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어느 리그든 특정 팀이 오랫동안 독주를 달리는 판세는 흥행적 관점에서 반가운 현상이 아닙니다. 여러 팀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얼음 같은 경쟁을 펼쳐야 대중들의 주목을 끌기가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K리그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디어 입장에서도 여러가지 소재의 뉴스 보도를 전하며 여론에 K리그를 알리고 더 나아가 흥행을 주도할 수 있죠.

지난해 제주의 돌풍이 대표적입니다. 2009시즌 14위의 성적을 2위로 끌어올렸죠. 그 해 10월까지 K리그 선두를 달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비록 챔피언결정전에서 K리그 우승에 실패했지만, 챔피언 FC서울 못지 않게 여론의 찬사를 받으며 행복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상위권과 이렇다할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14위에서 2위에 도약한 것 자체만으로 박수 받을 일입니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제외한 유럽 빅 리그에서 매우 드문 현상이죠. K리그는 상위권이 강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을 굳게 잡으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제주가 축구팬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만년 하위권'으로 불렸던 대전이 K리그 선두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지난 3일 강원 원정에서 3-0 완승을 거두면서 K리그 1위(3승1무)에 진입했습니다. 아직 26경기가 남았지만, 그동안 하위권 이미지가 강했던 팀이 1위에 이름을 올린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대전이 지난달에 이겼던 울산, 경남은 지난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팀입니다. 지난달 12일 '디펜딩 챔피언' 서울전에서는 1-1 무승부를 기록했죠. 지난해 5승7무16패로 13위에 머물렀던 팀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대전의 돌풍 원인은 실리축구, 김성준 발굴, 박은호 효과로 요약됩니다. 왕선재 감독은 공격축구를 선호하는 지도자였지만 대전의 열악한 스쿼드에 접목하는데 한계를 실감하며 선 수비-후 역습 전술로 변신했습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무명임에도 하나로 똘똘 뭉치면서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는 승리욕을 발휘하며 실점 줄이기에 성공했습니다.(4경기 2실점) 중원에서는 김성준이 홀딩맨으로서 구김살 없는 활약을 펼치며 팀의 수비 조직력 향상에 기여했죠. 그리고 박은호는 강력한 프리킥 및 날카로운 슈팅을 앞세워 상대 골문을 흔들기에 바빴습니다. 4경기에서 4골을 터뜨리며 대전의 간판 공격수로 도약했습니다.

물론 대전의 오름세가 반짝일지, 아니면 시즌 끝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자의 예는 2009시즌 초반에 1위를 달렸던 광주 상무(현 상주)이며, 후자의 예는 앞에서 언급했던 제주입니다. 대전은 엷은 선수층 및 스타 플레이어 부족 때문에 시즌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선수들이 팀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무더운 여름에는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경기력에 기복이 나타날 여지가 존재하죠. 마라톤 레이스에 비유하면, 대전은 초반부터 상대팀들을 추월했습니다.

그러나 대전이 시즌 초반에 기대 이상 성과를 올린 것 자체만으로 축구팬들에게 신선한 이슈를 던져준 것은 분명합니다. 시즌전에는 서울-수원 같은 빅 클럽들이 'K리그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이름아래 여론의 엄청난 주목을 끌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전이 두 팀을 앞서고 있습니다. 만약 서울-수원이 레이스 시작부터 K리그 선두 경쟁을 펼치는 관계였다면 부정적 관점에서는 '뻔하다', '식상하다'는 반응이 나왔을지 모를 일입니다. 강팀은 강팀에 맞는 성적이 어울리지만,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가 의외로 선전하면 강팀이 자극받으면서 순위 싸움이 가열 될 것이고 축구팬 입장에서 재미난 일들을 만끽할 수 있죠.

대전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축구 특별시' 입니다. K리그 6위 돌풍을 일으켰던 2003년 평균 관중 1위(1만 9.082명)를 기록하며 '퍼플 아레나(대전 월드컵 경기장)'를 중심으로 대전팬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 이후부터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서 평균 관중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올 시즌 초반에는 1위를 기록하면서 '쾌청한 봄철 날씨와 맞물려' 많은 홈팬들의 운집이 예상됩니다. 컵대회까지 포함하면 5월까지 7번의 홈 경기를 치르며 팬들의 열띤 성원에 힘을 얻을 수 있죠. 서울-수원에게 인기가 집중됐던 K리그의 흥행 열기가 대전까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런데 K리그는 대전만 다크호스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만년 하위권 팀이었던 상주는 5위(2승2무)에 있지만, 4경기에서 11골을 터뜨리며 K리그 최다득점 1위를 기록했습니다. K리그 최다 실점 2위(8실점)를 범할 정도로 수비가 정돈되지 못했지만, 다득점 경기를 펼치는 '화끈한' 팀 컬러로 무장했습니다. 특히 김정우는 4경기 연속골(6골) 및 K리그 득점 1위를 질주하며 상주 돌풍의 중심으로 우뚝 섰습니다. 지금까지 수비형 미드필더 이미지가 강했지만 올해는 공격수 변신에 성공하여 포지션 전환의 '좋은 예'로 거듭났죠. 여론에서는 '김정우vs박은호' 득점 1위 경쟁을 주목하면서 K리그의 새로운 흥행 스토리가 탄생했습니다.

상주의 오름세는 시즌 중반까지 지속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상무에 입대하면서 매년마다 스쿼드의 내실이 좋아졌습니다. 김정우를 비롯한 고참급 선수들이 9월경에 제대하면 전력 약화가 불가피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많은 승점을 획득하는 것이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의 절대적 과제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K리그에서 2009시즌 전반기 깜짝 돌풍 이외에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던 상주의 선전은 대전과 함께 올 시즌 K리그의 스토리 확장을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대전과 상주의 저력은 사람들이 K리그를 주목하는 이슈가 늘어났음을 의미합니다. K리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발전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꾸준히 스토리를 양산하고 때로는 포장하며 여론의 이목을 끌어야 합니다. K리그가 원하는 스토리는 '하위권 돌풍'이 아닐까 싶습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앞으로 한국 축구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 고종수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결국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선수 시절 내내 발목 잡았던 무릎 부상이 결국 은퇴로 이어지고 만 것이죠. 지난해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무릎 부상후유증에 재활까지 신통치 않아 결국 그라운드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대전 구단과 무릎 수술을 놓고 계약 포기까지 이어졌던 갈등을 나타낼 만큼 '자신의 천재성과 대조적으로' 말년 선수 생활이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고종수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대표팀과 K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입니다. 정확한 포지션은 이탈리아어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였죠. 이를 풀이하면 3/4지점에서 활약하는 선수로서 공격진 바로 아래서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경기를 하는 포지션을 의미하는데 그 자리가 처진 공격수 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입니다. 생각하는 축구 방식과 화려한 기술을 앞세워 경기를 치르는 고종수의 축구 스타일과 맥이 일치합니다. 다른 누구보다 독보적인 볼 재간을 자랑했던 선수였기에 국내 여론에서는 그를 '축구 천재'로 치켜 세웠습니다.

1996년 당시 중앙에서의 투박한 몸싸움과 측면 옵션의 빠른 발에 의존하는 공격이 주류였던 K리그에 고졸출신 신인 고종수의 창의적인 활약은 신선했습니다. 당시 18세였던 고종수는 시즌 후반기 수원 허리의 핵으로 자리 잡으며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포츠뉴스에서는 고종수 소식이 나올때마다 그의 덤블링 골 세리머니 장면을 집중적으로 방영하기도 했죠. 독특한 세리머니 또한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생팀이었던 수원은 김호 감독과 조광래 수석코치가 합심했던 4-4-2 포메이션의 아기자기한 공격 축구로 기틀을 다지면서 원년부터 K리그 인기 구단으로 거듭났습니다. 미드필더 형태 또한 다채로웠습니다. 바데아를 플레이메이커로 돌리고 이진행-이광종-조현두-김이주가 좌우 측면을 골고루 휘저었고 윤성효가 살림꾼 역할을 맡는, 그야말로 미드필더의 '분업화'가 철저하게 이뤄졌습니다. 소위 '무전술'이 팽배했던 당시 K리그의 열악한 환경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수원 홈 구장 관중 기록이 1위였지요.(한 가지 첨언하자면, 수원과 더불어 기술 축구로 주목 받은 팀이 바로 부천이었죠. 당시 수원vs부천은 라이벌 관계로 주목 받았는데, 오히려 김호vs니폼니시(훗날 조윤환) 대결 구도가 더 주목 받았습니다. 이는 K리그의 경기력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종수는 바데아에 가려져 있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이 되자 출장 시간이 늘어나면서 성인 축구 템포에 적응하더니 현란한 볼 재간과 출중한 개인기로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축구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예로 주목 받았습니다. 1997년 1월에는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팀에 합류하면서 한국 축구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켰죠.   

그 이후, 고종수는 무서운 존재로 변신합니다.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은 '고종수 존'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유연한 왼발목 스냅으로 볼이 날아가다 어느 순간에 밑으로 떨어지는 '드롭 골'까지 넣었습니다. 1996년 신인 시절의 앳된 플레이는 프로와 대표팀 경험, 패기까지 더해지면서 패스-개인기-돌파력-경기를 조율하는 능력 등등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며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거듭났습니다. 1998년 정규리그 우승, 1999년 전관왕 달성, 2000년 더블 우승(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 2001년 아디다스컵 3연패 등, '신흥 명문'으로 불리던 수원의 전성기를 이끌었죠. 특히 1998년에는 정규리그 최우수 선수(MVP)에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 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고종수를 지지하는 수원팬들의 열기였습니다. '고종수=수원 블루윙즈'라는 공식이 성립될 만큼 고종수를 좋아해서 수원을 좋아했던 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박건하, 이운재 같은 스타 플레이어도 여럿 있었지만 고종수 만큼은 절대적이었습니다. '!! !!!! 고~종수' 콜은 경기장에서 자주 불려지던 응원 구호였고요.(!는 박수를 말함) 2002년 7월 빅버드(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 슈퍼컵 1차전 알 히랄 전에서는 수원 서포터즈 그랑블루 응원석에 걸어진 걸게 중에 거의 대부분이 고종수 관련 응원문구였을 정도였죠. 당시 고종수가 십자인대 부상에서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고종수의 존재가 수원팬들에게 애증 그 이상이었던 겁니다.

당시 고종수는 '수원의 영웅'이었습니다. 수원하면 고종수였고, 고종수하면 수원이었습니다. 수원의 공격 중심은 고종수였고, 아직까지 수원팬들에게 회자되는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는 수원 역사상 최강의 공격 삼각편대였습니다. 창의적인 실력 이외에도, 덤블링 세리머니, 1999년 올스타전에서 컨츄리 꼬꼬의 노래를 부른것에 모자라 연예계까지 진출했던 끼, 주로 대표팀에서 선을 보였던 노란색 머리 등등 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다재다능함이 있었습니다. 수원이 1998년 K리그 르네상스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K리그 최고의 인기 구단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인물이 고종수였던 만큼, 프랜차이즈 스타로 주목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종수는 수원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2001년 7월 십자인대 부상을 시작으로 끝없는 내리막에 빠집니다. 그동안 대표팀과 소속팀 경기에 많은 출장을 거듭했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었던 겁니다. 19세였던 1997년 수원과 청소년 대표팀, 국가대표팀을 오가는 혹사를 시작으로 적지 않은 체력 소모에 시달리더니 2001년에 이르러 주저 앉고 만 것입니다.

당시 고종수는 '히딩크호의 황태자'로 주목 받았지만 고강도 체력 훈련을 이기지 못한 상황에서 경기 출장을 거듭하다 결국 십자인대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김호 감독이 히딩크 감독의 체력 훈련에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로 고종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2001년에는 수원이 K리그와 아시안클럽선수권 대회(AFC 챔피언스리그 전신)에 참가하는 등 고종수의 출장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로 골절 증상으로 고생했던 그에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시련이 닥쳤던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1997년부터 각급 대표팀에 차출되었던 한국 축구의 후진적인 시스템에 발목이 잡힌 것이죠.(고종수 외에도 이동국, 최성국, 박주영 등도 같은 케이스죠.)

결국 고종수는 잦은 부상과 그로 인해 얻은 슬럼프로 팬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게으른 천재'라 했을 만큼 인내심과 의지력이 부족했던 고종수의 정신력을 비판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안좋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2003년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방출됐고 2004년 수원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11월 임의탈퇴 처리 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전남에서 재기를 노리다 방출되었고 2006년에는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1년간 실업자 상태로 지냈죠. 특히 2004 시즌 도중에는 서울 영동대교에서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우울증에 걸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2007년 9월 스포츠 2.0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말했죠.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종수를 대하는 언론 또한 문제였습니다. 1997년 청소년 대표팀 시절에는 고종수가 박이천 감독을 대신하여 사령탑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기사가 나왔고, 강남에 식당 차렸거나 술집을 한다는 거짓말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루머가 여럿 나올 만큼, 재기를 노리던 고종수를 괴롭혔죠.

그동안 당했던 시련 만큼, 2007년 대전에서의 재기 성공은 극적이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고종수가 뛸 수 있을까?'라며 의구심을 가졌지만, 고종수는 그해 여름 대전 사령탑을 맡은 김호 감독의 조련 속에 대전의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4-3-3 전형의 미드필더 꼭지점에서 이성운, 박도현(김용태, 나광현)과 유기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브라질리아-슈바-데닐손' 브라질 트리오의 공격력을 적극 도왔죠. 조광래 감독이 "고종수가 다시 축구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고 찬사를 보낼 만큼, 고종수는 다시 일어선 끝에 대전의 창단 첫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대전팬들이 경기 종료 후 그라운드에 내려가 고종수와 얼싸안을 만큼, 6강 진출의 주역은 고종수였던 겁니다. 그런 활약속에 지난해 대전의 주장을 맡을 수 있었죠.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한 대전구단과의 갈등은 재계약 포기로 이어졌고, 결국 재활마저 신통치 않아 은퇴를 했습니다. 비록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떠나며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지만,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은퇴'가 악플 및 조롱 대상이 되면서 또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분명 고종수는 한국 축구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선수로 남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한때 한국 축구를 화려하게 장식하다 내리막길을 걸었던 '비운의 축구천재' 말이죠.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종수가 현역 K리그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고종수는 2007년 9월 스포츠 전문 잡지 <스포츠 2.0>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랜기간 나를 아껴준 그랑블루가 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그랑블루랑 따로 은퇴식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며 수원팬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전성기 시절 자신을 영웅처럼 지지했던 수원팬들과 다시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죠.
 
결국 고종수는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은퇴식 없이 쓸쓸히 떠났지만 수원과 많은 추억을 함께 했던 만큼 마음만은 '영원한 수원맨'이었던 겁니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수원팬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만큼, 그는 앞으로도 수원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수원의 영웅' 고종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홍석 2009.02.06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팬터지스터(대표적으로 윤정환, 고종수)를 중용하지 않는 한국 축구에서 정말 찬란히 빛나던 선수였는데...
    아쉽네요... 에혀... 세월이--;

  2. 2009.02.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근무시간 2009.02.06 2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종수 선수 소식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찬 신세대. 어찌 보면 김날일 선수 이전에 활약한(?) 축구스타인데말이죠..아쉽네요. 아직 한창일 나이인데..

  4. 제일아까운 인재... 2009.02.06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 역시 신은 공평한가....고종수에게 박지성급 마인드만 있었으면 한국축구사의 레전드가 됬을텐데......

  5. 고종수 ㅎㅎ 2009.02.07 0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파 2000에서 k리그서 가장 좋은 선수라서 좋아했던 선수인데... 아쉽네요. 대전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는 소식듣고 좋아했는데...쩝... 김호감독과는 각별한 사이일텐데... 한 시즌만 더 기다려주시지...

    • 나이스블루 2009.02.07 0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과거에 피파 시리즈에서,
      유럽팀할때 항상 고종수를 영입하곤 했습니다.

      아쉬운건 고종수의 피파 2002
      스피드 능력치가 7점 만점에 4점...ㅡ.ㅡ

      피파 2002에서는 스피드가 생명이었는데,
      고종수의 능력치가 아쉬웠죠...ㅡ.ㅡ

      암튼 그때의 기억 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6. 레귤러 2009.02.07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봤습니다.저도 오늘 기사접하고 하루종일 충격에 휩싸여 있었답니다.ㅜㅜ 맘같아선 은퇴번복하고 그라운드에서 뛴다고해도 기쁠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구단에서 일본에 보내줘서 수술을 하고왔으면 지금쯤 훈련장에서 같이 훈련하고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에 구단의 배려도 아쉽고..사람들은 고종수선수가 자기관리를 잘 못하고 게으르다고 하지만 가장큰 문제는 언론이라고 생각합니다.고종수 선수를 계기로 언론에서 선수를 죽이는일은 다시는 안나왔으면 좋겠네요.

    국내선수중 가장 좋아하던 고종수선수를 못보게된다니 K리그를 무슨재미로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 나이스블루 2009.02.07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딜가든 언론이 항상 문제였죠...ㅡ.ㅡ
      그래서인지 고종수도 언론을 굉장히 안좋아 하더군요...

      갠적으로는 언론개혁이 꼭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 elel 2009.02.07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니지만 안 만났어도..선수하나를 이렇게 망가트리나..

  8. 2009.02.07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종수선수를 보면.. 그 때의 시스템구조와 언론이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망쳐놓을수있나 하는.. 묘한 씁쓸함이 느껴지네요. 적어도 잘못된 시스템만 아니었어도 분명 크게됐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가 되었을 테지요.

    많은 불운이 있었던 만큼 앞으로도 잘되길 바랍니다. 제가 기억하는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으로 골을 성공하는 모습처럼요.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당시 어렸던 제가 나도 모르게 와~ 거릴때처럼요. 고종수 선수 힘내세요.

    • 나이스블루 2009.02.07 1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과론적으로 보면,
      언론이 망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고종수죠...ㅡ.ㅡ

      97년 청소년대표팀 시절때
      감독 역할을 대신 맡았다는 거짓말 루머가
      사실처럼 기사화되면서,
      결국 그의 인생은 가시밭길이 되었네요...ㅡ.ㅡ

      그저...
      앞으로의 인생이 잘 되길 바랄 뿐입니다.

  9. soul 2009.02.07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9년, 제가 축구를 처음 좋아하게 만들어준 선수인데...
    이제 은퇴한다니 마음이 씁쓸하네요.
    지지난 시즌 복귀해서 좋은 모습 보여주어 정말 기뻤습니다.
    부상재활까지 힘들게 되어 은퇴하신다니 안타깝습니다.
    마음같아선 은퇴번복하고 다시 뛰어주셨으면 합니다만,
    은퇴하셨기에 앞으로 무엇을 하시던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고~
    화이팅입니다.

    • 나이스블루 2009.02.08 0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은퇴번복한다면 더욱 좋겠죠...
      그것도 수원 블루윙즈 선수로 뛰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0%이고,
      언젠가 K3리그에서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0. 풋볼퉤깽 2009.02.07 2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원래 어떤 팀(팀이름을 밝히기는 쫌ㅎㅎㅎ) 써포터였는데~ 군대를 제대하고 잠시 있다보니 팀이 증발해 버렸었죠ㅡ. ㅡ;;; 그래서 확김에 야구로 옮기긴 했지만=. =ㅋㅋㅋ 라이벌 팀의 에이스인 고종수 선수는 정말 대단했었죠! 상대팀을 짓이겨버리던 쓰루패스는 정말ㅎㄷㄷ
    그런데 당시 K리그를 보면서 사기유닛이라 여겼던 고종수 선수와 이천수 선수(울산시절)...
    왜 둘이 왜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네요.....너무 아쉽습니다...

    • 나이스블루 2009.02.08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종수와 이천수...
      워낙 공통점이 많은 스타들인데다,
      이제는 수원에서 뛰었던 공통점까지 있어서,
      완전히 '닮은꼴'이 되었네요.

      두 선수 모두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죠...ㅡ.ㅡ

  11. 창욱 2009.02.08 1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

  12. 푸른별 2009.02.08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종수를 영원히 잊지 않을겁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는 31일 K리그 이적시장 마감을 앞둔 것과 동시에 '왼발 스페셜' 권집(26)이 포항에서 전북으로 이적했다. 그는 2002년 독일 FC 쾰른 유스팀 입단과 이듬해 수원에서의 맹활약으로 축구팬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잦은 이적으로 성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올 시즌 포항에서는 단 3경기 출장에 그친 상태.

권집의 대전 이적은 김호 감독이 강력하게 원해 성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2003년 수원에서 감독과 선수로서 한솥밥을 먹으며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 대전은 미드필더진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냈던 고종수와 이여성의 활약속에 권집의 가세로 중원 운용에 큰 힘이 실리게 됐다.

공교롭게도 고종수와 이여성, 권집은 자신이 데뷔했던 친정팀이 수원이다. 김호 감독이 수원 사령탑을 맡던 시절(1996~2003년)에 영입된 선수들이자 친정팀에서의 시련으로 다른 팀에 이적할 수 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에 놓였던 그들이다.

세 선수는 김호 감독에 의해 대전의 붙박이 주전으로 발탁 되거나 김호 감독이 다른 팀에서 데려왔던 선수들이다. 소위 '김호의 아이들'에 속하는 수원 출신 선수로서 후반기부터 4-3-3 포메이션을 쓰는 대전 미드필더의 주전으로 나란히 기용될 예정이다.

그 선봉장인 고종수는 수원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였으나 2004년 부진한 활약과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 끝에 그해 11월 임의탈퇴로 공시됐다. 이듬해는 전남에서 방출되어 1년간 무적 선수로 지낸 뒤 지난해 대전에 입단하여 재기를 꿈꿨다. 지난해 7월 김호 감독의 대전 사령탑 부임 이후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자리잡은 그는 팀의 정규리그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며 현재까지 대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2002년 수원에 입단했던 이여성은 2004년 11월 경찰청에서 복귀한 것과 동시에 수원에서 방출 조치를 당했다. 이때를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았던 이여성은 2005년 무적 선수로 지낸 뒤 2006년 부산에 입단하여 11경기에 출장하며 재기 조짐을 보였고 이듬해 24경기에 출장하여 프로 데뷔 첫 골과 어시스트까지 기록하는 기쁨을 맛봤다. 올해는 김호 감독의 부름으로 대전에 이적하여 18경기 출장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03년 8월 수원에 입단한 권집은 김진우(매탄고 코치)와 더불어 중원을 든든히 책임졌던 스페셜 왼발 리스트. 그해 12월 정식 부임한 차범근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아 2005년 1월 팀을 떠났던 그는 부산-전남-전북-포항을 거쳐 지난 29일 대전으로 둥지를 틀었다. 김호 감독은 고종수의 뒷공간을 메울 선수로 권집을 낙점했으며 스승의 선택을 받은 그는 "김호 감독님은 나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며 대전 입단 각오를 밝혔다.

세 선수의 예전 행보에서 살펴보 듯, 김호 감독이 수원 사령탑을 맡던 시절에 영입됐던 선수들은 차범근 감독 부임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하나둘씩 수원에서 사라졌다. 2005년 여름 김두현(웨스트 브롬위치) 조병국, 손대호가 성남에서 뭉쳐 '김호의 아이들'이라는 수식어가 탄생했으며 얼마전에는 손승준의 전북 이적으로 김호 감독의 제자로 구성된 또 하나의 '김호의 아이들(최강희 감독, 신홍기 코치, 조재진, 손승준)'이 형성됐다.

그리고 대전에서는 김호의 아이들에 속하는 고종수와 이여성, 권집이 팀의 중원을 책임지게 됐다. 특히 왼발 공격이 위력적인 권집의 가세로 '고종수 활용도'를 끌어 올릴 수 있어 2년 연속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수비형 미드필더 권집의 왼발 공격을 시작으로 고종수의 패스를 거쳐 공격수들의 골을 유도하겠다는 것이 김호 감독의 후반기 구상.

수원에서의 시련을 딛고 대전에서 다시 일어섰거나 힘찬 도약을 꿈꾸는 '김호의 아이들'. 과연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후반기를 맞이할지 대전 팬들은 이들에 대한 기대를 아끼지 않고 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