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의 발레리나' 디미타르 베르바토프(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골잡이입니다. 레버쿠젠과 토트넘 시절에 많은 골을 넣었던 공격수였기 때문이죠.
특히 이영표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토트넘 시절의 활약상이 빛났습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두 시즌 동안 95경기 45골 28도움을 기록해 골잡이의 이미지를 팬들에게 잔뜩 심어줬습니다. 그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안드리 셉첸코(디나모 키예프)에 이은 동유럽 최고의 골잡이로 거듭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베르바토프는 지난해 여름 맨유 이적 후 지금까지 55경기 17골 10도움을 올렸습니다. 1경기당 0.31골을 기록함으로써 0.47골을 터뜨렸던 토트넘 시절보다 골 숫자가 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 시즌에는 12경기에서 3골 1도움을 기록해 골잡이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베르바토프의 먹튀 논란은 여전히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베르바토프는 지난해 여름 3075만 파운드(약 620억원)의 맨유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고 올드 트래포드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3075만 파운드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버쿠젠과 토트넘에서 많은 골을 넣었기 때문에 맨유에서 골잡이의 면모를 발휘할거라 예상했던 많은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르바토프가 맨유의 주전 공격수로서 꾸준히 선발 출전하는 것은 골잡이와는 다른 캐릭터로 팀의 공격력을 빛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르바토프는 쉐도우 역할에 충실할 뿐!
베르바토프는 지난 17일 볼튼전에서 4-4-2의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맡았습니다. '긱스-안데르손-캐릭-발렌시아'로 짜인 미드필더진과 타겟맨인 마이클 오언 사이의 공간을 누비며 팀의 공격을 주도하는 역할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 좌우 측면과 중앙을 프리롤 형태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상대 미드필더진의 허를 뚫는 공격 연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미드필더진이 지공 형태의 공격과 안정적인 밸런스로 점유율을 높였던 것이 공격 활동 폭을 늘리는데 플러스가 됐습니다.
볼튼전에서는 좋은 경기 내용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31개의 패스 중에서 13개의 미스를 범했고 그 중에 4개가 박스 안쪽, 3개가 박스 바깥에서 안쪽으로 이어지는 패스였습니다. 쉐도우치고는 패싱력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왼쪽 측면에서 라이언 긱스와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볼 점유율 확보에 주력했고 오른쪽 공간에서 오언-발렌시아-네빌의 전방 침투 기회를 살린 패싱력은 쉐도우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베르바토프는 쉐도우로서 골보다 패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비록 골은 적지만 미드필더진과 타겟맨 사이의 공간에서 프리롤 형태의 움직임으로 패스 플레이에 치중하면서 팀 공격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맨유에서의 포지션은 쉐도우로 고정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즌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타겟맨으로 활용되었던 그가 이제는 쉐도우로서 기민한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본래 베르바토프는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타겟맨입니다. 토트넘 시절에 타겟맨으로서 박스 안에서 많은 골을 터뜨렸고 190cm의 높은 키를 활용한 공중볼 다툼에서도 상대 수비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타겟 역량을 충분히 살려주는 로비 킨 같은 존재가 있었기에 토트넘 시절에 타겟맨으로서 두각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맨유에서는 타겟맨으로서 실패했습니다. 토트넘 시절에는 주연이었으나 맨유에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공격을 도와주는 조연이었고 시즌 초반과 중반에는 팀의 속공 패턴 공격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에 쉽게 고립되고 골 숫자까지 줄어들면서 맨유 현지 팬들에게 '디미타르 베론'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습니다. 베론은 지난 5월 잉글랜드 <데일리 메일>로 부터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악의 먹튀 1위에 뽑힌 선수였기에(셉첸코가 2위) 베르바토프로서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베르바토프가 맨유에서 변함없이 주전으로 뛰고 있는 것은 타겟맨 이외의 뭔가 특출난 재능이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플레이메이커 성향입니다. 퍼거슨 감독은 그동안 베르바토프를 칭찬할 때마다 "칸토나와 같은 패스, 드리블, 볼 터치 능력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칸토나는 맨유 선수 시절에 쉐도우 스트라이커를 맡은 선수여서 베르바토프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베르바토프의 패스와 드리블, 볼 터치능력은 팀 내 공격 옵션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안정적입니다.
특히 올 시즌에는 쉐도우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습니다. 맨유가 호날두의 이적으로 무한 스위칭 형태의 포지션 파괴에서 벗어나 선수들이 자신의 포지션을 책임지는 철저한 지역 분담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이죠. 맨유는 4명의 미드필더가 1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드필더와 공격 사이의 간격을 타이트하게 좁혀 유연한 패스로 공격을 전개할 수 있는 쉐도우의 필요성이 커졌고 베르바토프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루니 또는 오언이 타겟맨을 맡아 박스 안에서 골을 노리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물론 루니도 쉐도우를 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루니는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많은 골을 넣어야 하는 주문을 맡았고 시즌 초반부터 골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박스 안에서 골을 노리는 장면들이 늘어났습니다. 루니의 공격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투톱 공격수 중에 한 명이 미드필더 지역까지 내려와 효과적인 공격 연결 창출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바토프가 팀의 전술적인 흐름에 의해 쉐도우를 맡고 있습니다. 골 보다 공격 연결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경기력은 골잡이와 다른 역할입니다.
일각에서는 베르바토프를 여전히 골잡이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엄연히 공격수를 맡고 있기 때문에 골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르바토프가 토트넘 시절과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특징도 고려해야 합니다. 비록 토트넘 시절보다 골 숫자가 줄었지만 그 이유가 선수의 부진 때문인지, 아니면 팀 전술에 의해서 다른 역할을 맡는지 자세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후자격에 속하는 베르바토프는 골잡이가 아닌 쉐도우입니다. 골 숫자가 부족한 것은 축구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