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소탱크' 박지성(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을 향한 국내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올 시즌 무릎 부상 및 팀 전술 변화로 지난 시즌보다 경기력이 떨어지면서 언론들이 우려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13일 맨유가 아스톤 빌라에게 0-1로 패하자 이러한 보도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언론에서 박지성이라는 키워드로 부정적인 표현을 헤드라인에 띄워 보도했습니다. 특히 아스톤 빌라전 이후에는 박지성을 가리켜 '패배의 아이콘', '패배의 상징'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현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닙니다. 잉글랜드 스포츠 전문 채널 <스카이 스포츠>가 아스톤 빌라전 종료 후 박지성에게 '개성없다'는 평가를 내린 것 이외에는 현지에서 박지성에게 자극적인 수식어를 붙인 경우는 없었습니다. 한국 언론사에서 "외국의 어느 언론사가 박지성은 패배의 아이콘이라 주장했다"와 같은 문구를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박지성이 한때 '승리 보증수표', '행운의 상징'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지성이 선발로 출전하면 맨유가 승리하는 공식이 그것입니다. 박지성은 지난 2006년 5월 2일 미들즈브러전 부터 지난해 10월 25일 에버튼전까지 30경기 연속 선발 무패행진(26승4무)을 기록했습니다. 선발로 출전한 30경기 중에 26경기가 맨유의 승리로 이어지면서 국내 언론들은 박지성을 가리켜 '승리 보증수표'라는 수식어를 달았습니다. 또한 맨유는 지난해 6월 각 선수들에 대한 2007/08시즌 평가에서 박지성의 무패 기록을 가리켜 "맨유의 상징은 박지성"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맨유가 올 시즌 각 대회에서 패했던 5경기 중에 3경기가 박지성이 선발로 뛰었던 경기였기 때문입니다. 박지성은 올 시즌 맨유에서 10경기에 출전했으며 그 중 7경기를 선발로 뛰었습니다. 7경기에서의 맨유 성적은 3승1무3패 였습니다.(첼시와의 커뮤니티 실드는 승부차기 경기였기 때문에 무승부가 맞습니다.) 한때 30경기 연속 선발 무패행진을 기록했을 때의 행보와 사뭇 다릅니다. 특히 맨유가 아스톤 빌라에게 패하면서 일부 국내 언론은 박지성에게 '패배의 아이콘'과 같은 수식어를 쓰게 됐습니다.
그러나 패배의 아이콘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3승1무3패를 기록한 선수에게 패배의 아이콘이라고 붙인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7번의 경기 중에 4번의 경기를 맨유가 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맨유가 패한 5경기 중에 3경기가 박지성의 선발 출전 경기였다는 것은 패배의 아이콘으로 불릴만한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5경기 중에는 루니-캐릭-브라운-에브라가 4경기, 오셰이-발렌시아-긱스가 박지성과 더불어 3경기에 선발 출전했습니다. 박지성이 패배의 아이콘이라면 루니-캐릭-브라운-에브라도 패배의 아이콘입니까?
축구는 야구가 아닙니다. 개인의 출전 경기마다 승무패를 붙이며 선수에 대한 가치를 논하는 것은 프로야구 투수 성적에서 중요한 것일 뿐 축구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축구는 모든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똘똘 뭉쳐 그라운드를 뛰어 다니는 종목이기 때문에 개인보다 팀이 우선입니다. 특정 선수의 활약에 의해 경기 결과가 좌우되는 스포츠가 아닌 11명이 단결해야 하는 종목입니다. 아무리 에이스가 있더라도 그 뒤에는 조력자가 있고 수비수가 있는 것이 축구입니다. 박지성의 선발 출전 승무패 기록은 단순한 참고 자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맨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맨유는 불과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호날두의 팀'으로 불렸습니다. 호날두의 드리블 돌파와 패싱력, 골을 앞세워 효율적인 공격 기회를 마련했고 그 횟수가 많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호날두의 부족한 수비 가담은 박지성을 비롯한 다른 동료 선수들이 충분하게 메워졌고 팀의 파상적인 공격 속에는 포백의 끈끈한 조직력이 뒷받침했습니다. 지난 시즌 호날두가 슬럼프에 빠졌을때 맨유가 꾸준히 승점을 챙긴것도 수비 조직력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선수 1~2명의 활약에 경기 결과가 지속적으로 좌우되지 않는 맨유라는 팀에서 패배의 아이콘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또한 박지성이 30경기 연속 선발 무패 기록을 세웠을 때는 맨유의 주전이 아닌 스쿼드 플레이어 였던 시기가 더 많았습니다. 긱스를 비롯한 동료 선수들과 함께 선발 자리를 오가며 경기에 뛰었을 뿐입니다. 지금의 박지성도 스쿼드 플레이어입니다. 30경기 연속 선발 무패 기록을 세웠을때와 패배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현재와는 팀 내 입지가 큰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리고 박지성이 패배의 아이콘으로 불려서는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박지성이 선발 출전했고 맨유가 패했던 3경기 중에 한 경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박지성은 지난달 25일 베식타스전에 선발 출전하여 67분 동안 그라운드를 질주했습니다. 팀은 0-1로 패했지만 왼쪽 측면에서 동료 선수들에게 활발한 공격 기회를 밀어줬고 왼쪽 풀백 하파엘 다 실바와의 호흡이 매끄러웠습니다. 측면과 중앙을 부지런히 오가며 공을 잡으면 발군의 볼 트래핑을 발휘하며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패스도 대부분 정확하게 향했습니다.
그래서 박지성은 베식타스전 종료 후 <스카이스포츠>로 부터 평점 7점을 부여받아 가브리엘 오베르탕과 함께 팀 내 평점 1위를 기록했습니다. 팀의 패배 속에서도 동료 선수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경기를 펼친 것입니다. 베식타스전 이후에 자신이 선발 출전하고 맨유가 패했던 경기가 바로 아스톤 빌라전입니다. 국내 언론에서는 아스톤 빌라전 패배를 빌미 삼아 박지성을 '패배의 아이콘', '패배의 상징'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것도 박지성이 베식타스전 평점 팀 내 1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채로 말입니다.
이것은 불과 몇달 전까지 언론에서 유행했던 '박지성 위기' 키워드가 또 다른 형태로 진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언론은 박지성이 최소 2경기 연속 결장하면 박지성 위기론을 꺼내들거나 아니면 팀 내 입지와 관련된 비관적인 이야기들을 보도했습니다. 맨유가 로테이션 시스템을 쓰는 팀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또는 어떻게든 박지성과 관련된 보도를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언론의 이러한 관행을 풍자하기 위해 '박지성 위기 시리즈' 글이 유행했습니다.
이러한 즉흥적인 보도는 박지성을 패배의 아이콘으로 몰아넣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패배의 아이콘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아니, 패배의 아이콘으로 불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타국에서 슬럼프 탈출을 위해 고된 시간을 보내는 박지성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국내에서의 박지성 여론을 악화시킬 뿐이며 심지어 박지성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박지성은 패배의 아이콘이 될 수 없는, 되어서는 안 될 선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