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포츠 종목이든 감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팀의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들을 다독거리며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가 바로 감독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마음으로 선수들을 격려하고(덕장) 때로는 야단치고(용장) 때로는 상대를 꺾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짜내며 온갖 전술들을 구사합니다.(지장) 여기까지는 명장들의 3대 조건이지만 명장을 뛰어 넘는 또 하나의 존재가 경기에서 늘 이긴다고 하여 '복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주로 마법사 같은 기질을 내뿜는 감독들이 전형적인 복장 스타일이죠. 그 대표 주자가 바로 거스 히딩크 첼시 감독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불과 10여일 전, 계속된 성적 부진에 허덕여 리그 4위로 추락한 첼시의 사령탑을 맡았습니다. 최근 1년 6개월 동안 무리뉴-그랜트-스콜라리가 경질되었던 첼시의 '독이 든 성배'를 받으며 '3개월 임시 대타'로 나선 것이죠. 자신을 감독으로 앉힌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우승을 원했던 만큼, 첼시의 시즌 후반 대도약을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문제는 히딩크 감독에게 주어진 여건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21일 아스톤 빌라전 이전까지, 선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승점 10점 차이로 뒤져, 앞으로 13경기 남은 상황에서 맨유를 잡기 위해 4경기를 따라 잡아야 하는 절박함에 직면했습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지난 19일 <유나이티드 리뷰>를 통해 "히딩크 감독이 오더라도 첼시의 우승은 힘들 것이다"고 전망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더욱이 선수들이 잦은 감독 교체로 전술적인 흐름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데다 스티브 클라크 수석코치의 웨스트햄 이적으로 체력이 약해진 것, 스콜라리 체제에서 불거진 기강 문제 등등 성적 향상을 위해 많은 것을 잡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감독이라면, 여러가지 난관에 놓인 첼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선수들의 항명설까지 끊이지 않았으니 감독 권위마저 지키기가 버겁겠죠. 불과 지난 유로 2008까지 포르투갈 대표팀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스콜라리 전 감독이 실패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전술 부재에서 터진 선수단 장악 실패였지요.(두번째 이유는 첼시 구단의 호비뉴 영입 실패) 시즌 초반 선두였다가 4위로 떨어져 선두 맨유와 승점 10점 차이로 떨어졌으니, 감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만족하지 않았으니(그랜트 전 감독의 경질 사유) 우승 아니면 경질이죠.
결국 히딩크 감독이 아스톤 빌라와의 데뷔전에서 꺼내든 카드는 바로 '배짱'이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20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2006년 독일 월드컵, 유로 2008에서 발휘한 특유의 배짱으로 첼시에게 닥친 위기를 정면으로 극복하고자 했죠. 한 경기라도 비기거나 패하면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안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며 두둑한 배짱을 밀고가는 뱃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랜 감독 경험으로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승승장구했던 히딩크 감독의 배짱은 그동안 무기력하던 첼시의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1-0 승리였기에 단순 이상의 값진 업적을 거둔 것이죠.
히딩크 감독이 맞붙은 아스톤 빌라는 그야말로 '난적'이었습니다. 마틴 오닐 아스톤 빌라 감독이 팀의 리그 3위 돌풍으로 올 시즌 우승을 자신했었기에 첼시전에서 만만치 안은 공세를 가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더욱이 첼시는 아스톤 빌라 원정에서 9경기 연속 무승(6무3패)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낮게 점쳐졌습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이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승점 3점 이었습니다. 스콜라리 감독이 추구했던 틀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자신만의 용병술을 과감히 구사하여 데뷔전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것이죠. 게다가 아스톤 빌라 원정 징크스까지 격파했으니 그야말로 특유의 '마법'을 부린 셈입니다. 그의 데뷔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론에서는 '히딩크 감독이 첼시에서 통할까?'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결국 첫 경기부터 긍정적 결과가 나타나면서 첼시의 역전 우승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술적인 부분에서 히딩크 감독 특유의 배짱이 빛났습니다. 첫째로, 그랜트-스콜라리 체제에서 실패했던 '드록바-아넬카' 투톱 카드를 꺼내들며 최근 팀 부진의 주범으로 꼽혔던 이들을 믿고 선발로 기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름만으로도 리그 정상급 투톱으로 활약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조합이기 때문에 선발 출장이라는 동기 부여를 제공하며 해결사 다운 활약을 펼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레이 윌킨스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던 지난 21일 왓포드와의 FA컵 16강전에서는 아넬카가 해트트릭을 달성했고 주중 자체 연습 경기에서는 드록바가 1골을 넣었으니, 투톱 성공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두 선수는 히딩크 감독의 믿음 속에 아스톤 빌라전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측면쪽으로 넓게 움직이며 2선에 포진한 선수들의 공격 침투 공간을 만들더니 첼시가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죠. 니콜라스 아넬카는 특유의 넓은 움직임으로 미드필더진과 수시로 패스를 연결하며 공격 기회를 끊임없이 창출했고 디디에 드록바는 상대 수비가 밀집된 좁은 공간에서 동료 선수들의 공격을 돕기 위해 스크린 플레이를 펼치는 궃은 역할을 소화했죠. 결국 전반 18분 아넬카가 문전 중앙에서 램파드의 감각적인 전진패스를 이어받아 오른발로 결승골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드록바는 골을 넣지 못했지만 "드록바의 몸이 올라왔다. 드리블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장지현 MBC ESPN의 평가처럼 이전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펼쳤습니다.
두번째는 살로몬 칼루의 포지션 변신 이었습니다. 그동안 조 콜의 백업이자 측면 윙어로 활약했던 그는 아스톤 빌라전에서 4-3-1-2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아 사실상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번 경기에서 꼭 이기겠다는 히딩크 감독의 변칙 기용이었기 때문에 '이를 간파하지 못한' 아스톤 빌라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전반 초반 부터 수비벽이 와르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칼루는 드록바와 아넬카의 공간 창출에 힘입어 빠른 순발력으로 상대 수비벽을 무너뜨리는 일등 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첼시가 전반전에 공격 점유율 64-36, 슈팅 횟수 11-6(유효슛 4-1)의 우세를 나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칼루였고 그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던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히딩크 감독의 4-3-1-2 작전은 2004/05시즌 PSV 에인트호벤 시절에 쓰던 용병술입니다. 기본 전형이 4-3-3 이었지만 전술 변화가 필요한 경기에서 4-3-1-2를 구사하여 상대의 허를 찔렀죠. 1에 포진한 선수는 다름 아닌 박지성 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소위 말하는 '잠그기'였습니다. 첼시는 후반 9분 칼루를 빼고 데쿠를 투입시키면서 1-0의 승리를 지키겠다는 수비 위주의 작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데쿠는 최근 히딩크 감독에게 부여받은 홀딩맨을 맡아 팀의 수비벽을 단단히 다지게 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후반 초반부터 지키기 작전에 성공한 것인데, 언제 골이 터질지 모를 프리미어리그에서 40분 동안(인저리 타임 4분 포함) 잠그기를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이러한 면모는 2004/05시즌과 2005/06시즌 수비 위주의 경기로 여러차례 1-0 승리를 거둔 무리뉴 감독 시절을 엿보이게 합니다. 히딩크 감독의 배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번 아스톤 빌라전에서 드러난 것 처럼, 첼시 선수들은 히딩크 감독이 요구한 색깔들을 충분히 해내며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스콜라리 체제에서 어수선했던 그들이 승리를 위해 단합된 호흡을 자랑하며 아스톤 빌라 원정 징크스를 깬 것이죠. 이것이 바로 '히딩크 효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여러 팀에서 마법같은 기질을 발휘했던 히딩크 감독이 역전 우승이라는 결과를 거두려면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승부의 키를 찾아 두둑한 배짱으로 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의 배짱이 6년전 자신이 한국 땅에서 히트 시켰던 '하늘 만큼 땅 만큼'이라는 유행어처럼 리그 최종전까지 빛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