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에게 있어 1997년의 기억은 달콤합니다. 일본 도쿄 요요기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극적인 2-1 역전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게는 악몽같은 추억이지만, 한국 축구는 지금까지 '도쿄대첩'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일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중국과의 동아시아축구 선수권대회 경기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패배중에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중국을 상대로 약 32년 동안 27경기 연속 무패(16승 11무)를 기록했으나 이번 경기에서 0-3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그동안 한국 축구의 한 수 아래의 상대로 평가 받았고, 독일 월드컵과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 완패가 씁쓸합니다. 한국 축구가 13년 전 일본전에서 '도쿄 대첩'을 거두었다면 이번 중국전에서는 '도쿄 대참사'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것도 도쿄에서 말입니다.
선수들의 실패 : 투쟁 정신이 보이지 않았다
골 횟수를 제외한 경기 기록만을 놓고 보면 한국의 우세가 두드러집니다. 한국은 중국과의 슈팅 숫자에서 22-7(유효 슈팅 6-5), 점유율 68-32(%), 패스 성공률 78-67(%), 패스 횟수 506-277(개)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0-3 패배였고 그 외에 골을 내줄 뻔한 장면도 2~3번이나 있었습니다. 선 수비 후 역습 전략을 들고 나온 중국의 일격에 여러차례 허무하게 무너졌고 90분 내내 단조로운 공격 루트와 허술한 압박을 일관하는 졸전을 범했습니다. 중국전 승리 의지가 경기력으로 표현되지 않았던 '의지박약'의 경기였습니다.
중국전 패배는 한 마디로 이해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중국에게 패한 것은 둘째치고, 한국 선수들이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전반 4분 부터 실점을 헌납했다면 상대보다 더 부지런하게 뛰고 타이트하게 압박할 수 있는 경기를 펼쳐야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지만, 태극 전사들에게 이러한 투쟁 정신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후반전에 투입된 이승렬과 노병준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며 나름 고군분투했지만, 문제는 나머지 선수들의 분발이 미약했습니다.
심리적으로도 한국이 쫓겼습니다. 전반 4분 이른 시간에 위 하이에게 선제골을 내주면서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것이죠. 지난 홍콩전에서 5-0 대승을 거두었던 여파 때문인지, 한국 선수들은 경기 초반부터 가벼운 자세를 보였지만 중국의 역습 한 방에 의해 실점을 허용한 이후부터 잔뜩 움츠린 경기력을 일관했습니다. 전반 27분 가오린에게 추가골을 허용한 이후에는 공격 템포가 점점 느려졌고 수비 밸런스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후반 15분 덩 주오샹에게 세번째 골을 실점한 이후 부터는 우리 선수들의 기가 완전히 꺾였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졸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반 4분 선제골 실점은 의지박약의 대표적인 장면 이었습니다. 취보가 오른쪽 측면에서 크로스를 날려 위 하이의 헤딩 선제골을 엮어냈는데, 취보를 마크했던 김정우가 크로스 기회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상대의 돌파를 막아내 커팅을 시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김정우는 취보를 따라붙는 순간에 어슬렁대더니 크로스를 허용합니다. 이운재를 비롯한 한국 수비수들은 김정우의 느슨한 마크에 속으면서 상대의 크로스에 어리둥절했고, 그 틈을 노린 위 하이가 선제골을 넣었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안이한 경기 운영을 펼쳤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한국은 중국보다 수많은 공격 기회를 얻었고 상대보다 3배 더 많은 슈팅을 날렸습니다. 문제는 밀집 수비에 대처하는 한국 선수들의 공격 전개 부족 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8백'이나 다름 없는 중국 수비진을 뚫으려면 상대 수비를 한꺼풀씩 벗겨내려는 조직적인 공격 전개를 통해 골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원투패스나 2대1 패스, 빠른 타이밍에 의한 패스 전개를 하지 못했고 공격 과정에서 호흡까지 맞지 못했습니다. 중앙쪽에 의존하고 타이밍이 느렸던 단조로운 공격 패턴을 일관한 것을 비롯 롱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허정무 감독의 실패 : 무리한 선수 실험 및 포지션 전환
선수들의 경기력도 문제였지만, 중국전에 임하는 허정무호의 기본 전략은 졸전을 부추겼습니다. 한국은 중국전에서 다소 모험이 짙은 선수 선발을 했습니다. 김두현과 오장은을 4-4-2의 좌우 미드필더에 배치했는데 두 선수는 엄연히 중앙 미드필더입니다. 김두현은 수원과 웨스트 브롬위치에서 측면을 많은 경험이 즐비하지만 오장은의 측면 기용은 K리그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 입니다. 그 결과는 미드필더가 중앙 위주의 공격 패턴을 나타내면서 상대 수비에 읽히는 시나리오로 이어졌습니다. 대표팀 허리진을 맡는 4명 모두 중앙 미드필더였기 때문이죠.
이정수는 그동안 대표팀에서 센터백과 오른쪽 풀백을 맡았으나 중국전에서 왼쪽 풀백으로 선발 출전 했습니다. K리그 시절에 주로 오른쪽에서 뛰었던 경험이 많았을 만큼 왼쪽 자리가 생소합니다. 그런 이정수의 왼쪽 포진은 다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대표팀에서 수비 집중력 부족으로 고비 때마다 실점 기회를 허용했던 불안함이 있었지만 풀백보다는 센터백으로서 경쟁력이 높았습니다. 곽태휘를 검증하기 위해 풀백으로 이동했지만, 오른쪽에서 오범석에 밀려 왼쪽으로 내려간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전반 15분 부상으로 교체되었으니, 왼쪽 풀백 전환은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김두현-오장은-이정수의 포지션 전환은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가치를 시험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허정무 감독의 전술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멀티 플레이어의 가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수 역량에 맞지 않는 포지션 전환은 무의미합니다. 한때 허정무호의 슈퍼 서브로 꼽혔던 김치우의 대표팀 탈락 원인이 잦은 포지션 전환에 따른 경기력 저하였던 것 처럼, 세 선수의 포지션 전환 실험은 다소 무모했고 중국전에서 위기를 자초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대표팀 경기에 선발로 꾸준히 출전하지 못했던 곽태휘-이근호-김두현의 선발 기용도 문제였습니다. 세 선수가 선발을 맡으면서 기존 선수들과의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이 역력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패스 미스(전반 27분 곽태휘의 부정확한 패스가 가오린에게 걸려 추가골 허용) 및 비효율적인 연계 플레이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곽태휘의 패스미스는 너무나 뼈아팠고 김두현은 상대 밀집수비를 공략하기 위해 동료 선수들과 협력하는 자세가 다소 소극적 이었습니다. 이근호는 최전방에서 중앙 미드필더들의 전방 패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미리 선점하지 못해 상대 수비수들에게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부상으로 신음했던 곽태휘와 이근호의 선발 기용은 허정무 감독의 무리수 였습니다. 곽태휘는 2년 전 중국을 상대로 역전골을 넣은 경험을 비롯 빠른 발과 높이가 있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폼이 떨어졌습니다. 이근호는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지난해 허정무호에서의 거듭된 부진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더욱이 두 선수는 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상의 폼을 발휘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허정무 감독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선수를 실험한 댓가를 혹독히 치르고 말았습니다.
상대팀의 빠른 역습에 취약한 허정무호
가오홍보 중국 대표팀 감독의 경기 종료 후 공식 기자회견 인터뷰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은 수비적인 부분에서 개선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이 32년 동안 중국에게 패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러한 지적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0-3으로 패배하면서 적장의 평가에 수긍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아닌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봐도 가오홍보 감독의 평가는 맞는 말입니다.(더욱 놀라운 것은, 가오홍보 감독의 나이가 44세이며, 앞으로 한국 축구를 괴롭힐 존재로 부각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에 3골 허용한 수비진을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그대로 봐야 합니다.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 발표 이전까지 A매치가 앞으로 두 번(일본전, 코트디부아르전) 남았기 때문에, 새로운 수비수를 테스트 할 기회가 적습니다. 수비수가 개인 실력보다 조합끼리의 조직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월드컵 본선 이전의 A매치는 기존 수비수들이 조직력을 다지기 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기존 수비수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수비수들을 등용할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조용형과 곽태휘, 이정수, 강민수는 허정무 감독이 끝까지 안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14일 한일전이 고비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지난달 잠비아를 상대로 2-4로 패했던 경기와 이번 중국전의 공통점은 한국이 상대의 빠른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수비가 상대팀에게 뒷 공간을 자주 간파당하는 것을 비롯 수비 집중력 부족, 미드필더와 수비수와의 지속적이지 못한 압박이 상대의 역습에 취약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약점을 그리스-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가 간파하면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 과정이 험난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리스는 선 수비 후 역습을 기반으로 하며 아르헨티나도 빠른 역습에 능합니다.
이제 허정무 감독에게는 월드컵 본선까지 4개월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4개월을 충실하게 보내면 월드컵 16강 진출을 비롯 2002년에 이어 세계 축구를 깜짝 놀래킬 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지만 4개월을 헛되이 보내면 본선 탈락이라는 허무한 결과를 남길 것입니다. 특히 중국전 0-3 패배는 16강을 노리는 한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중국전처럼 안이하게 경기하면 월드컵 본선에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전을 통해 지금의 문제점을 되짚어 전술적인 보완을 키우고 용병술을 강화하는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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