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는 실력으로 말합니다. 과거의 이름값보다는 현재의 실력이 최고인 인재가 사람들의 인정과 많은 혜택을 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나이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것이 가혹할때가 있습니다. 조직의 변화를 위해 젊고 패기 넘치는 인재를 중용하면서 나이 많은 인재가 희생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업체 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노장 선수가 팬들에게 '노쇠하다'는 반응까지 감수해야 할 정도입니다.
'진공 청소기' 김남일(32, 빗셀 고베)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김남일은 지난 9월 5일 호주전에서 1년 만에 대표팀 복귀전을 치른 이후 팬들에게 '노쇠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날 후반 25분에 교체 투입하면서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나머지 부자연스런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10월 14일 세네갈전에서는 후반전에 교체 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볼 키핑력 부족 및 경기 장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상대의 역습을 허용당하는 불안함을 노출 했습니다. 당연히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노쇠하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팬들의 냉정한 심리에는 김남일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했습니다. 김남일은 지난해 9월 10일 북한전에서 페널티킥 허용 및 경기력 부진으로 1년 간 대표팀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허정무호 초기 시절 팀의 주장이자 맏형(이운재가 없었으므로), 그리고 중원의 사령관으로 주름잡았던 선수임을 상기하면, 북한전 부진으로 인한 대표팀 제외는 팬들에게 '노쇠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여기에 대표팀의 몇몇 영건들이 주축 선수로 자리잡으면서 김남일의 대표팀 복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의 전망도 흘러 나왔습니다. 김남일은 허정무호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팬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김남일의 클래스가 대표팀에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에 의해서죠.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있는 것 처럼, 김남일은 두 번의 월드컵 대회 출전과 A매치 100경기 출전에 육박한(세르비아전 포함 89경기) 경험을 지녔습니다. 기성용-김정우-조원희 같은 기존 중앙 미드필더들의 부족한 경험을 김남일이 커버할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불안함이 있는 포백을 리드할 수 있는 능력은 김남일이 가장 적합한 카드였습니다.
경험이란 존재는 어쩌면 실력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선수라도 실력이 부족하면 대표팀에서 제외되는 것이 프로의 생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경험을 간과하면 큰 경기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합니다. 경험있는 선수가 리드하지 못하면 팀은 상대팀의 분위기에 휩쓸려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맨유에서 긱스-스콜스-판 데르 사르 같은 30대가 꺾인 노장들이 위기의 순간마다 팀을 구원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젊은이의 패기보다 노장의 경험이 축구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남일의 세르비아전 맹활약이 반가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세르비아는 허정무호가 출항한 이후 가장 강한 상대였습니다. 공수 양면에 걸친 탄탄한 실력과 선수들의 단결된 호흡을 앞세워 프랑스를 제치고 월드컵 유럽 예선 조 1위로 통과한 강호입니다. 이러한 팀을 상대하려면 많은 경기에 출전한 노하우로 다져진 경험있는 김남일이 제격 이었습니다. 여기에 기성용과 김정우가 소속팀의 6강 플레이오프 일정으로 조기 귀국했던 만큼 김남일에게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김남일은 세르비아전에서 조원희와 함께 4-2-3-1의 더블 볼란치 역할을 맡았습니다. 허정무 감독이 강팀과의 경기에서 미드필더진을 두껍게 세우기 위해 4-2-3-1의 플랜B를 시험하면서 김남일을 선발 기용했습니다. 4-2-3-1에서 더블 볼란치는 선수들을 이끌고, 전방으로 패스 띄우고, 수비수들과 수비 밸런스를 잡고, 상대팀 선수와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며 공을 커팅하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합니다. 특히 더블 볼란치는 기동력보다 공수 연결고리 역할이 중요시되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김남일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비록 한국이 전반 초반 포백 수비수들의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했지만 차츰 안정을 되찾아 세르비아를 압도하는 점유율로 상대 진영에서 활발한 공격을 펼쳤습니다. 그 중심에 김남일이 있었습니다. 김남일은 후배 선수들이 이른 실점으로 위축되는 경기 운영을 펼치자 직접 공격에 가담해 전반 11분과 14분에 중거리 슈팅을 날렸습니다. 수비 상황에서는 거구의 세르비아 선수들을 상대로 직접 몸을 날리며 공격을 끊고 역습을 시도하며 팀의 분위기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김남일은 측면과 중앙을 자유자재로 연결하는 다채로운 패싱력으로 한국의 공격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4-2-3-1에서는 더블 볼란치가 전방쪽으로 활발한 패스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김남일의 패싱력이 팀 공격의 근간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조원희는 공격 전개에서 약점을 드러내면서 전반 35분만에 교체 되었습니다. 이것은 김남일이 대표팀의 더블 볼란치로서 제 역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김두현이 조원희를 대신해 교체 투입되면서 한국의 공격은 경기 종료 시점까지 활발함을 유지했고 김남일의 노련한 경기 운영이 빛을 발했습니다.
또한 한국이 전반 7분 지기치에게 골을 내준 이후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김남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김남일이 중원에서 1차 저지선 임무를 맡으면서 수비수들의 위치를 가리키며 수비 밸런스를 구축했던 것이 상대의 공세를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이 됐습니다. 김남일은 체격 좋은 상대와의 몸싸움에서 부지런히 공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때로는 상대 길목을 미리 선점하여 공간 싸움에서의 우세를 꾀했습니다. 그래서 세르비아는 2선에서 1선으로 올라오는 공격 전개가 매번 끊어져 추가 득점 기회를 번번이 놓쳤습니다.
이러한 김남일의 고군분투는 팀 전력의 뼈대가 됐습니다. 대표팀의 주장인 박지성이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공격에 중심을 두었다면 김남일은 대표팀의 공격과 수비 전체를 책임지며 팀 전력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만약 김남일이 없었다면 한국은 이날 경기에서 대량 실점에 무기력한 경기 운영으로 패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김남일은 그동안 대표팀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세르비아전 맹활약으로 채우며 허정무호 중원의 사령관 이미지를 되찾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번 세르비아전은 김남일을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경기였습니다. 만약 한국이 세르비아전을 치르지 않았다면, 세르비아전에서 4-2-3-1이 아닌 4-4-2를 썼다면 김남일의 대표팀 위상은 올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남일은 세르비아전에서 자신이 노쇠하다는 여론의 반응을 깨고 후배 선수들보다 더 월등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남아공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 가능성을 밝게 하는 '긍정 포인트'로 작용할 것입니다. 세르비아전에서 멋진 활약을 펼친 김남일에게 박수의 갈채를 보내고 싶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