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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세르비아전 패배, 그러나 한국은 강해졌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세르비아에게 0-1로 패한 뒤의 마음은 무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련했고 마음속의 부담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물론 세르비아전 이전까지 치렀던 A매치 27번의 경기에서 14승13무의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패배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패행진 횟수가 올라갈수록 부담은 크기 마련이며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에 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르비아전 패배로 2010년을 새롭게 도전하는 분위기는 긍정적입니다.

우선, 세르비아에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상대로 유럽 축구의 '진짜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죠. 180cm 후반 이상의 육중한 체격에서 우러나오는 힘과 높이, 유연한 경기 운영, 날카롭고 흠잡을 것 없는 공격 전개, 강력한 임펙트, 뛰어난 개인 전술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수들 앞에서 유럽의 힘을 보여줬습니다. 안티치 세르비아 감독이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최근 경기를 비디오로 봤다. 얼마전 북아일랜드보다 한국이 상대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준비한 걸 보여주겠다. 한국의 무패행진을 깨고싶다"고 말한 것 처럼, 세르비아는 한국전에서 최선의 경기를 펼쳤습니다.

또한 세르비아는 한국이 자만할 뻔했던 분위기를 막아냈습니다. 만약 한국이 세르비아전에서 승리했다면 남아공 월드컵 본선 성적에 대한 자신감이 과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곧 방심으로 이어져 월드컵 본선에서 예상치 못한 최악의 결과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패행진에 대한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유럽 최강' 스페인도 지난 여름 컨페더레이션스컵 예선까지 36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기록하면서 우승 예약 분위기를 마련했지만 4강 미국전에서 고배를 마셨으니까요. 세르비아에 고마울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사실, 한국은 '진짜 유럽'과의 경기를 원했습니다. 지난 9월 '유럽같지 않은' 호주와의 경기에서 결과와 내용이 일방적으로 앞섰던 3-1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진짜 유럽'과의 경기가 절실했습니다. 그동안 유럽팀을 상대로 고질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한국 축구로서는 덴마크-세르비아전이 '유럽 격파'를 위한 자신감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유럽 두 팀과 상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덴마크-세르비아전이 반가웠습니다.
 
한국 축구는 불과 몇년전까지 '유럽 공포증'으로 불안에 떨었습니다. 유럽 선수들과 상대하면 유독 힘을 못썼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덴마크-세르비아전에서 드러난 것 처럼, 한국이 경기 내용에서 유럽 축구를 앞설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됐습니다. 대표팀에 유럽선수 못지 않은 기술력과 순발력, 공간 이해력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허정무호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전술적인 퀄리티가 향상 됐습니다. 그로인해 쿠엘류 시절에 실패했던 4-2-3-1은 허정무호의 플랜B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선수 구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유럽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경쟁력을 쌓았던 것이 유럽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됐습니다. 특히 세르비아전 선발로 출전했던 10명의 필드 플레이어 중에 7명이 전현직 유럽파 선수들이며 J리거 이정수를 제외하면, 순수 K리거는 염기훈과 조용형 뿐입니다. 또한 유럽 축구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축구 선수들이 유럽무대 정상급 선수의 기술을 벤치마킹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것은 U-20, U-17 대표팀이 세계 청소년 대회 8강 진출의 위업을 달성하는 토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세르비아전에서 얻은 최대의 소득은 유럽을 비롯한 강호와의 경기에서 미드필더진이 위축되지 않는 경기 운영을 펼친 것입니다. 현대 축구는 미드필더 싸움에서의 우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맨유와 첼시, FC 바르셀로나 같은 유럽의 강팀들이 미드필더에서의 높은 볼 점유율로 수 많은 공격 기회를 창출합니다. 한국은 전반 11분 세르비아와의 볼 점유율에서 40-60(%)를 기록해 상대에게 초반 기세를 허용했지만 전반 종료 후 50-50, 후반 종료 후 54-46의 우세를 점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이 세르비아전에서 좋은 경기 내용을 보여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격에서 수비로, 수비에서 공격으로 연결되는 밸런스 능력도 좋았습니다. 이것은 4-2-3-1에서 2의 역할을 맡은 더블 볼란치의 활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김남일은 다양한 형태의 전진패스를 활발히 띄우며 한국의 공격 분위기를 마련했으며 트라이앵글 위치를 조성하여 상대 허리를 뚫는 공격 연결에서 강점을 발휘했습니다. 수비에서는 안정적인 위치선정과 몸을 날리는 커팅으로 상대의 공세를 끊는데 집중했습니다. 여기에 포백 수비수들과 동료 수비형 미드필더의 위치까지 조절하며 그라운드의 리더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포백 수비수들은 전반 초반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을 허용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 이후의 내용이 좋았습니다. 202cm의 장신 공격수인 지기치를 비롯해서 라조비치의 공격을 무너뜨리기 위해 협력 수비를 펼쳐 상대와 정면으로 몸싸움하기 보다는 침투 공간을 내주지 않는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과정에서 덴마크전에서 부진했던 조용형이 상대 공격을 여러차례 커팅하고 길목까지 차단하는 지능적인 수비 운영으로 상대에게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수비력이 앞으로 평가전에서 꾸준히 단련되면 월드컵 본선에서 세계 정상급 공격수를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정무 감독의 전술 운영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약 허정무 감독이 0-1로 뒤진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원래의 전술인 4-4-2로 전환하면 세르비아전은 대량 실점으로 패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4-4-2는 중앙 미드필더들의 활동 영역이 커지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중원 및 수비라인이 여지 없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4-2-3-1을 쓰면서 좌우 윙어들의 수비 가담을 늘리며 수비 밸런스를 튼튼히 구축하기가 용이했습니다. 그로인해 공격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으며 후반전에 경기 내용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공격 이었습니다. 슈팅 숫자에서 11-10(유효 슈팅 6-6)으로 근소하게 앞섰지만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습니다. 골 결정력 불안은 한국 축구에서 여전히 해결하기 힘든 숙제였던 것이죠. 슈팅 정확성 보다는 상대 골문을 흔들 수 있는 위치를 창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스탠딩 성향의 설기현과 잦은 부상으로 날카로움이 떨어진 염기훈은 전방 공격 옵션의 기동력과 임펙트, 정확성의 3박자가 요구되는 4-2-3-1의 옷에 맞지 않았습니다. 박주영과 이근호, '대표팀에 없는' 최성국 같은 문전 돌파 능력이 뛰어난 공격 옵션이 4-2-3-1의 해법임을 세르비아전에서 드러났습니다.

물론 세르비아전 0-1 패배는 아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르비아전은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을 향한 과정이자 평가전입니다. 평가전은 결과보다 내용이 중요시되는 경기로서 어디까지나 내용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국 축구가 세르비아 같은 강호를 상대로 세계 무대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 월드컵 본선에서 어떤 전술을 시험하고 선수 기용에 대한 개념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월드컵 본선까지 앞으로 7개월의 시간이 남았고 한국이라는 팀을 철저히 분석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절대 조급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세르비아전 패배를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히딩크 감독 시절에도 평가전에서 무기력한 경기 내용을 펼친적이 여럿 있었고 프랑스와 체코에게 0-5로 대패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세르비아전에서의 경기 내용에서 증명된 것 처럼, 허정무호의 '진짜 실력'은 예전보다 더 강해졌고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세르비아전은 한국 대표팀의 전술적인 퀄리티가 이전보다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던 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