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축구 대표팀은 지난 17일 사우디 아라비아(이하 사우디)전에서 5-0 대승을 거두고 아시안컵 B조 1위로 8강에 진출했습니다. 오카자키 신지가 해트트릭, 마에다 료이치가 2골을 넣으며 사우디를 격침했죠. 물론 사우디전에서 5골을 퍼부은 것은 상대의 자중지란에 따른 수비 약화가 컸습니다. 일본의 3번째, 4번째 골 장면은 사우디 선수들이 수비를 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입장에서 5-0 승리가 의미있는 이유는 아시안컵 우승을 위한 긍정적 분위기를 얻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아시안컵 우승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팀의 주축 선수인 카가와 신지(22, 도르트문트) 혼다 케이스케(25, CSKA 모스크바)의 공존을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이죠. 카가와는 올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최우수 선수(MVP)의 영예를 안았고 혼다는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의 원정 첫 16강 진출을 이끈 주역입니다. 두 선수 모두 유럽 빅 클럽의 꾸준한 영입 대상(언론 분위기에 의하면)으로 주목받고 있죠. 문제는 두 선수가 융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문제점입니다.
포지션 문제에서 비롯된 카가와-혼다 공존 실패
축구는 11명이 하나로 똘똘 뭉쳐 골과 승리를 위해 싸우는 스포츠입니다. 개인 실력도 중요하지만 동료 선수의 역량을 받쳐주는 호흡 또한 중요합니다. 잉글랜드 대표팀과 볼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는 유로 2004 부터 남아공 월드컵까지 제라드-램퍼드 공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기 패턴이 싱거웠고 메이져 대회 우승 실패하는 결정타로 작용했습니다. 반면 볼턴은 이청용이 있음에 데이비스-엘만더 투톱의 파괴력이 향상됐습니다. 그 결과 데이비스는 지난해 생애 첫 잉글랜드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엘만더는 지난해 11월 프리미어리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잉글랜드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잉글랜드 중원을 담당하는 제라드-램퍼드가 서로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팀의 전체적 경기력이 저하되었고, 일본도 공격을 이끄는 카가와-혼다의 시너지가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중앙에서의 역할에 익숙하기 때문에 동선이 겹치거나, 서로의 호흡에 의한 패스 플레이가 살아나지 않고 있죠. 제라드-램퍼드에 비하면 포지션 정리가 구분된 차이점은 존재합니다. 4-2-3-1 체제에서 카가와가 왼쪽 윙어, 혼다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고 있습니다.
문제는 카가와가 왼쪽 윙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아시안컵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측면에서 공격을 짊어지기에는 파괴력이 부족하죠. 상대 수비 뒷 공간을 겨냥하는 침투패스, 현란한 드리블 돌파, 상대 수비를 달고 다니며 빠른 볼 터치에 의한 볼 배급을 펼치는 기동력 넘치는 플레이가 왼쪽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오른쪽 윙어를 맡았던 마쓰이의 정교한 볼 배급(부상으로 중도 귀국) 오카자키의 넘칠 줄 모르는 기동력과 대조되는 활약상입니다. 도르트문트에서는 쉐도우 스트라이커 내지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으면서 팀 공격을 지휘했지만 일본 대표팀에서는 다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포지션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실, 일본의 왼쪽 윙어는 오카자키가 적합합니다. 지난해 10월 8일 아르헨티나전에서 왼쪽 윙어로 출전하여 상대 오른쪽 풀백 부르디소의 뒷 공간을 힘껏 두드렸고, 모리모토-혼다 같은 공격 옵션들과 짜임새 넘치는 연계 플레이를 펼치면서 일본의 1-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일본의 결승골 주인공도 오카자기였죠. 상대 골키퍼가 펀칭했던 볼을 리바운드 슈팅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카자키는 4일 뒤 한국전에서 부상으로 결장했습니다. 그래서 카가와가 왼쪽 윙어로 전환했으나 최효진의 밀착 수비에 봉쇄 당하면서 후반 중반에 교체 됐습니다.
그런데 자케로니 감독은 여전히 카가와를 왼쪽 윙어로 두고 있습니다. 4-2-3-1 포메이션의 정착을 위해 카가와를 측면에 배치했죠. 아시안컵 이전 훈련에서는 카가와-혼다를 좌우 윙 포워드로 활용하는 3-4-3을 연마했지만 실전에서는 4-2-3-1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3백보다는 4백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 자케로니 감독의 판단이었죠. 결국 카가와는 자신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5-0으로 승리했던 사우디전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혼다가 체력 안배 차원에서 결장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는 카시와기 였습니다. 카가와는 왼쪽에서 중앙으로 빠지면서 상대 수비를 유린하거나 가운데 쪽으로 킬러 패스를 띄우는 장면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활약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혼다도 공격형 미드필더에 어울리는 선수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최적의 포지션이 없습니다. 그동안 각급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여러가지 포메이션을 소화하면서 포지션 변동이 잦았죠. 왼쪽-가운데-중앙 공격 옵션을 모두 맡았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원톱으로 출전했습니다. 일본 J리그 나고야 시절에는 3백의 왼쪽 윙백으로 뛰었던 이력도 있죠. 현 소속팀 CSKA 모스크바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중입니다. '러시아 신성' 자고예프의 공격력을 보조하는 중이죠. 어느 한 포지션에서 꾸준히 두각을 떨쳐야 실전 감각이 쌓이면서 내공이 늘어날 수 있는데 혼다는 뚜렷한 성장 속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공격형 미드필더 혼다'는 동료 선수 움직임을 이용하여 상대 수비 뒷 공간을 겨냥하는 패싱력이 취약합니다. 기본적인 패싱력을 갖췄지만 상대 수비에 막히면 오픈 패스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투박합니다. 공격을 쉴새없이 전개할 수 있는 경기 집중력까지 부족하죠. 남아공 월드컵에서 원톱으로 뛸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오히려 오른쪽 측면에서 패스 플레이가 살아납니다. 본선 2차전 시리아와의 후반전이 그 예 였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윙어 혼다'는 상대 수비를 달고 다니는 움직임이 약합니다. 드리블 돌파에 강하지만 개인기로 상대 수비와 경합하는 적극성이 부족합니다. 빈 공간을 침투하는 플레이를 선호하죠. 그래서 경기력의 편차가 큽니다. 유럽 빅 클럽 이적이 성사되지 않는 원인과 맥락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왼쪽 윙어에 적합하지 않은 카가와, 최적의 포지션이 없는 혼다의 공존 실패는 예견된 결과나 다름 없었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골고루 결합하여 상대 박스쪽에서 세밀한 패스 플레이를 주고 받는 패턴이 취악하죠. 카가와를 중앙에서 활용하기에는 혼다를 버릴 수 없고, 오른쪽 윙어에는 마쓰이-오카자키 같은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마쓰이가 부상으로 하차하면서 두 선수의 공존 문제가 풀릴 여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시안컵 우승을 노리는 일본 입장에서는 카가와를 공격형 미드필더, 혼다를 오른쪽 윙어로 전환하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 관건은, 중앙이 측면보다 압박의 두께가 큽니다. 카가와가 도르트문트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성공했던 이유는 출중한 공격 옵션들이 두루 포진하면서 압박에 자유로웠지만, 일본 대표팀에서는 원톱 마에다가 상대 수비와의 파워 싸움에서 밀리면서 최전방에 고립됐습니다.(사우디전 논외) 오히려 모리모토(부상으로 부참)가 나았죠. 자케로니 감독은 그 문제를 염려하여 카가와를 왼쪽 윙어에 배치했는지 모릅니다. 카가와-혼다 공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본의 아시안컵 우승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임에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