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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맨유 베르바토프, 골잡이가 아닌 이유

 

'근육질의 발레리나' 디미타르 베르바토프(2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하 맨유)는 지난해 여름 이적시장 마감 당일 3075만 파운드(약 608억원)의 이적료로 올드 트래포드에 입성한 선수입니다.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베르바토프 입단 당시 베르바토프가 '맨유 레전드' 에릭 칸토나와 공을 다루는 침착성이 유사한 선수라고 칭찬했습니다. 맨유팬들도 베르바토프가 팀의 공격력을 높여주길 기대했죠.

하지만 베르바토프에 대한 여론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베르바토프는 올 시즌 맨유 이적 후 40경기에서 14골 8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에서는 29경기에서 9골 8도움을 올렸죠. 그러나 토트넘 시절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2006/07시즌 49경기 23골 15도움, 2007/08시즌 46경기 22골 13도움에 비하면 공격 포인트가 떨어집니다. 토트넘 시절에는 20골 10도움 넘는 것은 기본이었지만, 시즌 종료를 20일 앞둔 현 시점에서는 이 기록을 못 넘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지난 1월 27일 웨스트 브롬위치전 이후 110일 동안 도움을 올리지 못하고 있어 10도움을 깨기 힘들 듯 합니다.

그런 점 때문에, 여론에서는 베르바토프가 3075만 파운드의 가치를 다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3075만 파운드는 역대 프리미어리그 최고 이적료 2위에 해당하는 금액인데 토트넘 시절보다 공격 포인트가 부족한 것은 무언가 문제 있는게 사실입니다. 골과 도움 뿐만이 아닙니다. 토트넘 시절에는 부지런히 뛰지 않아도 로비 킨과 찰떡궁합 호흡을 맞추며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지만 빠르고 파상적인 움직임을 근간으로 하는 맨유 스타일에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전방에서 고립되는 경기가 많았죠. 특히 지난 3월 14일 풀럼전에서는 전반 45분 동안 단 7개의 패스만 연결하다가 질책성 교체 되었습니다.

사실 베르바토프는 2000만 파운드(약 395억원)의 가치에 맞는 선수입니다. 맨유가 지난해 여름 2000만 파운드에 영입하려고 했지만 토트넘이 3000만 파운드 이상의 이적료를 강력히 원하면서, 팽팽한 줄다리기 접전 끝에 3075만 파운드에 프레이저 캠벨을 토트넘으로 임대보내는 조건으로 합의했습니다. 3075만 파운드라는 금액은 두 팀의 갈등 과정에서 부풀리게 책정된 것일 뿐이죠. 베르바토프는 맨유 현지 팬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디미타르 베론'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이 베르바토프를 꾸준히 기용하는 이유는 골과 도움을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플레이메이커 입니다. 베르바토프는 지난 1월 4일 FA컵 3라운드(64강전) 사우스 햄튼전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 되었습니다. '긱스-웰백-나니' 3톱의 공격력을 미드필더진에서 뒷받침하는 역할을 소화했죠. 공격수와 미드필더 공간 사이에서 우아하고 섬세한 패스로 팀 공격을 주도했고 경기 후 <맨체스터 이브닝뉴스>로 부터 양팀 최고인 평점 8점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공격진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 자신의 경기력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최적의 자리를 찾는 모습이 역력했죠.

퍼거슨 감독은 베르바토프를 칭찬할 때마다 '칸토나와 같은 패스, 드리블, 볼 터치 능력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칸토나는 맨유 선수 시절에 공격형 미드필더와 쉐도우 스트라이커 역할을 충분히 해냈던 선수죠. 공교롭게도 베르바토프의 포지션과 같습니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이탈리아어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입니다. 3/4지점에서 활약하는 선수로서 공격진 바로 아래서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경기를 하는 포지션을 의미합니다. 그 자리가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쉐도우 스트라이커 입니다. 화려한 기술과 패싱력을 앞세워 경기를 치르는 베르바토프의 경기력과 맥이 닿습니다.

베르바토프는 토트넘 시절에 에이스로서 로비 킨과 공격을 도맡던 선수입니다. 하지만 맨유에서는 루니-호날두의 공격력을 뒷받침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최전방 공격수로서 골에 집중하기에는 그동안 고립되는 장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맨유에서는 토트넘 시절보다 더 많은 기동력을 요구하고 있고요. 또한 맨유에서는 퍼거슨 감독이 수시로 원하는 역할에 따라 경기를 치러야 합니다. 토트넘 시절에 비해 공격 포인트가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베르바토프가 팀의 공격을 주도하기에는 안정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 기복이 심하다보니 루니-호날두처럼 꾸준한 활약을 바라기에는 무리가 있는것이 사실이지요. 퍼거슨 감독이 아직까지 베르바토프를 중심으로 하는 공격력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감독 입장에서는 거의 매 경기마다 꾸준한 활약을 펼치는 선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베르바토프는 팀의 공격 전술, 그중에서도 부분 전술의 효과를 최대화 시키기 위해 패스에 무게감을 싣는 역할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르바토프는 맨유의 골잡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2일 미들즈브러전에서는 베르바토프의 역할이 점차 플레이메이커로 굳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냈던 경기입니다. 이날 베르바토프는 맨유의 4-1-4-1 포메이션에서 라이언 긱스와 함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았습니다. 원톱 페데리코 마케다의 공격력을 뒷받침 하면서(후반에는 테베즈가 원톱으로 교체 출전) 루니-박지성-긱스에게 여러차례의 패스를 연결했죠. 패스는 주로 하프라인을 넘어선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시도했고 중앙으로 찔러주는 전진패스보다는 대각선 패스가 많았습니다. 이날 패스 정확도 86%를 기록했는데(44개 시도 38개 성공) 루니의 72%(54개 시도 39개 성공) 긱스의 77%(48개 시도 37개 성공)과 비교하면 자신이 시도한 패스에 비해 질적인 패스들이 많았습니다.(참고로 박지성은 23개의 패스 중에서 20개를 성공시켰습니다.)

또한 이날은 미드필더 후방쪽으로 수비가담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적극적으로 수비 가담하거나 왼쪽 측면에서 공격을 전개하던 경기가 여럿 있었지만, 원톱 공격수로서 최전방에 발이 묶였던 경기들과 비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포지션에 따라 경기 스타일과 전혀 다릅니다. 4개의 인터셉트 장면도 주로 후방쪽에서 이루어진 것이죠. 태클은 5개를 했는데(2개 성공) 그 중 3개가 하프라인 부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르바토프는 이날 경기에서 전형적인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소화했던 겁니다. 국내의 어느 모 언론사가 미들즈브러전 종료 후 '골잡이 베르바토프'라고 보도했는데, 경기를 제대로 봤다면 베르바토프를 골잡이라고 표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베르바토프의 역할은 공격형 미드필더쪽으로 굳혀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맨유에서 점차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4-2-3-1에서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도맡을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에는 4-2-3-1보다 4-3-3을 더 많이 구사했지만 이것은 4-3-3에 가장 적합한 대런 플래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3의 자리에 루니-베르바토프-호날두를 놓고 원톱 자리에 카를로스 테베즈를 놓는 형태죠. 한마디로, 판타스틱4의 공격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테베즈가 올해 여름 팀을 떠날 경우, 맨유 이적설로 주목받는 카림 벤제마(리옹) 또는 마리오 고메즈(슈투트가르트)가 그 역할을 소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원톱에 적합한 후보군을 찾지 못한다면 루니를 원톱으로 놓고 프랑크 리베리(바이에른 뮌헨)를 영입하여 왼쪽 윙어로 놓을 것입니다. 4-4-2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베르바토프가 원톱의 공격력을 뒷받침하는 쉐도우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으면서 패스의 정확도를 높이는데 주력하겠죠.

퍼거슨 감독이 베르바토프를 영입한 것은 공격력 강화 때문입니다. 그 속을 들여보면, '베르바토프 효과'로 중원에서의 패스 정확도를 끌어올려 측면과 중앙 공격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것이죠. 2007/08시즌 당시에는 측면 옵션과 투톱 공격수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바꾸는 무한 스위칭 전술로 측면 공격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폴 스콜스가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다 안데르손의 주무기인 롱패스가(최근에는 짧은 패스가 늘어났죠.) 상대팀 수비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 나타나는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베르바토프를 공격형 미드필더,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두는 것은 맨유의 불안 요소를 잠재우는 것과 동시에 팀의 중앙 공격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르바토프는 그동안 골잡이로서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토트넘과 레버쿠젠 시절에 많은 골을 넣으며 '불가리아산 고공 폭격기'로 불렸기 때문이죠. 또한 190cm의 장신 공격수이기 때문에 타겟 성향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맨유에서의 베르바토프는 더 이상 골잡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원톱 공격수 자리에서는 자신보다는 170cm대의 단신인 루니(178cm)-테베즈(173cm)가 더 나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동안 맨유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역량이 점점 커지는 모습입니다.

여론에서는 베르바토프의 주된 문제점을 '골 부족'이라고 말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잃어가는 모양새 입니다. 지금의 베르바토프는 토트넘 시절처럼 골에 집중하는 골잡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퍼거슨 감독이 원하는 전술적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선수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