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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야기

타임캡슐에 보관하고 싶은 애장품은?

 

1999년 어느날 부터 인천방송(ITV, 훗날 경인방송으로 바뀜) 채널이 '서울에 거주하는' 저희 집 텔레비전에 방영되기 시작했습니다. ITV가 프로야구와 K리그 경기들을 자주 보여준데다 당시 LA다저스 소속이었던 박찬호 경기 중계권(ITV가 박찬호 효과로 인지도를 높였죠.)을 따면서 거의 매일마다 시청했습니다. 그러더니 일요일 아침마다 방영하는 만화 <아따아따>가 재미있어서 항상 즐겨봤습니다.

아따아따는 어느 한 가족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린 만화로서 아빠와 엄마, 4살 아들(영웅)과 2살 딸(담비)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아빠와 엄마가 지독한 말썽꾸러기인 영웅이와 담비를 키우면서 겪는 일들을 만화로 다루었는데, 초등학생과 중학생 뿐만 아니라 나이 어린 자녀를 둔 부모님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죠. 지금도 저 같은 또래 세대에서는 아따아따가 '추억의 만화'로 회자될 정도로 존재감이 강했습니다. 마치 2km 반경까지 크게 들릴 듯한 담비의 짜증나는 울음소리가 정말 '작살'이었죠.(아따아따 즐겨 보신분들은 담비의 존재감을 잘 아실겁니다.)

그런데 그 만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고교시절에 자신의 애장품을 산에 묻었던 것을 15년이 지난 뒤에 꺼내려고 했던 것이죠. 훗날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땅속에 묻었던 것이죠. 그 시절 자신이 좋아하던 야구선수와 연예인 사진들을 나무 보관함에 담으며 산에 묻었던 겁니다. 그 보관함이 바로 '타임캡슐'이죠.

타임캡슐이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록이나 물건을 담아서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주로 땅 속에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서울시에서는 지난 1994년에 수도 600주년을 맞으면서 서울의 생활과 풍습, 인물, 문화예술 등을 상징하는 문물 600점을 타임캡슐에 묻으며 '수도 1000년째인' 2394년에 개봉하도록 했죠. 그 당시에 호기심과 감수성이 풍부했던 저로서도 '나도 아따아따에 나오는 아빠처럼 타임캡슐에 뭔가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했던 애장품들을 타임캡슐에 보관해서 나중에 찾는다면, 저의 아들이나 딸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저로서도 그때가 되면 어렸을적의 추억들을 회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타임캡슐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안타깝게도 저의 꿈은 10년째 행동으로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아따아따에 등장하는 아빠는 자신의 애장품을 산에 묻을 수 있었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죠. 제가 소심형이라 물건 잃어버리는 것을 난감하게 받아들이는 스타일인데, '타임캡슐을 누가 가져가거나 파손되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타임캡슐에 묻고 싶은 물건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타임캡슐에 대한 미련이 점차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서 무언가 추억속에 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따아따 관련 자료를 보다가 문뜩 타임캡슐에 대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는 타임캡슐에 보관할만한 애장품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땅속에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물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타임캡슐에 나의 애장품을 담아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제가 타임캡슐에 보관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1. 초등학교때 받았던 상장과 만점 받은 시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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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초등학교 1학년때 받았던 상장과 6학년 학력평가 사회과목때 만점(25문제) 받았던 시험지 앞면과 뒷면. 시험 점수에 25점이 아닌 100점으로 표기되었다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초등학교때 저의 친구 집에서 항상 보던 것이 학교에서 받았던 상장이었습니다. 상장들을 유리 액자에 보관해서 벽에 걸어두는 것이죠. 특히 11세 때에는 아빠 친구집에 방문했는데 저와 나이가 똑같은 녀석이 자신의 방 벽을 상장으로 '도배'했던 겁니다. 6학년도 아니면서 학교에서 받았던 상장이 그리도 많던지, 정말 부럽더군요.(그 친구는 결국 S대 법학과에 갔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상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제가 열등감을 느꼈던 적이 많았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애국조회가 되면 상장 받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나는 왜 남들보다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험에서도 매번 쉬운 문제들을 틀리면서 선생님에게 구박만 잔뜩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제가 학교에서 받았던 몇 안되는 상장들이 정말 귀하게 느껴지더군요. 초등학교 1학년때 받았던 불조심 포스터 우수상을 비롯해서 글짓기와 각종 대회를 통해 받았던 상장들을 볼때마다 어찌나 반갑던지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라는 감탄에 젖게 됩니다. 상장들을 계속 보관하게 되면, 어린 시절에 내가 잘한게 무엇이었는지 멋훗날에 키우게 될 아들과 딸에게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6학년 학력 평가때는 사회 과목에서 만점(25문제 다 맞아서 25점) 받았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 유일하게 만점 받던 때가 이 때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학교 다닐때 만점 받은적이 있었다'는 자랑을 하고 싶네요. 물론 공부를 아주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이런 자랑을 한적이 없었습니다.

2. 학창 시절에 듣던 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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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학창 시절 최고의 취미는 음악 듣기였습니다. 많은 가수들의 음악들을 테이프로 들었을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었죠. 아쉬운것은 예전에 구매했던 테이프 중에 절반이 사라진 것이죠.]

학창 시절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라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가요에 흠뻑 빠지게 되었죠. 나중에는 음반을 직접 구매하고 엄마에게 라디오와 워크맨을 사달라고 조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이동네 레코드점에 나오면 다른 학교 학생들과 줄서서 기다릴 정도로(요즘에는 음반 판매 저조로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렵지만) 음악에 대한 집착이 많았던 소년이었습니다. 당시 만원을 훌쩍 넘겼던 CD보다는 3500~5000원하던 테이프가 학생 이었던 저에게 가장 알맞은 음반 구매 대상이었죠. 게다가 워크맨이 CD플레이어보다 휴대하기 더 편해서, 테이프가 가장 제격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특정 가수의 음반 발매를 앞두게 되면 '과연 무슨 노래를 듣게 될까?'라며 설레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테이프를 바꿔가면서 음악을 들었던 적도 있었고요. 이 노래는 어떻고 저 노래는 또 어떻고 그 외 등등 음악에 관한 얘기 꽃을 피울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음악들을 접하면서 학창시절을 활기차게 보냈습니다. 테이프의 가격이 저렴하고 언제 어디서든 듣기 편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주로 테이프를 구입하던 시기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집중되었는데, 나중에 자녀들에게 타임캡슐 속에 있는 테이프들을 공개하면서 그 시절 어떤 가수가 잘나갔고 어떤 음악들이 좋았는지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인터넷으로 음악 듣는 것보다 테이프로 음악듣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때의 에피소드도 전하고 싶습니다.

3. 히딩크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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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01년 12월 어느 대형마트 행사장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사인 받았습니다.]

고2였던 2001년 12월에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면서 서울 문래역 근처에 있는 어느 대형마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축구게임 <FIFA 2002>를 구매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탤런트 김정은과 거스 히딩크 감독의 사인회에서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죠. 특히 히딩크 감독은 '그때도' 열렬한 축구팬이었던 제가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명장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평생 없을거라 생각했던 저였기에(2007년에는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과 호날두를 서울 월드컵 경기장 인터뷰장에서 직접 봤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사인을 꼭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험 끝나자마자 사인회 장소로 부랴부랴 이동해서 거의 맨 앞줄의 순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을 직접 보니까 체격이 엄청 크더라고요. K리그 수원 블루윙즈 서포터였던 제가 축구장에서 보던 운동선수와 감독들보다 더 컸습니다.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만만찮더군요. 그래서 히딩크 감독에게 사인 받을 순서가 왔을 때 정말 얼떨떨했는데, 히딩크 감독 옆에 있던 여성 통역관님이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사인 끝나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오른손을 내밀었더니 히딩크 감독과 주변분들이 엄청 웃었던 겁니다. 무섭게 느껴졌던 히딩크 감독의 웃음이 어찌나 귀엽던지, 아직도 그때가 재미있게 기억납니다. 그때는 히딩크 감독 자질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죠. 히딩크 감독 사인을 타임캡슐에 꼭 보관해서, 세계 최고의 축구 감독 사인을 다음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날은 저에게 엄청난 행운이었으니까요.

4. 수원 유니폼과 머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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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03-04시즌 수원 유니폼과 2002년 여름에 출시되었던 수원 머플러입니다. 경기장에 열심히 다니면서 응원하던 때는 16번(김영선)이 아니라 22번(고종수) 유니폼 혹은 파란색 계열의 옷을 주로 입었죠. 지금은 고종수 유니폼이 없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살면서 최고로 행복하게 지냈던 때가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로 열렬히 활동하던 때였습니다. 어렸을적에 박건하와 고종수를 좋아하다보니 수원팬을 하게 되었죠. 나중에는 그랑블루가 되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쌓게 되었습니다. 비록 응원은 잘 못했지만(그래서 일반 관중석에서 경기 보던 날이 많았습니다.) 경기장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까 축구에 대한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더군요. 중학교때는 동대문과 목동에서 수원 경기를 봤었고, 고등학교때는 수원까지 가더니, 대학교 다니면서 부터는 부산-울산-포항-대전 같은 지방 구장까지 가면서 수원 경기 관전 및 응원을 빼먹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한 팀도 응원할 수 없는 신분이고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만, 몸이 한창 피끓었던 5~6년 전의 추억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수원 서포터로서 가장 행복했을때가 2004년 정규리그 우승 때 였습니다. 이운재가 승부차기에서 포항 5번째 키커로 나왔던 김병지의 슈팅을 몸으로 막아내면서 짜릿했던 우승의 순간을 만끽했던 것이죠. 그때의 장면이 너무나 감격적이다 보니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기뻐서 울었던때는 저의 인생에서 이때가 유일했을겁니다. 군대 시절에는 수원을 초코파이보다 더 좋아했을 정도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원 소식이 정말 반가웠습니다. 이등병 막내때는 아무도 없을때 TV로 수원 경기 보다가 내무실 왕고에게 들키는 바람에 엄청 혼났던 추억도 있었습니다. 2007년 군 제대 이후에는 개인 사정으로 그랑블루 활동과 멀어지게 되었지만, 수원 서포터 시절의 추억이 아직도 저에게 반갑게 느껴집니다. 그 추억의 증표가 수원 유니폼과 머플러인데, 나중에 자녀를 키우게 되면 타임캡슐에 있는 유니폼과 머플러를 보여주면서 수원 서포터 시절의 추억들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때는 자녀들도 수원을 좋아하게 될거에요. 아마도...

5. 군대 시절 유격 훈련 받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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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격 훈련때 레펠 훈련 마치고 도하 완료하던 장면. 몇십미터 낭떠러지에서 내려왔던 그때의 기분, 아직도 짜릿합니다.]

사실 저는 군대에 가기 싫었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던 2005년 4월 이전에 훈련소 인분 사건 및 각종 병영 악습들이 메스컴을 통해 줄기차게 보도되면서 2년 동안 그런 피해를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다가 부모님이 계속 군대 가라며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방색 전투복을 입게 되었죠. 당연히 군대에서의 적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던 곳에 온데다, 이것 저것 시키면서 사람들과 얼굴 붉히는 생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죠. '도대체 내가 왜 이런곳에서 고생해야 하는가?'라는 마음 속의 자책감을 느낄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이등병때 받았던 유격 훈련때는 몸까지 아프고 훈련까지 열외 되었던 적이 있어서, 온갖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보다는 남들보다 체력이 약했기 때문에 모든 훈련을 소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까지 조직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으니, 뭐 어쩔 수 없었죠.

그러다가 상병 2호봉때 유격 훈련 받을때는 마음 가짐을 단단히 먹기로 했습니다. 중대장님과 부중대장님 그리고 보급관님이 "이번 훈련 열심히 하면, 넌 반드시 사회에서 성공할 것이다"며 용기를 불어넣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중대에서 가장 체력 약하고, 마음도 여리고, 자신감 또한 결여되었기 때문에 관심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이랬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도맡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군대 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훈련들은 묵묵히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 장애물 훈련이었던 레펠 훈련이 문제였습니다. 몇십미터 낭떠러지에서 레펠에 매달리며 밑으로 떨어지는 것인데, 막상 밑을 보니까 정말 무섭더군요. 그래서 시간을 계속 끌다가 다리가 완전히 풀리면서 벌벌 떨었죠. 그러자 간부님들이 사방 이곳저곳에서 "너는 분명히 할 수 있어. 그거 못하면 넌 남자가 아냐", "지금까지 잘했는데 이제와서 못하면 어떡해" 등등 온갖 쓴소리와 격려들을 하셨죠. 어떤 간부는 레펠 내려오는 순서를 다시 가르치기도 했죠. 결국에는 이를 악물고 꾹 참으며 몸을 공중으로 맡겼습니다. 내려올때의 기분이 정말 짜릿하고 재미있더군요. 제가 인생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을 만끽하니까 정말 즐거웠습니다. 레펠 훈련 마치고 "35번 교육생 도하 완료"(올빼미에서 교육생으로 명칭이 바뀜)라고 큰 목소리로 외칠때 간부들을 비롯한 선임들이 잘했다고 격려할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치 '개과천선'한 기분이었죠. 그때 레펠에서 내려왔던 사진을 지금도 보관중인데, 나중에 자녀에게 사진 보여주면 '아빠,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었어? 우와 대단하다!'라는 좋은말을 들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