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스태프가) 빠른 움직임과 패스를 통해 잠비아 수비 뒷 공간을 노리는 플레이를 펼치라고 주문했다"
한국 대표팀 왼쪽 미드필더 염기훈이 잠비아와의 경기 하루 전 국내 취재진과의 공식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잠비아전 승리를 위해 상대 수비 뒷 공간을 노리며 골을 넣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죠. 잠비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팀들이 수비 뒷 공간을 쉽게 허용하는 문제점을 노리겠다는 것이 허정무 감독의 심산 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한국의 뜻대로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국이 잠비아에게 역으로 간파 당했기 때문입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2010년 새해 첫 A매치에서 잠비아에게 대량 실점을 허용당하고 무너졌습니다. 한국은 9일 오후 11시 30분(이하 한국시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란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잠비아와의 평가전에서 2-4로 패했습니다. 전반 6분 카통고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뒤 전반 14분과 후반 13분, 28분에 실점을 헌납하는 수비 불안으로 무너졌습니다. 전반 35분에는 염기훈의 프리킥 과정에서 김정우가 리바운드 골, 후반 38분에는 구자철이 드롭골을 성공시켰으나 스코어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 이었습니다.
한국은 경기 초반부터 해발고도 1753m 고지대 및 폭우로 젖은 그라운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임과 컨디션이 평소답지 못했고 볼 처리도 미숙했습니다. 하지만 잠비아전 패배를 고지대 때문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전술적인 관점의 시각에서 바라볼때, 허정무호는 축구에서 중요한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기를 치르는 실책을 범했습니다. 바로 중원이었습니다.
중원의 불안한 수비, 잠비아전 패배의 원인
평가전은 경기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을 꿈꾸는 한국으로서는 잠비아전에서 결과보다 목표를 향한 과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국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신화를 달성하던 그 해 1월 골드컵에서도 무기력한 경기를 거듭했으나 조직력 향상에 주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과정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잠비아전에서 패했다고 해서 월드컵 16강 가능성이 부족하다는 비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섣부릅니다.
우선, 경기장에 위치한 요하네스버그의 해발고도는 1753m입니다. 남한에서 최고로 높은 한라산의 1950m보다 197m 낮은 곳에서 경기가 열렸으니 저지대에서의 경기에 익숙했던 선수들이 고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경기 하루전에 천둥 번개가 치는 비가 내리면서 그라운드 상태가 미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경기 초반 선수들의 드리블 돌파 및 볼 처리가 평소와 달리 부드럽지 못했습니다. 특히 최철순은 전반 1분 공을 잡으려는 과정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상황을 연출하며 마음처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선수들은 평소보다 몸이 덜 올라온 상태에 낯선 환경에서 경기를 치렀습니다. 여기에 이정수를 제외한 해외파들이 소속팀 사정으로 남아공 전지훈련에 빠지면서 선수들이 유기적인 호흡을 가다듬지 못했고 팀으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경기 초반 극심히 부진한 경기를 펼친 것도 이 때문 이었습니다. 문제는 경기 초반이 너무 실망스러웠다는 점입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평소답지 못한 것은 예견된 일이었으나 전반 10분 점유율에서 21-79(%)로 크게 밀렸고 전반 14분에 두 골을 내주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수비가 문제였습니다. 전반 4분 김두현이 아크 오른쪽 바깥에서 상대에게 크로스를 내준 상황에서 이정수가 잠비아 공격수의 문전 슈팅 공간을 허용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6분에는 중원에서 카통고의 전방 돌파를 가까이에 있던 한국 선수 세 명이 막지 못하면서 슈팅 기회를 내줬습니다. 이것은 카통고의 중거리 선제골로 연결되어 한국이 이른 시간에 실점했습니다. 14분에는 중원에서의 볼 키핑 미숙으로 상대에게 커팅을 허용당해 추가 실점을 헌납하는 상황을 초리했습니다.
한국의 수비 불안은 중원에서의 밸런스 붕괴가 결정적 원인 이었습니다. 김정우-김재성으로 짜인 중앙 미드필더 조합이 상대의 중앙 공격 과정에서 뒷 공간을 공략당하는 패스를 여러차례 헌납했고 동료 선수들과의 간격 유지도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두 선수 사이에서 공을 받고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안정적으로 볼을 관리하지 못해 상대에게 잇따른 커팅을 허용한 것이 경기 초반의 부진 및 실점을 키웠습니다. 이러한 중앙 미드필더들의 불안한 수비 밸런스는 포백의 경기 집중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점유율에서 많이 밀리는 불안함이 가중 됐습니다.
허정무호의 경기력이 올라왔던 후반 13분 세 번째 실점 과정도 아쉬웠습니다. 실점 이전까지 점유율을 46-54로 끌어올려 평소의 움직임을 회복했고 공격적인 경기를 펼쳤으나 문제는 상대의 빠른 역습을 예상치 못했습니다. 중앙 미드필더를 비롯한 후방 옵션들이 너무 윗쪽에 포진했고 상대 역습을 막을 수 있는 길목을 미리 차단하지 못한것이 아쉬웠습니다. 조용형-강민수로 짜인 센터백 두 명은 한국의 문전으로 치고드는 차망가의 움직임보다 공에 시선을 맞추면서 상대 공격수의 마크를 놓쳤고 결국 실점을 헌납했습니다. 골을 위해 시종일관 공격적인 경기를 펼쳤던 한국이 수비 불안에 발목 잡혀 한 순간에 자멸한 장면 이었습니다.
후반 28분 네번째 실점은 페널티킥을 허용한 과정이 문제였습니다. 잠비아 공격수들이 한국 문전 좁은 공간에서 공격 기회를 살리는 과정에서 조용형이 무리한 수비 동작으로 파울을 범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문전에서 과도한 동작으로 파울을 범했던 것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물론 문전은 상대에게 실점을 허용하기 쉬운 공간임에 틀림없으나 페널티킥을 내줬다는 것은 수비 운영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페널티킥 허용 과정에서 한국 포백의 수비 밸런스가 흔들린 것도 아쉽지만 조용형이 유연하게 커팅하거나 상대 선수 정면에서 슈팅을 걷어내는 플레이에 대비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만약 한국이 전반 중반에 김두현을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이날 경기에서 무수한 실점을 허용당했을 것입니다. 김정우-김재성 조합은 사실상 실패작이었고 이를 인지한 허정무 감독이 전반 중반에 김두현과 김재성의 위치를 바꾸면서 한국의 경기력이 회복되고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김두현은 상대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을 잘 쫓아왔고 침투 공간을 미리 선점하여 공격을 막는데 주력했습니다. 공격에서는 안정된 볼 키핑과 동료 선수의 전방 침투를 돕는 공간 패스, 부지런한 움직임을 앞세워 중원에서 공격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런 김두현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기력이 살아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김두현과 더불어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선수가 바로 구자철입니다. 구자철은 후반 38분 문전 정면에서 김보경의 크로스를 받아 오른발로 과감한 드롭슛을 날리며 추격골을 넣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국의 패배가 역력한 상황에서 자신의 한 방으로 직접 골망을 흔들며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될 수 있는 임펙트를 강렬하게 심었습니다. 여기에 동료 선수에게 활발하고 정확한 패스를 연결하고 상대 미드필더 뒷 공간을 파고드는 패스를 앞세워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은 향후 허정무호 공격에 적지 않은 전력 플러스 효과가 벌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래서 한국은 잠비아전 2-4 패배를 통해서 고지대와 아프리카팀의 경기력에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뽑아야 할 선수와 폼이 떨어진 선수를 가려내며 스쿼드 경쟁의 치열함을 유도했습니다. 잠비아전 패배가 아쉬운 것은 사실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확실한 체질 개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무엇보다 이날 경기에서는 중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경기 초반부터 고지대와 젖은 그라운드 때문에 경기력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중원에서 상대에게 공격을 쉽게 허용당하지 않았다면 대량 실점을 면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축구에서 중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정우-김재성 조합의 실패 속에서도 김두현과 구자철이 중원에서 제 몫을 하며 한국의 경기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중원의 중요성이 크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고지대 적응도 좋지만, 잠비아전 패배를 통해 중원의 역량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