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경기 연속 0골'
한때 '허정무호의 황태자'로 각광 받았던 이근호(25, 주빌로 이와타)의 최근 대표팀 기록입니다. 지난해 4월 1일 북한전부터 지난 3일 코트디부아르전까지 1년 동안 A매치 12경기에 출전했으나 무득점에 그쳤습니다. 지난 2008년 10월 11일 우즈베키스탄전 부터 지난해 3월 28일 이라크전까지 A매치 8경기에서 7골을 넣으며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골잡이로 거듭났던 전적을 떠올리면 12경기 연속 무득점이 씁쓸한 이유입니다.
지난 3일 코트디부아르전은 이근호의 부진이 두드러졌던 경기 였습니다.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상대 수비진을 교란하기 위해 빠른 움직임을 발휘한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상대 수비가 돌파 공간을 좁혀 견제하는 시점 부터는 방향 전환을 잃으며 대표팀의 공격 템포가 끊어지는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근호쪽으로 통하는 공격 패턴은 상대 수비의 압박에 막혀 이렇다할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최전방에서 골을 못넣는 것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는 상대 수비 제압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근호가 남아공 월드컵 23인 최종 엔트리를 안심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내보냅니다. 맞는 말입니다. 공격수로서 12경기 연속 무득점에 그친 행보 자체가 여론의 비판을 받을 만 합니다. 지난해 11월 18일 세르비아전에서 후반전에 왼쪽 윙어로 투입한 것을 제외하면 원톱 또는 투톱 공격수로 모습을 내밀었던 만큼 골 부진이 심각합니다. 골 뿐만이 아닙니다. 경기 내용에서도 뚜렷한 개선점을 찾지 못했고 그런 모습이 A매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이근호-박주영-이동국-안정환이 23인 최종 엔트리에 포함 될 가능성이 큽니다. 노병준은 이미 대표팀에서 탈락했고 이승렬은 일본전 역전골 이외에는 대표팀 공헌도가 미약한데다 강렬한 임펙트와 마무리 능력이 부족한 문제점이 있어 탈락이 유력합니다. 설기현이 변수가 될 수 있으나 포항에서 원래의 폼을 되찾지 못하면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출전은 물거품입니다. 문제는 12경기 연속 무득점에 시달린 이근호가 남아공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공격수 자원이 취약함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근호의 골 침묵은 선수 본인의 역량에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공격수가 어떤 상황에서든 골을 넣지 못한다는 것은 공격수의 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소속팀에서 거침없는 골 감각을 발휘했던 그가 대표팀에서 12번 연속으로 고개를 숙였다는 점은 개인 역량의 문제가 아닌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이근호가 태극전사의 될성부른 떡잎으로 주목받던 시절, 2008년 10월 11일 우즈베키스탄전 부터 지난해 3월 28일 이라크전까지 A매치 8경기에서 7골을 넣었던 과거, 지난해 4월 1일 북한전부터 지난 3일 코트디부아르전까지의 포지션 및 투톱 파트너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대표팀의 새내기였을 시절에는 측면 옵션이었고, 다득점을 넣었던 시절에는 정성훈과 함께 투톱을 맡았고, 북한전 이후에는 박주영 또는 이동국과 함께 투톱으로 배치 됐습니다.
이근호가 대표팀에서 맹활약을 펼쳤을 시절에는 정성훈이라는 190cm 신장의 타겟맨이 있었습니다. 이근호는 정성훈이 최전방에서 강력한 포스트 플레이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며 여러차례 상대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과거 잉글랜드 대표팀의 투톱이었던 오언(이근호)-헤스키(정성훈)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정성훈이 포스트 플레이를 하고 이근호가 최전방에서의 빠른 스피드로 골을 넣는 패턴이 허정무호에서 재미를 봤습니다.
하지만 이근호는 정성훈이 부상으로 낙마한 이후부터 삐끗하기 시작합니다. 지난해 북한전에서 박주영과 투톱을 맡은 이후부터 볼 터치 횟수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박주영이 미드필더진으로 내려가 트라이앵글 형태의 공격 패턴을 만들며 후방 옵션들에게 많은 지원을 받는 타입이라면, 이근호는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수의 시선을 오른쪽 측면으로 돌리며 중앙으로 치고드는 타입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선수의 활동 공간이 겹치면서 볼 터치가 박주영쪽으로 쏠리다보니, 이근호의 득점력이 반감돠는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 패턴이 박주영쪽으로 쏠리면서 이근호가 활용되지 못하는 공격 불균형이 벌어집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습니다. 상대 수비수의 위치를 교란하는 역할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문제는 상대팀의 거센 압박을 받으면 특유의 빠른 발이 금새 무뎌지고 맙니다. 물론 현란한 기술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이라도 상대 수비의 철저한 압박을 받으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압박을 극복하려면 동료 선수와의 활발한 연계 플레이를 통해 상대 수비를 한꺼풀씩 벗겨내며 공간을 노리는 플레이가 연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근호는 연계 플레이마저 소극적인 모습을 나타냈고, 패스가 맥없이 끊깁니다. 최전방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돌파가 안될 뿐더러 기본적인 공격력까지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근호가 정성훈과 공존하던 시절에는 파트너의 강력한 포스트 플레이에 고전하던 상대팀의 느슨한 견제를 통해 최전방에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골도 잘 넣었습니다. 하지만 부상으로 부침에 시달렸던 정성훈이 허정무호에 합류할 가능성은 0%이며, 박주영과 이동국은 정성훈과 달리 미드필더 지역으로 내려가 트라이앵글을 엮어내는 활동 패턴을 나타냅니다. 물론 정성훈과의 공존을 통해 다득점의 재미를 봤지만, 정성훈은 오래전에 부상으로 낙마한데다 대표팀 무득점으로 번번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정성훈과의 빅앤스몰 투톱 체제가 공격 패턴이 단조로워지는 문제점이 있음을 상기하면 톱클래스 팀들에게 고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이근호가 무명 시절을 이겨내고 대표팀에서 두각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은 윙어로서의 역량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3년 전 핌 베어벡 감독이 올림픽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당시에 4-4-2의 왼쪽 윙어를 맡아 빠른 발을 활용한 폭발적인 공격력과 득점 능력까지 갖춰 대표팀 공격의 활력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부평고 시절에는 공격수로서 박주영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전도유망한 선수였으나, 그 이후 K리그에서는 공격수가 아닌 측면 옵션으로서의 능력이 단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근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박주영과 투톱 공격수를 맡으면서 '윙어 이근호' 만큼의 공격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허정무호에서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들이 2년 전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무기력한 행보 끝에 8강 진출에 실패했던 원인은 측면에서 최전방으로 보직 변경하면서 상대 수비수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이근호의 공격력 이었습니다. 문제는 올림픽대표팀에서 박주영과 투톱 공격수를 맡았던 패턴이 허정무호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부진 이었습니다.
물론 이근호는 친정팀 대구에서 3-4-1-2의 투톱 공격수로 뛰었습니다. 에닝요가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고 장남석이 자신의 투톱 파트너로 뛰었죠. 하지만 세 선수는 프리롤 형태의 공격 움직임을 취하며 부지런히 측면과 중앙을 번갈아 갔습니다. 돌파 형태의 공격력을 강점으로 삼았던 이근호의 진가는 동료 선수들의 프리롤 효과 속에 다득점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4-4-2를 쓰는 허정무호에서 프리롤 공격을 도맡는 선수는 측면 미드필더인 박지성과 이청용이며 고정된 형태의 공격 역할을 맡는 선수는 이근호입니다. 이것은 이근호가 허정무호에서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근호의 대표팀 부진 원인은 포지션 전환 실패로 요약됩니다. 중앙이 측면보다 압박의 세기가 두껍고 공격수들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특성을 상기하면, 측면에서 빈 공간쪽으로 빠르게 질주했던 이근호는 최전방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성훈이라는 단짝과 함께 맹활약을 펼쳤던 시절이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허정무호에서 정성훈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측면에서 박지성과 이청용이 자리를 굳혔고 김보경과 감재성이 백업으로 활용되는 현 시점에서, 이근호는 허정무호의 최전방과 윙어 사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