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활약상을 놓고 보면 소리없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대표팀에 없어선 안 될 중원 옵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허정무호의 살림꾼으로서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소화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핵심 자원에 비하면 과소평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일부 축구팬들이 그를 조롱하는 것이 매우 불편합니다.
허정무호는 박지성-박주영-이청용-기성용으로 짜인 '양박쌍용'이 핵심 자원입니다. 하지만 양박쌍용이 존재한다고 해서 허정무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박쌍용이 빛나려면 그들이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헌신하는 선수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골키퍼와 수비수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만, 미드필더진에서도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선수가 필요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김남일이 숨은 MVP 역할을 했던 것 처럼, 지금의 허정무호에서는 김정우(28, 광주)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김정우는 왜소한 체격 때문에 축구팬들에게 '몸싸움이 부족하다', '수비력이 약하다'는 비판과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심지어 '김정우는 체격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세워선 안된다'는 어느 유명 축구 논객의 견해를 아직까지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정우는 축구팬들에게 '뼈정우'라고 불리며 철저하게 과소평가 됐습니다. 프로야구 팬들이 롯데 자이언츠 유격수 박기혁의 왜소한 체격을 이유로 '뼈기혁', '뼈격(박기혁을 줄여서 박격)'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현상 입니다.
김정우에 대한 질타는 체격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상대를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면 '투박하게 경기한다', '카드를 남발한다', '오버한다'는 질타가 쏟아졌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김남일이 주앙 핀투, 프란체스코 토티 같은 당시 세계 최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들을 봉쇄할 때 찬사를 내보내면서 김정우는 김정우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여론의 호의적인 시선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편견에 대한 무서움이 '인생의 축소판' 축구에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체격으로 경기하는 종목이 아닙니다. 김정우와 더불어 왜소한 체격을 지닌 이청용이 투박하고 거칠기로 소문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했던 이유는 '생각하는 플레이'가 고스란히 몸에 베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체격조건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악착같이 몸싸움을 펼치고 상대를 따라붙기 위해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투쟁심을 발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팀 공격 옵션의 침투 공간을 미리 선점하고 커버 플레이를 펼치는 '생각하는 플레이'가 뒷받침 되었고 이것이 허정무호의 살림꾼으로서 맹위를 떨쳤던 비결이 됐습니다.
그동안 K리그를 꾸준히 보셨던 분들이라면 김정우가 수비력이 약하다는 주장을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우는 부평고와 고려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한국판 나카무라'로 주목을 받았으나(당시 외모가 나카무라 슌스케와 비슷했기 때문) 2003년 울산 입단 이후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환했습니다.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서 이상철 수석코치로 부터 스위퍼(3백의 가운데 수비수) 전환을 요구받았을 정도로 수비 능력이 뛰어난 선수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상대 공격을 끊으려는 움직임과 빠른 타이밍의 압박 능력, 튼튼한 수비 밸런스 유지가 좋았던 선수였기 때문이죠.
물론 국가대표팀 초기에는 자신의 수비력이 최대화되지 못했습니다. 공격 임무에 초점을 맞추면서 수비에 힘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박스 투 박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수 양면에서 팀의 밸런스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중원에서 겉돌다 보니 대표팀에서의 입지 강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베어벡호에서는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아 팀 공격을 지휘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자신의 공격력을 최대화 시키겠다는 베어벡 감독의 계산이었지만 좌천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성용과 중원에서 호흡을 맞추고 그 조합이 허정무호에서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조용했던 잠재력이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중원에서의 지구력이 향상되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펼칠 수 있었고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상대 공격을 봉쇄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국제 경기를 치렀던 경험에 소속팀 성남에서 주장을 맡았던 리더십까지 겸비하면서 경기력의 퀄리티가 향상되었고 기성용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이러한 '소리없는 발전'은 한때 졸전을 거듭했던 허정무호의 경기력을 업그레이드했고 이제는 김정우의 존재감에 힘입어 월드컵 16강 도전에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투쟁적인 컨셉이 강한 김남일-조원희가 기성용의 파트너로 적합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들 못지 않게 김정우도 투쟁적이고 수비력이 출중합니다. 물론 레드 카드가 아쉽지만, 역의 관점에서 투쟁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임을 짐작케 합니다. 더욱이 김남일은 2000년대 중반의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활동량이 떨어졌으며(허정무호의 4-4-2에서 중용되지 않는 이유) 조원희는 예비 엔트리 26인에서 제외 됐습니다. 단지, 김정우의 왜소한 체격과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투쟁력과 수비력이 과소평가 되었을 뿐입니다.
또한 기성용은 지금쯤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과 상대하는 팀들에게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게 파악되었을 것입니다. 패스를 끄는 안좋은 습관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상대팀들은 월드컵 본선에서 기성용 봉쇄에 주력하여 한국의 숨통을 끊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김정우가 있습니다. 기성용을 통한 공격이 풀리지 않으면 김정우가 그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특유의 송곳같은 스루패스와 전진패스로 공격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김정우의 스루패스와 전진패스는 국내에서 톱클래스이며 그동안 국제 경기에서(정확히는 허정무호 출범 이전) 많은 재미를 봤기 때문입니다.
허정무호가 지난 3월 3일 코트디부아르전, 올해 두 번의 일본전 같은 빅 매치에서 매끄러운 경기 운영 끝에 승리했던 원인은 상대와의 허리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김정우가 있었습니다. 홀딩맨으로서 상대 공격 방어선 역할을 묵묵히 소화했고 공격 연결도 척척 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정우는 허정무호에서 박지성처럼 믿음직한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페이스라면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뛸 것임에 틀림 없으며,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에 큰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