 햄스트링 부상에서 복귀한지 얼마 안된 선수가 2일 웨스트햄전, 7일 첼시전을 뛰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죠.
박지성의 첼시전 맹활약이 의미있는 이유는 퍼거슨 감독에게 '강팀에 강한 면모'를 재확인 했습니다. 맨유는 남은 두 달 동안 챔피언스리그-프리미어리그-FA컵 우승에 모두 도전하기 때문에 매 경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강팀 경기에 믿음직한 선수들의 중용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며, 이것이 박지성과 베르바토프의 차이입니다. 박지성은 부상에서 회복했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동료 선수들보다 컨디션이 좋습니다.(웨스트햄전에서 드러난 것 처럼) 맨유의 우승 과정은 탄력을 얻을 것이며, 우리는 앞으로 산소탱크의 오름세를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