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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박지성에게서 홍명보의 향기가 난다



그동안 한국 축구를 열렬히 사랑했던 축구팬들이라면 박지성과 홍명보를 착각할지 모를 일입니다. 2009년의 박지성과 90년대-2002년 한일 월드컵의 홍명보는 서로 시대가 달랐을 뿐, 고비에서 팀을 이끌어줄 리더로서 구심점으로 활약하여 선수들을 독려했던 '한국 축구의 아이콘'입니다. 과거 대표팀의 상징이 홍명보였다면, 지금은 박지성이 허정무호의 선봉에 서고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두 선수가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나이대가 서로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홍명보는 25세였던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에서 생애 첫 대표팀 주장 역할을 소화했습니다. 그는 이 경기에서 35m 거리의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켜 한국 축구의 매운맛을 세계에 떨쳤죠. 박지성은 27세였던 지난해 10월 11일 우즈베키스탄전을 앞두고 김남일을 대신하여 대표팀 주장을 맡아 '캡틴 박'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만큼 리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두 선수의 사례는, 나이 많은 노장 선수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줬던 한국 축구의 풍토와 대조적이어서 눈길을 끕니다. 어느 팀을 가든 노장 혹은 연장자가 주장을 맡는 경우가 많지만, 박지성과 홍명보는 철저하게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죠. 이들은 젊은 나이에 팀 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주장을 맡아 어느새 팀의 상징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습니다.

팀에서의 비중 또한 높습니다. '박지성이 없는 대표팀 공격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허정무호 공격은 박지성의 종횡무진 움직임을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갑니다. 그 결과 허정무호는 박지성이 주장으로 활약한 4경기에서 3승1무를 거뒀으며 그 1무인 이란전은 박지성이 후반 36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던 경기였기 때문에 그의 빛나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해 9월 북한전까지 졸전을 벌이던 허정무호가 10월 11일 우즈베키스탄전 이후 전력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 또한 그가 주장으로 선임된 이후였죠.

더욱이 박지성의 주장 선임은 허정무 감독의 판단이 아닌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서로 논의하여 만장일치로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박지성이 팀 전력에 없어선 안될 선수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축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선수 위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던 허정무호에 있어 박지성의 존재는, '한국과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은 젊은 선수들에게 큰 동기 부여를 제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겁니다. 그 결과 무기력한 움직임을 일관했던 선수들의 모습은 '캡틴 박' 효과에 힘입어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활약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근호, 기성용, 이청용, 오범석 같은 젊은 선수들이 팀 전력에 없어선 안될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홍명보 또한 빼놓을 수 없겠죠. 홍명보는 3백 라인의 스위퍼 역할을 맡아 두 명의 스토퍼와 미드필더들을 독려하여 수비라인을 조절했습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을 필드에서 지휘하여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절대적 주역이 다른 누구도 아닌 홍명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우리들에게 '영원한 주장'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캡틴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선수의 면모를 비춰볼때, 주장의 비중과 역할에 따라 팀 성적이 좌지우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지난해 존 테리, 스티븐 제라드, 데이비드 베컴, 솔 캠벨 같은 팀 내에서의 영향력이 막중한 선수들을 상대로 주장 테스트를 치렀던 것과(결국 테리로 최종 확정되었죠.) 같은 맥락입니다. '홍명보 시대'를 거쳐 '박지성 시대'를 맞이한 대표팀의 앞날 성적이 밝게 비춰지는 여운이 따른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박지성과 홍명보는 주장으로서의 스타일이 서로 다릅니다. 홍명보가 카리스마를 내세워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소위 '군기반장'스타일 이었다면 박지성은 '실력'으로 말하는 선수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평소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인 박지성의 카리스마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도 한국 대표팀은 카리스마형 주장이 필요하다', '주장 자질은 박지성보다 김남일이 더 낫다'는 것이 그것이죠. 하지만 디에고 마라도나와 지네딘 지단, 데이비드 베컴(한일 월드컵, 독일 월드컵 시절)이 자국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가장 최근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아스날의 주장을 맡은 것은 이들의 실력이 팀 내에서 가장 월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장의 맹활약은 다른 동료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계기를 일깨우며, 이는 곧 팀의 전력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박지성 효과의 장점입니다.

특히 이란전에서는 '실력으로 말하는' 박지성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습니다. 박지성은 대표팀에 늦게 합류한 불리함을 안고 경기를 치렀습니다. 몸이 무거운 불리함 때문에 호세인 카에비의 전담 마크에 묶여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팀의 패색이 짙어가던 후반 36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으며 패배 위기에 몰렸던 허정무호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장의 역할입니다. 팀 전력의 중심으로서 가장 결정적인 활약을 했기 때문에 그가 주장을 맡고 있는 것이며, 선수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이유가 이 같은 장면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지성 효과가 '대세'라고 해서 홍명보의 리더십이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홍명보가 주장을 맡던 시기에는 선수들을 휘어잡는 누군가의 리더십이 절실했기 때문이며, 지금은 시대가 바뀌면서 부드러운 스타일의 주장이 선호를 받는 추세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홍명보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시절, 벤치 멤버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우울함을 덜어주는 등 나름대로 부드러운 면모가 있었습니다. 주장을 오래 맡았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을 능숙하게 다독일 수 있었던 것이죠.

박지성은 지난해 10월 주장을 맡은 뒤 "경기장 안팎에서 즐겁게 경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후배 선수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하여 친밀감을 유지하고 코칭스태프와 끊임없이 소통하여 교감하는 등 주장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남기고 있습니다. 비록 방법은 다르겠지만, 주장으로서의 영향력과 존재감 만큼은 홍명보의 향기를 충분히 떠올리게 합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그리고 그 이후 한국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하게 될 박지성의 진가가 날갯질을 활짝 펼칠지 앞으로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