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르두 카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세 명의 선수들은 축구팬들에게 '세계 3대 축구 천재'로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남들보다 더 우수한 축구 실력을 뽐내고 있기 때문에 축구 천재라는 별칭이 붙여진 것이죠. 물론 세 선수만이 축구 천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호비뉴, 카림 벤제마, 이니에스타, 페르난도 토레스, 스티븐 제라드 등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가진 선수들만 하더라도 여럿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지네딘 지단과 호나우두가 세계 축구계의 양대산맥을 형성했죠.

그러나 한국 축구에서는 이 같은 축구 천재들을 찾기 힘듭니다. 그동안 언론에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빛낼 될성부를 떡잎이 있으면 '축구 천재', '축구 신동'이라는 수식어를 남발하며 호돌갑 떨었을 뿐, 선수 생활 말년까지 탄탄하게 성장했던 축구 천재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언론에서 축구 천재로 불렸던 선수들의 주된 공통점은 온갖 시련에 직면하는 아픔에 시달렸습니다. 축구팬 욕심 같아서는 한국판 카카-호날두-메시가 출현하기를 기대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진정한 축구 천재로 거듭난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축구 천재들이 비운의 선수 생활을 보냈기 때문이죠.

한국 축구는 카카-호날두-메시와 같은 축구 천재를 배출하기 힘든 환경입니다. 동양인 선수의 전반적인 개인 기량이 남미, 유럽 축구 선수들보다 부족한데다 선수 육성 시스템 및 인프라에서도 뒤쳐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한국 축구 내에서 잘하는 선수에게 '축구 천재'라는 별칭을 붙는 경우가 있지만, 그 선수가 국제 경기에서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치면 '저게 무슨 축구 천재냐?'며 팬들의 빗발친 질타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축구 천재가 2004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U-20) 조별예선에서 부진하던 박주영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축구 천재를 키우는 시스템이 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인 기량이 뛰어나도 체계적인 육성을 받지 못하거나 지도자의 관리 소홀, 축구에 대한 양질의 풍토, 그리고 선수 본인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선수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학원 축구에서 동료 선수보다 축구 잘하는 유망주가 있으면 감독과 코치의 지시사항이 줄어들고 관대하게 놔둘때가 종종 있는 것이 한국 축구계의 만연한 풍토입니다. 생맥주도 관리를 철저히해야 맛있는 것 처럼, 특급 유망주가 오랫동안 톱 클래스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관리가 우선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축구 천재가 배출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 언론에서 축구 천재로 불렸던 선수들도 그 별칭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조민국 울산현대 미포조선 감독은 "고려대 감독 시절에 만났던 축구 천재는 이천수와 박주영이었다"며 두 선수의 능력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이천수와 박주영은 자신들이 축구 천재임을 부정했습니다. 이천수가 노력파임을 강조했다면 박주영은 그 별칭에 부담감을 느껴야만 했죠.

특히 박주영은 언론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선수입니다. 언론에서 자신의 기사가 보도될 때 '축구 천재 박주영'이라는 말이 매번 흘러나오면서 심적으로 부담이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주위에서 기대하는 것이 지나치다보니 무언가 보여줘야겠다는 조급함에 결국 2005년 후기리그에 이르러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선수 본인은 기량 향상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야하는데 바깥에서 축구 천재라는 말이 나돌고 있으니 심적으로 부담되고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심리는 박주영을 비롯한 또 다른 유형의 축구 천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국 '축구 천재'라는 단어가 남발된 것은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TV 시청률, 신문 판매 부수, 인터넷 기사 클릭수를 늘리기 위해 헤드라인을 크게 잡다보니 유망주를 지나치게 떠주는 문제점이 있었죠. 해당 유망주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심리가 높아지면서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거나 또는 부담감에 직면합니다. 이러한 심리 상태가 세월이 흐를수록 누적되면서, 그 선수는 축구팬이 기대하는 성장 곡선을 달리지 못했습니다. 유망주 시절에 출중한 기량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던 축구 천재들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는 축구만 잘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풍토가 아닙니다. 1980년대 축구 천재로 불렸던 김종부의 사례가 대표적이죠. 김종부는 1983년 U-20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고려대 시절 한국 축구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던 선수입니다. 하지만 1986년 고려대 4학년때, K리그 팀인 대우와 현대로부터 거액의 계약서를 받더니 두 개 모두 사인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고려대 체육위원회로 부터 괘씸죄에 걸려 제명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무적 선수로 출전하여 한 골을 넣었습니다. 그러더니 1988년 럭키금성에 입단했지만 이중계약이라는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졌습니다.

소위 '비운의 테크니션'으로 불리던 선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병수, 최문식, 윤정환, 고종수, 이관우는 한국 축구 최고의 축구 스타로 성장할 수 있었던 테크니션 이었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김병수는 선수 시절 잦은 혹사에 시달리더니 결국 부상에 발목잡혀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발목과 무릎 수술만 6번했고 아직까지 후유증이 남아있을 정도로 혹사의 여파가 심했습니다. 최문식은 고3때 상대팀의 거친 견제속에 인대 부상을 당하면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윤정환은 뛰어난 공격력과 기술을 지녔지만 몸싸움과 수비력이 뒷받침 되지 못해 '반쪽 선수' 논쟁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수는 김병수와 더불어 한국 축구의 관리 부재에서 빚어진 희생자입니다. 1997년 청소년 대표팀 시절 코칭스태프와의 갈등으로 대표팀에서 쫓겨나더니 허정무호에서도 외면받으면서 많은 국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차범근호에서 많이 뛰었을 뿐이죠.) 그러더니 2001년 히딩크호에서는 피로누적 속에서도 대표팀에 꾸준히 차출되어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그해 7월 십자인대 부상으로 1년간의 재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부에서는 고종수의 사생활 문제를 의심스러워 하지만, 그 이전에는 관리 부족이 더 문제였습니다. 이관우는 한양대 시절 교통사고로 긴 시간의 재활을 보내더니 프로에서도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윤정환처럼 몸싸움과 수비력 부족으로 반쪽 선수 논쟁에 직면했지만 차범근 감독은 선수 본인의 노력 부족이 더 컸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이천수, 최성국, 권집, 박주영이 축구 천재로 꼽히던 선수들입니다. 이천수, 최성국, 박주영은 잦은 경기 출전으로 인한 혹사에 시달리며 몸이 망가지더니 주위의 지나친 기대 속에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천수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스스로 이기지 못해 온갖 돌출 행동으로 물의를 빚어 지금까지 고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권집은 2003년부터 지금까지 수원-부산-전남-전북-포항-대전을 오가는 져니맨 생활이 치명적이었죠. 그나만 박주영이 '운 좋게' 시련의 늪에서 벗어났습니다. 2005년 후기리그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부상과 부진으로 고전하며 긴 슬럼프의 시간을 보냈지만 AS모나코 진출이 없었다면 '발전 없는 선수'로 비아냥 받았을지 모릅니다. 박주영이 축구 천재 몰락의 대열에서 벗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죠.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로 확실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재능 넘치는 인재들이 꾸준히 배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공만 잘차면 '축구 천재'라는 별칭을 남발하고 관리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국 축구 발전에 이롭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카카-호날두-메시, 그리고 유럽과 남미 축구를 부러워 할 수 없습니다. 축구 천재의 몰락이 계속되는 한국 축구의 악순환을 뜯어 고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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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국 축구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 고종수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결국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선수 시절 내내 발목 잡았던 무릎 부상이 결국 은퇴로 이어지고 만 것이죠. 지난해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무릎 부상후유증에 재활까지 신통치 않아 결국 그라운드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대전 구단과 무릎 수술을 놓고 계약 포기까지 이어졌던 갈등을 나타낼 만큼 '자신의 천재성과 대조적으로' 말년 선수 생활이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고종수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대표팀과 K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입니다. 정확한 포지션은 이탈리아어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였죠. 이를 풀이하면 3/4지점에서 활약하는 선수로서 공격진 바로 아래서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경기를 하는 포지션을 의미하는데 그 자리가 처진 공격수 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입니다. 생각하는 축구 방식과 화려한 기술을 앞세워 경기를 치르는 고종수의 축구 스타일과 맥이 일치합니다. 다른 누구보다 독보적인 볼 재간을 자랑했던 선수였기에 국내 여론에서는 그를 '축구 천재'로 치켜 세웠습니다.

1996년 당시 중앙에서의 투박한 몸싸움과 측면 옵션의 빠른 발에 의존하는 공격이 주류였던 K리그에 고졸출신 신인 고종수의 창의적인 활약은 신선했습니다. 당시 18세였던 고종수는 시즌 후반기 수원 허리의 핵으로 자리 잡으며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포츠뉴스에서는 고종수 소식이 나올때마다 그의 덤블링 골 세리머니 장면을 집중적으로 방영하기도 했죠. 독특한 세리머니 또한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생팀이었던 수원은 김호 감독과 조광래 수석코치가 합심했던 4-4-2 포메이션의 아기자기한 공격 축구로 기틀을 다지면서 원년부터 K리그 인기 구단으로 거듭났습니다. 미드필더 형태 또한 다채로웠습니다. 바데아를 플레이메이커로 돌리고 이진행-이광종-조현두-김이주가 좌우 측면을 골고루 휘저었고 윤성효가 살림꾼 역할을 맡는, 그야말로 미드필더의 '분업화'가 철저하게 이뤄졌습니다. 소위 '무전술'이 팽배했던 당시 K리그의 열악한 환경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수원 홈 구장 관중 기록이 1위였지요.(한 가지 첨언하자면, 수원과 더불어 기술 축구로 주목 받은 팀이 바로 부천이었죠. 당시 수원vs부천은 라이벌 관계로 주목 받았는데, 오히려 김호vs니폼니시(훗날 조윤환) 대결 구도가 더 주목 받았습니다. 이는 K리그의 경기력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종수는 바데아에 가려져 있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이 되자 출장 시간이 늘어나면서 성인 축구 템포에 적응하더니 현란한 볼 재간과 출중한 개인기로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축구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예로 주목 받았습니다. 1997년 1월에는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팀에 합류하면서 한국 축구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켰죠.   

그 이후, 고종수는 무서운 존재로 변신합니다.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은 '고종수 존'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유연한 왼발목 스냅으로 볼이 날아가다 어느 순간에 밑으로 떨어지는 '드롭 골'까지 넣었습니다. 1996년 신인 시절의 앳된 플레이는 프로와 대표팀 경험, 패기까지 더해지면서 패스-개인기-돌파력-경기를 조율하는 능력 등등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며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거듭났습니다. 1998년 정규리그 우승, 1999년 전관왕 달성, 2000년 더블 우승(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 2001년 아디다스컵 3연패 등, '신흥 명문'으로 불리던 수원의 전성기를 이끌었죠. 특히 1998년에는 정규리그 최우수 선수(MVP)에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 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고종수를 지지하는 수원팬들의 열기였습니다. '고종수=수원 블루윙즈'라는 공식이 성립될 만큼 고종수를 좋아해서 수원을 좋아했던 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박건하, 이운재 같은 스타 플레이어도 여럿 있었지만 고종수 만큼은 절대적이었습니다. '!! !!!! 고~종수' 콜은 경기장에서 자주 불려지던 응원 구호였고요.(!는 박수를 말함) 2002년 7월 빅버드(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 슈퍼컵 1차전 알 히랄 전에서는 수원 서포터즈 그랑블루 응원석에 걸어진 걸게 중에 거의 대부분이 고종수 관련 응원문구였을 정도였죠. 당시 고종수가 십자인대 부상에서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고종수의 존재가 수원팬들에게 애증 그 이상이었던 겁니다.

당시 고종수는 '수원의 영웅'이었습니다. 수원하면 고종수였고, 고종수하면 수원이었습니다. 수원의 공격 중심은 고종수였고, 아직까지 수원팬들에게 회자되는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는 수원 역사상 최강의 공격 삼각편대였습니다. 창의적인 실력 이외에도, 덤블링 세리머니, 1999년 올스타전에서 컨츄리 꼬꼬의 노래를 부른것에 모자라 연예계까지 진출했던 끼, 주로 대표팀에서 선을 보였던 노란색 머리 등등 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다재다능함이 있었습니다. 수원이 1998년 K리그 르네상스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K리그 최고의 인기 구단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인물이 고종수였던 만큼, 프랜차이즈 스타로 주목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종수는 수원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2001년 7월 십자인대 부상을 시작으로 끝없는 내리막에 빠집니다. 그동안 대표팀과 소속팀 경기에 많은 출장을 거듭했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었던 겁니다. 19세였던 1997년 수원과 청소년 대표팀, 국가대표팀을 오가는 혹사를 시작으로 적지 않은 체력 소모에 시달리더니 2001년에 이르러 주저 앉고 만 것입니다.

당시 고종수는 '히딩크호의 황태자'로 주목 받았지만 고강도 체력 훈련을 이기지 못한 상황에서 경기 출장을 거듭하다 결국 십자인대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김호 감독이 히딩크 감독의 체력 훈련에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로 고종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2001년에는 수원이 K리그와 아시안클럽선수권 대회(AFC 챔피언스리그 전신)에 참가하는 등 고종수의 출장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로 골절 증상으로 고생했던 그에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시련이 닥쳤던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1997년부터 각급 대표팀에 차출되었던 한국 축구의 후진적인 시스템에 발목이 잡힌 것이죠.(고종수 외에도 이동국, 최성국, 박주영 등도 같은 케이스죠.)

결국 고종수는 잦은 부상과 그로 인해 얻은 슬럼프로 팬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게으른 천재'라 했을 만큼 인내심과 의지력이 부족했던 고종수의 정신력을 비판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안좋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2003년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방출됐고 2004년 수원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11월 임의탈퇴 처리 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전남에서 재기를 노리다 방출되었고 2006년에는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1년간 실업자 상태로 지냈죠. 특히 2004 시즌 도중에는 서울 영동대교에서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우울증에 걸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2007년 9월 스포츠 2.0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말했죠.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종수를 대하는 언론 또한 문제였습니다. 1997년 청소년 대표팀 시절에는 고종수가 박이천 감독을 대신하여 사령탑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기사가 나왔고, 강남에 식당 차렸거나 술집을 한다는 거짓말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루머가 여럿 나올 만큼, 재기를 노리던 고종수를 괴롭혔죠.

그동안 당했던 시련 만큼, 2007년 대전에서의 재기 성공은 극적이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고종수가 뛸 수 있을까?'라며 의구심을 가졌지만, 고종수는 그해 여름 대전 사령탑을 맡은 김호 감독의 조련 속에 대전의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4-3-3 전형의 미드필더 꼭지점에서 이성운, 박도현(김용태, 나광현)과 유기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브라질리아-슈바-데닐손' 브라질 트리오의 공격력을 적극 도왔죠. 조광래 감독이 "고종수가 다시 축구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고 찬사를 보낼 만큼, 고종수는 다시 일어선 끝에 대전의 창단 첫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대전팬들이 경기 종료 후 그라운드에 내려가 고종수와 얼싸안을 만큼, 6강 진출의 주역은 고종수였던 겁니다. 그런 활약속에 지난해 대전의 주장을 맡을 수 있었죠.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한 대전구단과의 갈등은 재계약 포기로 이어졌고, 결국 재활마저 신통치 않아 은퇴를 했습니다. 비록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떠나며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지만,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은퇴'가 악플 및 조롱 대상이 되면서 또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분명 고종수는 한국 축구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선수로 남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한때 한국 축구를 화려하게 장식하다 내리막길을 걸었던 '비운의 축구천재' 말이죠.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종수가 현역 K리그에서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고종수는 2007년 9월 스포츠 전문 잡지 <스포츠 2.0>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랜기간 나를 아껴준 그랑블루가 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그랑블루랑 따로 은퇴식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며 수원팬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전성기 시절 자신을 영웅처럼 지지했던 수원팬들과 다시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죠.
 
결국 고종수는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은퇴식 없이 쓸쓸히 떠났지만 수원과 많은 추억을 함께 했던 만큼 마음만은 '영원한 수원맨'이었던 겁니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수원팬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만큼, 그는 앞으로도 수원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수원의 영웅' 고종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오는 31일 K리그 이적시장 마감을 앞둔 것과 동시에 '왼발 스페셜' 권집(26)이 포항에서 전북으로 이적했다. 그는 2002년 독일 FC 쾰른 유스팀 입단과 이듬해 수원에서의 맹활약으로 축구팬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잦은 이적으로 성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올 시즌 포항에서는 단 3경기 출장에 그친 상태.

권집의 대전 이적은 김호 감독이 강력하게 원해 성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2003년 수원에서 감독과 선수로서 한솥밥을 먹으며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 대전은 미드필더진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냈던 고종수와 이여성의 활약속에 권집의 가세로 중원 운용에 큰 힘이 실리게 됐다.

공교롭게도 고종수와 이여성, 권집은 자신이 데뷔했던 친정팀이 수원이다. 김호 감독이 수원 사령탑을 맡던 시절(1996~2003년)에 영입된 선수들이자 친정팀에서의 시련으로 다른 팀에 이적할 수 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에 놓였던 그들이다.

세 선수는 김호 감독에 의해 대전의 붙박이 주전으로 발탁 되거나 김호 감독이 다른 팀에서 데려왔던 선수들이다. 소위 '김호의 아이들'에 속하는 수원 출신 선수로서 후반기부터 4-3-3 포메이션을 쓰는 대전 미드필더의 주전으로 나란히 기용될 예정이다.

그 선봉장인 고종수는 수원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였으나 2004년 부진한 활약과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 끝에 그해 11월 임의탈퇴로 공시됐다. 이듬해는 전남에서 방출되어 1년간 무적 선수로 지낸 뒤 지난해 대전에 입단하여 재기를 꿈꿨다. 지난해 7월 김호 감독의 대전 사령탑 부임 이후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로 자리잡은 그는 팀의 정규리그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며 현재까지 대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2002년 수원에 입단했던 이여성은 2004년 11월 경찰청에서 복귀한 것과 동시에 수원에서 방출 조치를 당했다. 이때를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았던 이여성은 2005년 무적 선수로 지낸 뒤 2006년 부산에 입단하여 11경기에 출장하며 재기 조짐을 보였고 이듬해 24경기에 출장하여 프로 데뷔 첫 골과 어시스트까지 기록하는 기쁨을 맛봤다. 올해는 김호 감독의 부름으로 대전에 이적하여 18경기 출장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03년 8월 수원에 입단한 권집은 김진우(매탄고 코치)와 더불어 중원을 든든히 책임졌던 스페셜 왼발 리스트. 그해 12월 정식 부임한 차범근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아 2005년 1월 팀을 떠났던 그는 부산-전남-전북-포항을 거쳐 지난 29일 대전으로 둥지를 틀었다. 김호 감독은 고종수의 뒷공간을 메울 선수로 권집을 낙점했으며 스승의 선택을 받은 그는 "김호 감독님은 나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며 대전 입단 각오를 밝혔다.

세 선수의 예전 행보에서 살펴보 듯, 김호 감독이 수원 사령탑을 맡던 시절에 영입됐던 선수들은 차범근 감독 부임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하나둘씩 수원에서 사라졌다. 2005년 여름 김두현(웨스트 브롬위치) 조병국, 손대호가 성남에서 뭉쳐 '김호의 아이들'이라는 수식어가 탄생했으며 얼마전에는 손승준의 전북 이적으로 김호 감독의 제자로 구성된 또 하나의 '김호의 아이들(최강희 감독, 신홍기 코치, 조재진, 손승준)'이 형성됐다.

그리고 대전에서는 김호의 아이들에 속하는 고종수와 이여성, 권집이 팀의 중원을 책임지게 됐다. 특히 왼발 공격이 위력적인 권집의 가세로 '고종수 활용도'를 끌어 올릴 수 있어 2년 연속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수비형 미드필더 권집의 왼발 공격을 시작으로 고종수의 패스를 거쳐 공격수들의 골을 유도하겠다는 것이 김호 감독의 후반기 구상.

수원에서의 시련을 딛고 대전에서 다시 일어섰거나 힘찬 도약을 꿈꾸는 '김호의 아이들'. 과연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후반기를 맞이할지 대전 팬들은 이들에 대한 기대를 아끼지 않고 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