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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허정무의 '박지성 집착', 무리한 선택이다

 

한국 축구가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본선 대비 체제에 돌입하면서 축구계의 시선이 '산소탱크' 박지성(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다음달 12일 파라과이와의 A매치 평가전을 위해, 지난 28일 박지성을 비롯 박주영(AS 모나코) 이영표(알 힐랄) 이근호(이와타) 등 해외파 9명의 대표팀 차출을 각 소속팀에 요청했습니다. 파라과이전은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이후에 치르는 평가전인데다 2개월 동안 A매치 공백 기간이 있기 때문에 대표팀 전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월드컵 본선 이전까지 주력 선수들의 꾸준한 호흡을 앞세워 조직력을 키우겠다는 것이 허 감독의 의중입니다. 박지성을 비롯한 해외파들의 대표팀 차출이 빈번할 전망입니다.

박지성, 무리해서 파라과이전 출전 시킬 필요 없다

하지만 박지성의 파라과이전 차출은 매끄럽지 못합니다. 파라과이전이 열리는 다음달 12일은 맨유의 중요한 일정과 겹칩니다. 맨유는 다음달 9일 첼시와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놓고 대결하며 16일에는 버밍엄 시티와 프리미어리그 개막 경기를 갖습니다. 박지성은 9일 첼시전이 끝나면 지구 반대편을 돌아 한국에서 파라과이전을 치러야 하며 그 이후에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 버밍엄 시티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A매치 차출로 인해 컨디션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을 임해야 하는데,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 차출' 카드를 고수하며 맨유에 대표팀 차출을 요청했습니다.

허정무 감독 입장에서는 박지성의 차출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파라과이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팀 전력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인 박지성의 존재감이 절실합니다. 대한축구협회(KFA) 대표팀 운영규정 제13조(선수의 의무) 2항에 보면 '(대표 선수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훈련 및 소집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표기 되었습니다. 파라과이전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규정한 A매치 데이인데다 박지성은 부상과 같은 특별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맨유가 대표팀 차출을 허락하면 국내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해야 합니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의 선택은 무리수입니다. 선수가 소속팀에서 처한 상황 그리고 현재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입니다.(물론 허 감독은 부인하겠지만) 박지성은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늦게 끝나면서 동료 선수들보다 더 많은 휴식기간을 부여받았습니다. 지난 24일 FC서울전을 앞두고 팀에 합류했지만 동료 선수들보다 시즌 준비가 늦었기 때문에 체력과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중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다음달 중순에 국내에서 파라과이전을 치르면서 팀에 복귀하면, 프리시즌때 컨디션 향상을 위해 노력했던 것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박지성의 몸과 심신이 힘들고 지칠 뿐입니다.

박지성은 그동안 A매치 차출 이후 맨유에서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펼치거나 잦은 결장을 범했습니다. 지난해 10월 말과 올해 4월에 걸쳐 맨유에서 3경기 연속 결장했던 주 원인도 다름 아닌 대표팀 차출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지난 2월 이란 원정 이후에도 맨유에서 지친 기색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란이 유럽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상기하면 대표팀 차출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문제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즌 막판 체력 저하로 고전했던 원인 역시 대표팀 차출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2004년과 2006년, 2007년에 걸쳐 대표팀 차출 이후 장기간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박지성은 지난 4월 8일 FC 포르투전 종료 후 국내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대표팀 경기를 뛰고 난 다음에는 늘 힘들었다"며 체력 저하에 시달렸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퍼거슨 감독은 지난 5월 3일 미들즈브러전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박지성은 대표팀에 지칠대로 지쳐서 돌아왔다. 그에게 2주 정도의 휴식을 주었다"며 박지성의 대표팀 차출 후유증에 대한 아쉬움을 간접적으로 나타냈습니다. 만약 파라과이전에 차출되면 프리미어리그 시즌 초반부터 컨디션 저하로 고전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듯, 초반 레이스에서 뒤쳐지면 그것을 만회하는데 적지 않은 고생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박지성이 맨유의 주전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여전히 세계적인 동료 선수들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경기력 저하로 고전하면 나니-토시치 같은 백업 멤버들에게 주전에서 밀리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또한 퍼거슨 감독이 주력 선수의 대표팀 차출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기로 유명한 지도자입니다. 5년 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가브리엘 에인세(이상 레알 마드리드)의 아테네 올림픽 본선 참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며 지난 2007년 10월에는 A매치 데이가 지나치게 많다는 불평을 늘여 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지성은 파라과이전 차출에 대한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박지성에게 무조건적으로 대표팀 차출을 요구하는 것은 선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박지성은 대표팀 선수이기 이전에 맨유 선수이며, 그의 '직장'은 대표팀이 아닌 맨유입니다. 아무리 파라과이전이 A매치 데이라고 할 지라도, A매치 데이는 월드컵 본선 전까지 여럿 있습니다. 반면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을 비롯한 시즌 초반에는 선수 본인의 한 시즌 농사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허정무 감독이 박지성이 팀 내에서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무리한 차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정무 감독 그리고 한국 축구는 박지성의 앞날을 위해 맨유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대인배의 정신을 발휘했어야 마땅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에는, 박성화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박지성의 베이징 올림픽 본선 차출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박지성 효과를 통해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것이 박 감독의 의도였죠. 그리고 이번에는 허정무 감독이 프리미어리그 새 시즌을 앞둔 박지성을 대표팀에 불러들이기 위해 맨유에 차출을 요청했습니다. 1명의 특급 선수에 '집착'하여 국제 무대 혹은 A매치 친선경기에서 좋은 성적 올리겠다는 한국 축구의 근시안적인 대표팀 운영이 박성화-허정무 감독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좋은 성적을 비롯한 긍정적 결과물을 거둘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악순환만 불러 일으킬 뿐입니다.

박지성이 한국 축구의 대들보이자 가장 중요한 선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축구가 박지성을 관리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세심하면 박지성은 대표팀 차출 후유증을 충분히 이겨내고 맨유 경기력에 꾸준한 공헌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소속팀 앞날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박지성이 대표팀의 에이스로서 믿음직스런 활약을 펼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지성이 맨유라는 직장에서 어떠한 차출 후유증 없이 순조로운 활약을 펼치면서 때로는 대표팀 주장 역할까지 성실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허정무 감독이 선수의 관점을 최대한 고려하여 대표팀 차출을 융통성있게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