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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한국 축구, 정성룡 없었다면 16강 불가능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16강에서 우루과이에게 1-2로 패하고 탈락했습니다. 8강 진출을 위해 90분 동안 사력을 다하여 부지런히 뛰었지만 우루과이의 효율적인 경기 운영과 수준급의 조직력, 강력한 임펙트를 넘기에는 역부족 이었습니다. 한국이 전반 중반부터 경기 흐름을 지배했지만 결과에서 패하면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선전을 기약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선수들은 모두 다 잘싸웠습니다. 월드컵 원정 사상 첫 16강에 진출한데다 그것이 태극 전사들이 간절히 바래왔던 목표였고 선배 세대들이 이루지 못했던 업적 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박지성을 비롯한 태극 전사들의 우루과이전 투혼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골키퍼 정성룡(25, 성남)에게 우루과이전은 힘든 경기였습니다. 경기가 빗속에서 진행된데다 후반부터 빗줄기가 굵어졌기 때문에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골키퍼 장갑도 비 때문에 미끄러울 수 밖에 없었고 잔디 상황이 열악했던 그라운드 또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리고 16강 무대에 올라섰던 심적인 부담감 또한 없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한국의 전반 8분 선제골 실점은 정성룡에게 책임이 없지 않았습니다. 포를란의 왼쪽 땅볼 크로스가 날아드는 상황에서의 위치선정 및 처리 능력이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이죠. 수비라인이 지나치게 포를란의 위치에 쏠리면서 반대쪽에 있던 수아레스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던 커버 플레이 미숙도 아쉬웠지만 그 상황에서 주춤거렸던 정성룡도 아쉬웠습니다. 골키퍼가 수비수들을 리드하는 역할이 좋아야 한다는 점에서 정성룡에게 부족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기 전체를 놓고 보면 정성룡은 평균 이상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우루과이가 한국 수비망을 뚫고 여러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날리며 한국 골문을 위협했는데, 정성룡의 존재감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지난 아르헨티나전 처럼 1-4로 대패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상대 슈팅 궤적을 빠르게 읽으며 흔들림 없이 선방한 것, 매끄러웠던 위치선정, 짧은 거리에서 날아드는 수아레스의 강력한 슈팅을 펀칭하는 안정감이 더해지면서 한국의 실점 위기를 여러차례 넘겼습니다. 한국의 두번째 실점 상황은 공이 골문 구석 깊숙한 공간으로 향했기 때문에 정성룡이 선방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공을 막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골키퍼가 처리하기 힘든 슈팅 이었습니다.

한국의 16강 진출의 결정적 터닝 포인트는 골키퍼를 이운재에서 정성룡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동안 대표팀 부동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던 이운재는 올 시즌 K리그에서 민첩성 저하 및 킥력 불안 등으로 노쇠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월드컵 본선에서 정성룡에서 주전 골키퍼 장갑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반면 정성룡은 올 시즌 들어 민첩성-위치선정-공중볼 대처 능력이 향상되면서 성남의 뒷문을 단단히 지킨끝에 대표팀에서 이운재를 제치고 No.1에 등극했고 그 기세를 몰아 그리스전 무실점 선방을 펼쳤습니다.

사실, 남아공 월드컵 주전 골키퍼는 이운재가 유력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부터 8년 동안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데다 3회(1994-2002-2006년)의 월드컵 본선 출전 경험까지 작용하면서 본선에서 백전노장의 노련미를 뽐낼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K리그에서 부진했지만 예비 엔트리 30인에 포함되면서 허정무 감독의 믿음을 얻었기 때문에 지난달 16일 에콰도르와의 평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운재의 남아공 월드컵 주전 출전이 예상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전 선발 라인업의 기준을 대표팀 공헌도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예비 엔트리 30인에서 26인으로 줄이는 과정에서는 조원희-김치우-강민수 같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공헌자를 제외했습니다.(강민수는 곽태휘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 합류) 최종 엔트리 발탁 과정에서는 한때 허정무호의 황태자로 활약했던 이근호까지 내쳤습니다. 그리스전을 앞두고는 부동의 주전이었던 이운재 대신에 정성룡을 주전으로 올리면서 공헌도보다 현재의 폼을 중요시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허정무 감독의 선택은 적중했습니다. 그동안 이운재의 2인자로 가려졌으나 실력 향상을 위해 소리없이 훈련에 매진했던 정성룡이 드디어 노력한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그리스와의 전반전에 햇빛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을 잡아낸 것을 비롯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우루과이전에서 한국의 실점 위기를 여러차례 넘겼습니다. 한국의 수비 조직력이 전반적으로 불안했기 때문에 무수한 위기 상황이 속출했지만 정성룡은 상대팀의 슈팅을 막아내기 위해 골문 앞에서의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정성룡의 남아공 월드컵 맹활약이 값진 이유는 월드컵 본선에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공격수와 미드필더는 여러차례 패스 미스를 범하는 것이 다반사지만 골키퍼는 한 번이라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면 많은 사람들의 질타에 시달립니다. 잉글랜드 골키퍼 로버트 그린이 지난 미국전에서 전반 40분 클린트 뎀프시의 슈팅을 뒤로 흘리는 실점을 범해 자국 국민들의 엄청난 비아냥을 들었던 것이 대표적 예 입니다.

하지만 정성룡은 월드컵 무대에서 어떠한 부담감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골문을 지켰습니다. 마치 성남에서 뛰는 것 같은 기분으로 경기에 임하면서 주눅이 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동안 대표팀 경기 출전이 적었던 선수가 맞는지 의심 될 정도로 골문을 든든히 지켰습니다. 정성룡이 없었다면 한국의 16강 진출은 힘들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제 정성룡은 2011년 1월 아시안컵을 비롯해서 앞으로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서 골문을 지킬 것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값진 경험이라면 앞으로 빈틈없는 선방을 과시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며 이제 No.1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 분명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영웅이자 그동안 대표팀 주전 골키퍼를 맡았던 이운재를 실력으로 밀어내고 남아공 월드컵 주전 골키퍼 장갑을 낀 정성룡이라면 앞으로의 미래가 무궁무진합니다. 그의 저력이라면 한국 축구는 앞으로 몇년 동안 골키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