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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독일 발라크, 1인자가 되지 못한 비운의 스타

 

2000년대 독일 축구를 빛낸 최고의 선수가 미하엘 발라크(34, 전 첼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독일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 2006년 독일 월드컵 3위, 유로 2008 준우승의 쾌거를 달성하기까지 발라크의 공헌도가 막중했기 때문입니다. 전차군단은 개인기를 앞세운 화려한 컨셉과 거리감이 있었음에도 메이져 대회에서 선전했던 것은 발라크를 중심으로 짜여진 미드필더진의 유기적인 콤비플레이가 실전에서 기계처럼 하나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비록 발라크는 메이져 대회 우승 경력이 없었지만 세계 최정상급 미드필더임엔 분명합니다. 홀딩맨, 앵커맨,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까지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소화했고 공수 양면에 걸친 모든 능력이 골고루 출중했습니다. 다부진 피지컬을 앞세운 강력한 몸싸움과 세밀한 태클, 날카로운 슈팅 및 패싱력, 과감한 드리블 돌파에 이은 슈팅에 경기를 지배하는 아우라를 자랑했던 만능형 미드필더 였습니다. 그리고 팀이 승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결정적인 공격 기회를 만들거나 직접 골을 넣는 해결사적인 기질까지 발휘했습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독일이 최악의 경기를 펼친다는 외부의 지적을 훌륭하게 이겨냈습니다. 8강 미국전과 4강 한국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독일 준우승의 디딤돌 역할을 마련했고 그 시절이 오늘날의 발라크를 있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에서 이천수에게 거친 파울을 가하여 옐로우 카드를 받아 경고가 누적되자 결승 브라질전에 결장한 것은 선수 본인에게 아쉬움이 컸을 것입니다. 결과론적인 관점이지만, 만약 브라질전에 출전했다면 결승전 경기 양상은 기존 사실과 달랐을 것이며 어쩌면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흔히 발라크하면 '준우승 징크스'로 유명합니다. 유독 준우승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13번의 준우승을 경험했으며 특히 2001/02시즌과 2007/08시즌에는 각각 4번, 5번의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2001/02시즌에는 레버쿠젠에서 분데스리가-DFB 포칼-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비롯 한일 월드컵 준우승, 2007/08시즌에는 첼시에서 프리미어리그-커뮤니티 실드-칼링컵-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유로 2008까지 준우승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도 준우승 커리어가 있지만 2001/02시즌, 2007/08시즌의 잦은 준우승은 팬들에게 강한 뇌리를 심어줬습니다.

물론 발라크는 우승 경험이 있습니다. 4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비롯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3번의 더블 우승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첼시에서는 두 번의 더블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고 올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축구팬 입장에서는 우승 보다는 준우승 커리어에 대한 존재감이 강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월드컵-유로 대회-UEFA 챔피언스리그 같은 메이져 대회 준우승 경력 때문에 '2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독일 축구 내에서는 1인자였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발라크에게 2인자 이미지가 따라붙는 이유는 '축구 황제' 지네딘 지단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발라크는 2001/02시즌 레버쿠젠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지단을 앞세운 레알 마드리드에 밀려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지단은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레버쿠젠의 골망을 흔들며 세계 축구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비록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32강에서 탈락했으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유로 2000 우승의 화려한 커리어가 있었기에 여전히 세계 최정상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단보다 4세가 더 적은 발라크가 핸디캡을 안고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발라크에게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2인자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절호의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지단이 독일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한데다 독일이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전력적인 어려움없이 무난하게 본선 진출 티겟을 따냈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독일이 전통적으로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강인한 집중력과 승리욕에 불타오르는 기질이 넘쳐흘렀고, 발라크가 그동안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월드컵 행보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라크는 지난달 16일 잉글리시 FA컵 결승전 포츠머스전 경기 도중 케빈 프린스 보아텡의 거친 태클에 의해 오른쪽 발목 인대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회복 기간만 최소 8주 걸린다는 진단을 받은 끝에 결국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습니다. 2인자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날라간 셈입니다. 만약 독일의 세계 제패를 이끌었다면 뮐러-베켄바우어-마테우스 같은 월드컵 우승 커리어가 있는 독일 축구의 영웅들과 견줄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을 것이지만 그 시나리오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발라크의 독일 대표팀 커리어는 불의의 부상 때문에 이미 끝났을지 모릅니다. 올해 34세의 노장이기 때문에 유로 2012,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하기에는 체력적인 부침에 시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독일 축구 입장에서도 남아공 월드컵 이후에는 메수트 외질, 마르코 마린 같은 젊고 싱상한 미드필더들을 위주로 세대교체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발라크가 희생양 될 수 있습니다. 올 시즌 첼시에서 기동력 및 체력 저하 조짐을 보였던 만큼, 남아공 월드컵 이후 독일 대표팀에서 입지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월드컵 우승 의욕을 키웠겠지만 현실은 발라크의 마음을 외면했습니다.

불의의 부상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첼시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은 것은 많은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시즌 중반까지 4-4-2의 다이아몬드 체제에서 기동력에 약점을 드러내면서 상대팀에게 공격 기회를 허용하는 아쉬움이 있는데다 올해 34세의 나이가 첼시의 세대교체 의지 때문에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 존 오비 미켈의 부상으로 홀딩맨으로 전환하면서 묵묵히 궂은 역할에 임하여 공격 옵션들의 수비 부담을 줄여 팀의 폭발적 공격 축구를 유도했던 살림꾼 노릇이라면 다음 시즌에도 충분히 통했을 것입니다. 만약 발라크가 없었다면 첼시는 에시엔-미켈 부상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프리미어리그 우승 달성에 실패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첼시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2006/07시즌 프랭크 램퍼드와의 공존 실패가 아쉬웠습니다. 당시 첼시는 발라크-램퍼드가 드록바-셉첸코 투톱의 뒷쪽을 보조하는 4-2-2-2 포메이션을 구사했는데 수 차례의 패스미스 및 연계 플레이 불안으로 팀 공격에 임펙트를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셉첸코와 더불어 2006/07시즌 최악의 영입 리스트에 포함되는 불명예를 비롯 방출설에 시달리는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 이후 절치부심 끝에 미드필더진에 없어선 안 될 옵션으로 꼽혔으나 램퍼드에 비해 수비적인 비중이 많았습니다. 첼시에서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바꿨지만 궂은 역할로 1인자에 도약하기에는 무리함이 있습니다.

발라크는 훗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드필더로 회자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준우승 징크스에 2인자 꼬리표가 달라붙은데다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으로 출전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비운의 스타'로 조명받게 됐습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그토록 원했던 메이져 대회 우승컵을 따내며 1인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만년 2인자도 1인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희망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지 못한 발라크의 비운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