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축구팬들은 '무재배'라는 단어를 즐겨 씁니다. 무재배는 무승부가 많이 나오는 팀을 의미하며 무승부의 첫 글자인 무(無)가 채소의 무에서 기인한 일종의 언어유희 입니다. 그래서 축구팬들은 특정팀이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면 '그 팀은 무재배 했다'는 말을 즐겨 쓰며 스포츠 언론의 축구 기사에서도 무재배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허정무 한국 대표팀 감독은 전남 감독 시절 무승부가 많다는 이유로 팬들로 부터 '무재배 감독'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그런데 올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던 첼시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시즌 초반부터 지금까지 줄곧 1위를 유지하며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4연패를 저지할 대항마로 떠올랐습니다. 현재 맨유를 승점 5점 차이로 따돌리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리그 우승의 꿈이 현실적인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첼시의 최근 행보를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있습니다. 첼시가 최근 7경기에서 1승5무1패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일 칼링컵 8강전 블랙번전 3-3 무승부(승부차기 패)를 시작으로 26일 버밍엄 시티전 0-0 무승부에 이르기까지 7경기에서 단 한 경기만 승리했으며 그 경기가 바로 최하위팀인 포츠머스전 2-1 승리였습니다. 7경기 중에서 5경기 비겼으니 '무재배' 팀이 된 것입니다.
첼시는 최근 7경기 중에 프리미어리그 5경기에서는 1승3무1패를 기록해 승점 3점을 꾸준히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맨유가 지난 13일 아스톤 빌라전과 20일 풀럼전에서 패했음을 상기하면 2위와의 승점을 대폭 벌릴 수 있는 기회 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최근의 내림세가 완벽한 독주 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결과로 이어진 것이죠. 만약 맨유가 아스톤 빌라전과 풀럼전에서 승리했다면 첼시는 지금쯤 2위로 추락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첼시의 무재배 원인은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전술이 상대팀에게 완전히 읽혔기 때문입니다. 첼시는 다이아몬드 미드필더 배치 효과로 시즌 초반 다득점을 올렸으나 지난 9일 맨유전을 기점으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오른쪽 미드필더인 미하엘 발라크가 상대팀의 거센 압박을 받아 기동력이 저하되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던 데쿠와 조 콜까지도 최상의 폼을 발휘하지 못해 공격 루트가 단순해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지금도 다이아몬드 전술을 고집하며 상대팀에게 읽히는 공격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26일 버밍엄 시티전에서도 말루다-벨레티를 좌우 미드필더로 놓고 프랭크 램퍼드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린 다이아몬드 시스템을 썼으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버밍엄 시티의 좌우 윙어인 맥파든-라르손이 포백과의 거리를 좁혀 첼시의 측면 공격을 봉쇄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루다와 벨레티는 중원과 최전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였음에도 상대의 수비 숫자 우세로 공간 창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스루패스와 로빙패스 위주의 공격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첼시의 공격력 부족은 램퍼드도 막지 못했습니다. 램퍼드는 상대팀의 중앙 미드필더인 보이어-퍼거슨의 끈질긴 견제를 받아 좁은 공간에서 동료 선수들에게 패스해야 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두꺼운 압박을 극복할 수 있는 과감한 패스가 부족했고 이는 스터리지-드록바 투톱이 최전방에 발이 묶인 원인이 됐습니다. 여기에 드록바는 문전에서 공을 잡을때 마다 최소 3명의 압박을 받아 힘든 경기를 펼친 끝에 21개의 패스 중에서 10개의 미스를 범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첼시가 전술을 변화하는 유연함이 있었다면 이 같은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다이아몬드 전술을 지금도 쓰고 있으며 이것이 상대팀에게 읽히는 원인이 됐습니다. 지난 8일 아포엘전에서는 4-2-3-1 포메이션을 구사하여 전술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평소보다 공격의 짜임새 및 마무리가 떨어지면서 27개의 슈팅 중에 유효 슈팅이 5개에 불과한 허점을 남겼습니다. 그러더니 다이아몬드를 다시 구사하여 전력 오름세 효과를 노렸으나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니콜라 아넬카의 부상은 첼시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줬습니다. 아넬카는 드록바의 문전 침투를 돕기 위해 상대 수비진의 압박을 분산시키는 역할에서 강점을 발휘했던 선수입니다. 그래서 드록바가 다득점을 기록했고 이것은 첼시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됐습니다. 그러나 버밍엄 시티전에서 아넬카가 빠지면서 그의 공백을 메웠던 스터리지가 상대의 압박에 고전을 면치 못해 드록바가 최전방에서 고립 됐습니다. 스터리지-드록바 투톱 사이에서 연결되는 패스도 부족해 상대의 문전 압박을 뚫을만한 공격 루트를 찾지 못했습니다. 스터리지-드록바 투톱은 실패작 이었습니다.
수비도 문제입니다. 버밍엄 시티전 이전까지의 최근 6경기에서는 총 12실점을 허용했고 6경기 모두 실점했습니다. 지난달 5경기 중에 4경기에서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음을 상기하면 6경기 12실점의 기록은 매끄럽지 못한 행보입니다. 포백의 집중력과 미드필더진의 수비 밸런스가 시즌 초반보다 끈끈함이 떨어진 것이 그 원인 입니다. 그래서 첼시는 이겨야 할 경기에서 수비 불안에 발목 잡혀 이기지 못하는 아쉬움을 반복했습니다.
문제는 첼시의 무재배 및 내림세가 앞으로 계속 반복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아넬카는 부상 장기화 절차를 밟고 있고 드록바-칼루 같은 아프리카 출신 공격수를 네이션스컵에 차출하면서 당분간 No.1~No.3 공격수 없이 시즌을 보내야 합니다. 여기에 첼시는 새로운 공격수 영입을 포기하면서 스터리지-보리니 같은 영건 공격수들의 맹활약을 기대해야 합니다. 두 명의 영건 공격수가 주전 공격수 복귀 전까지 맹활약을 펼칠지 의문이나 공격의 무게감이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에시엔-미켈까지 네이션스컵에 차출되면서 미드필더진의 전력 약화도 불가피 합니다.
만약 첼시가 박싱데이마저 고비를 넘지 못하면 지금까지 리그 1위를 기록했던 기세가 무너질 것입니다. 첼시는 26일 버밍엄 시티 원정에서 득점 없이 0-0으로 경기를 마쳤고 28일 홈에서 열리는 풀럼전에서도 고비를 넘지 못하면 리그 1위 수성에 비상불이 켜집니다. 만약 맨유가 28일 헐 시티전과 31일 위건전을 모두 승리하면 첼시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리그 1위를 지켰으나 최근 7경기에서 5경기를 비기는 무재배로 어려움에 빠진 안첼로티 감독의 승부사 기질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