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축구팬들은 스콜라리 체제에서 좌초하던 첼시가 지난 2월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고공행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마법기질'을 꼽고 있습니다. 끝없이 내림세를 거듭하던 첼시가 트레블(3관왕)을 노릴 수 있는 발판의 기회를 마련한 것은 히딩크 감독 부임과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과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 및 FA컵 4강 진출,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리버풀전 3-1 승리 등등 트레블 달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이러한 첼시의 가파른 행보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사람은 단연 히딩크 감독 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 혼자서 첼시의 오름세를 주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축구는 11명이 뛰는 단체 종목이기 때문에 감독과 선수가 서로 합심해야 좋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 11명 중에서도 공수 양면에 걸쳐 경기의 중심 역할을 바로 잡는 믿을맨이 있다면, 거의 매 경기마다 좋은 성과를 달성하기가 수월합니다. 여기에 여러 포지션까지 소화할 수 있다면 감독 전술 운용에 커다란 효과와 이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스콜라리 체제에서는 해당 선수의 긴 부상 공백이 화근이 되어 끝없는 내리막을 거듭했지만 히딩크 체제에서는 그 선수가 복귀하면서 시즌 막판인 지금까지 가파른 상승 곡선을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첼시의 살림꾼이자 세계 최정상급 미드필더로 꼽히는 '중원의 들소' 마이클 에시엔(27, 가나 출신)입니다.

에시엔, 첼시 전력에 없어선 안될 '살림꾼'

현대 축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특히 팀의 중원에서 궃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살림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궃은 역할을 해야 공격 옵션들이 수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공격에 전념할 수 있으며, 수비수들은 살림꾼이 자신의 앞선에서 상대팀 공격을 활발히 끊는 장면에 힘을 얻으며 부담없이 수비에 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살림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수비에 전념할 수 있는 중원 옵션이 없다면 미드필더진에서의 압박이 약해지고 볼 점유율은 물론 수비에서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수비 영역을 뛰어 넘어, 살림꾼이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대 축구는 선수들끼리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포지션 파괴 현상까지 두드러지면서 수비형 미드필더에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기본적인 몸싸움과 상대 공격의 흐름을 차단하는 수비력은 물론이며 넓은 시야를 앞세운 예리한 패싱력, 상대팀 압박을 한꺼풀 벗겨낼 수 있는 감각적인 개인기와 볼 키핑, 그리고 골에 이르기까지 '슈퍼맨'을 방불케 하는 장점들을 골고루 갖춰야 합니다. 살림꾼 스타일의 미드필더가 가장 완벽하게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모델이 바로 이러한 유형이죠. 에시엔은 이러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리버풀과의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는 에시엔이 첼시 전력에 중요한 선수이자 세계 최고의 클래스를 지닌 살림꾼인지 실감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경기였습니다. 첼시와 상대했던 리버풀은 '제토라인' 제라드-토레스 콤비를 앞세워 많은 골을 넣는 팀이자 공격 의존도가 높은 팀인데 맨유와 레알 마드리드, 아스톤 빌라가 두 선수의 출중한 득점력 앞에 대량 실점을 헌납하여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에시엔은 달랐습니다. 아프리카 선수 특유의 빠른 순발력과 천부적인 수비력을 앞세워 미드필더진에서 스티븐 제라드로 연결되는 물줄기를 번번이 차단했고, 제라드의 발을 꽁공 막는 타이트한 압박 수비로 포백 수비의 부담을 덜어 주었습니다.

첼시가 전반 5분 실점 이후 전열을 되찾아 세 골을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에시엔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에시엔이 '알론소-루카스'로 짜인 상대 더블 볼란치의 공격 활로를 번번이 차단하고 미하엘 발라크와 프랭크 램퍼드의 협력 수비까지 짜임새 있게 이뤄지면서 첼시가 전반 중반부터 허리싸움에서 우세를 점하더니 경기 종료까지 무수히 많은 공격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히딩크 감독의 '리버풀 격파'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결정적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공격에서도 에시엔의 진가는 빛났습니다. 적극적인 문전 침투로 루카스 레예바를 여러차례 농락하더니 '말루다-드록바-칼루'로 짜인 스리톱에게 많은 골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살림꾼 자리에는 발라크가 뒷 공간에서 커버 플레이를 했으니, 중원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에시엔의 패싱력은 양팀 선수 중에서 가장 정확도가 높았습니다. 이날 에시엔은 55개의 패스 중에 47개를 성공했는데 85%의 높은 패스 정확도를 기록했습니다. 동료 미드필더인 램퍼드(40/67, 60%) 발라크(30/45, 67%)가 60%대의 패스 정확도를 기록했으니, 첼시 미드필더진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 지원을 했습니다. 첼시 3톱인 말루다(24/40, 60%) 드록바(19/33, 58%) 칼루(21/35, 60%)보다 더 월등한 기록이죠. 에시엔의 패스 정확도는 4-2-3-1을 구사했던 리버풀 미드필더들을 앞서고 있습니다. 제라드(33/42, 79%) 리에라(19/26, 73%) 알론소(71/90, 79%) 카윗(45/65, 69%) 루카스(50/62, 81%)를 압도하고 있지요. 리버풀 미드필더들이 첼시 미드필더들보다 패스 횟수가 많은데다 짧은 패스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에시엔의 패싱력이 얼마만큼 뛰어난지 알 수 있습니다.

에시엔의 진가는 리버풀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달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램퍼드-미켈-발라크'의 앞선에 위치한 공격형 미드필더를 소화하며 팀 공격을 진두 지휘했습니다. 중원에서의 빠른 패스로 상대 중원의 허를 찌르게하더니 수비 가담시에는 상대 오른쪽 공격을 찰거머리처럼 끊으며 동료 선수들의 수비 부담을 덜어줬습니다. 그리고 전반 45분에는 자신이 직접 동점골을 넣으며 첼시의 8강 진출을 공헌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당시 6개월의 부상 공백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되었던 터라 실전 감각 저하가 우려되었지만, 에시엔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무리뉴 체제였던 2006/07시즌에는 팀의 수비수 부족으로 센터백과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하여 뛰어난 수비능력을 발휘했으니, 이러한 믿을맨의 진면목이 단련이 되어 히딩크 체제에서 무르익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히딩크 체제 초기에는 미켈이 살림꾼으로서 나름 제 몫을 다하며 붙박이 주전으로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미켈은 종종 집중력을 잃는 잔실수를 범하면서 팀 전력의 안정감을 실어주지 못했고 그 여파가 후반들어 상대팀에게 경기 주도권에서 밀리는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살림꾼은 90분 동안 공격과 수비 모든 영역에서 팀 전력에 안정감을 실어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에시엔의 중요성이 절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에시엔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고 경기 감각을 되찾으면서 램퍼드와 발라크의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까지 무르익었고, 첼시의 미드필더진은 한달전보다 더욱 견고하고 강해졌습니다. 현재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한 팀들 중에서 가장 꾸준하고 안정감 넘치는 활약을 펼치는 미드필더진을 꼽으라면 단연 첼시일 것이며 그 중심엔 에시엔이 있습니다.

첼시는 클럽 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도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를 성공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지난 2월 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면서 많은 경기를 통해 승승장구를 거듭하더니 경기력의 완성도를 높이며 유럽 제패에 대한 의욕을 강하게 다질 수 있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는 히딩크 감독의 '마법 효과'가 빛을 발했지만 언제까지 마법이 지속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동안 여러 팀의 감독을 맡으면서 항상 4강 문턱에서 무너진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일이죠.

그런 첼시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무기가 바로 '에시엔 효과' 입니다. 무리뉴 체제에서 많은 우승을 이끌었던 에시엔의 살림꾼 역할은 첼시가 2000년대 중반부터 유럽 무대를 주름잡는 강팀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제패 및 트레블 달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러한 에시엔의 진가는 히딩크 감독과 첼시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나이스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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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첼시의 우승을 기원합니다만 2009.04.09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시즌 최강팀은 바르셀로나로 보입니다.
    공격진의 파괴력은 예전 지단시절 지구방위대 레알마드리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보일정도입니다.ㄷㄷㄷ

  2. pennpenn 2009.04.09 1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국축구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감탄합니다.

  3. 으응 2009.04.09 1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국팀 칼럼 읽으니까 정말 색다르네요.
    역시 효리사랑님 글이 마음에 드는군요

    항상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