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날은 지난 17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전에서 2-1로 승리했습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사를 제압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었습니다. 특히 후반 33분 로빈 판 페르시(28)가 왼쪽 박스 구석에서 쏘아올린 왼발 발리 슈팅은 절묘했습니다. 슈팅 각도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쪽으로 패스를 연결할 것으로 보였지만 골을 해결짓는 대담한 선택을 했죠. 만약 그 슈팅이 없었다면 아스날의 역전승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판 페르시는 바르사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리면서 최근 10경기 12골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1월 1일 버밍엄전을 시작으로 1경기당 1.2골을 기록하는 순도 높은 득점력을 발휘했죠. 지난 5일 뉴캐슬전 부터는 3경기 연속골을 올렸습니다. 올 시즌 상반기에 발목 부상 여파로 무득점에 그쳤고 결장이 잦았지만 최근에는 아스날의 간판 공격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지금의 폼이라면 앞으로 더 많은 골을 기록할 것이 분명하며 팀의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우승 과정이 탄력을 얻게 됩니다.
[사진=로빈 판 페르시 (C)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사진(arsenal.com)]
이러한 판 페르시의 최근 행보는 지난 시즌 상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난해 11월 7일 울버햄턴전까지 프리미어리그에서만 11경기 7골 7도움을 기록하면서 리그 득점 랭킹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 해 9월 26일 풀럼전 부터 11월 7일 울버햄턴전까지 프리미어리그 6경기에서는 6골 3도움을 기록하는 '몰아치기' 내공을 발휘했죠. 세스크 파브레가스와 함께 아스날 공격의 차포를 담당하며 팀의 화력을 책임졌습니다. 아스날이 2008/09시즌에 한때 6위까지 떨어지면서 빅4 탈락 위기에 몰렸으나 2009/10시즌 선두 경쟁 대열에 있었던 이유는 판 페르시의 공격력과 밀접했죠.
판 페르시의 최근 맹활약이 의미있는 이유는 마루앙 샤막을 벤치로 밀어냈다는 점입니다. 샤막은 올 시즌 상반기 아스날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이적생 중에 한 명으로 거론되었던 인물입니다. 한때는 아르센 벵거 감독이 샤막-판 페르시 투톱을 실험했을 정도로(끝내 실패했지만), 샤막을 주전 공격수로 기용하려는 의지가 뚜렷했습니다. 하지만 판 페르시는 버밍엄전에서 올 시즌 첫 골을 터뜨리는 순간 부터 골을 몰아치면서 원래의 폼을 되찾았습니다. 파브레가스와의 호흡이 가장 잘 맞는 공격수이기 때문에 부동의 주전 입지를 다지기에 충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판 페르시는 '아스날 레전드' 데니스 베르캄프(현 아약스 코치)에 비견되는 선수입니다. 네덜란드 국적의 아스날 공격수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판 페르시가 아스날의 타겟맨이자 페예노르트 출신, 베르캄프가 쉐도우의 교과서로 불렸던 아약스 출신이라는 차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베르캄프가 아스날에서 은퇴했던 2006년에는 판 페르시가 주전 공격수로 도약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판 페르시는 '과연 베르캄프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축구팬들의 많은 주목을 끌었죠.
그러나 판 페르시가 베르캄프의 후계자로 불릴만한 적임자인지는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2%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부상입니다. 2004/05시즌 부터 7시즌 동안 아스날에서 뛰었으나 잦은 부상에 발목 잡히면서 풀 시즌을 소화한 경력이 없습니다. 프리미어리그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30경기 이상 소화했던 시즌이 없습니다. 올 시즌 상반기에는 발목 부상에 시달리면서 한동안 경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바르사전에서 멋진 발리 슈팅을 작렬하면서 앞으로의 맹활약을 예감케 했지만, 부상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붙을 때 가능한 시나리오 입니다.
판 페르시는 축구계의 대표적인 '유리몸' 입니다. 토마스 로시츠키(아스날) 조 콜(리버풀) 마이클 오언, 오언 하그리브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들리 킹(토트넘) 아르연 로번(바이에른 뮌헨) 같은 단골 부상 선수죠. 부상 횟수가 잦거나 또는 회복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꾸준히 출중한 실력을 뽐낼 포스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베르캄프의 진정한 후계자로 불릴려면 시즌 내내 골을 터뜨리거나 연계 플레이에 관여하며 아스날 공격의 무게감을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판 페르시는 부상 공백이 잦았죠.
특히 2009년 11월 14일 A매치 이탈리아전에서는 조르지오 키엘리니(유벤투스)의 태클에 의해 발목을 다치면서 5개월을 결장했습니다. 당초에는 4주 진단 이었지만 회복이 느려지면서 5개월 동안 개점 휴업 했습니다. 시즌 초반 4-3-3 공격 축구로 다이나믹한 화력을 과시했던 아스날에게 불운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니클라스 벤트너의 스포츠 헤르니아(탈장) 수술까지 겹치면서 최전방 공격수 없이 시즌을 치렀습니다. 안드리 아르샤빈이 제로톱 역할을 맡았지만 피지컬에서 한계를 드러내면서 아스날 공격이 주춤해졌고 끝내 선두 경쟁에서 밀렸습니다. 아스날에게 판 페르시 부상 공백이 아쉬운 이유죠. 지난해 여름에 샤막을 영입하면서 판 페르시 부상 공백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판 페르시의 또 다른 문제는 부상 복귀 이후의 폼이 안좋습니다. 지난 시즌 및 올 시즌에 발목을 다쳤지만 회복이 늦어졌던 공통된 문제점이 있습니다. 본래의 화력을 되찾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죠. 주로 부상이 잦은 선수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점입니다. 상대 수비와의 몸싸움을 이겨내야 하는 파워, 맹활약을 펼치겠다는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에서 경기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근래에는 웨인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페르난도 토레스(첼시) 박주영(AS 모나코) 같은 공격수들에게 나타났던 현상이죠. 판 페르시도 같은 이유로 한때 부진에 빠졌습니다.
특히 남아공 월드컵은 판 페르시에게 아쉬웠던 순간 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준우승 멤버로 활약했지만 7경기에서 1골에 그쳤습니다. 발목 부상 후유증으로 골 감각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클라스 얀 훈텔라르(살케 04)가 극심한 골 부진에 빠졌기 때문에 월드컵 7경기에서 모두 주전으로 출전했지만 빈약한 득점력에 시달렸습니다. 경기 내용상 무난한 활약을 펼쳤지만 원톱으로서 해결사적인 기질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옥의 티 였습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베르캄프의 후계자로서 구김살없는 포스를 발휘했을지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판 페르시는 바르사전 골을 통해 공격력 향상에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터뜨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죠.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샤막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아스날 입장에서는 샤막의 출전 시간을 늘리면서 판 페르시를 무리하게 투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판 페르시의 부상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부상이 많았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재발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판 페르시가 꾸준히 골을 터뜨려야 아스날이 무관 징크스를 떨치는 것은 진리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