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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박지성 스페셜, 한국 축구 최고 선수의 위엄

박지성 스페셜 포스팅을 올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지성이 7월 25일 오늘 K리그 올스타전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칩니다. '산소탱크', '캡틴 박', '아시아의 영웅'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들을 남기며 한국 축구에 엄청난 업적을 기여했던 박지성이 현역 선수로서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모습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선수였던 박지성 스페셜 포스팅을 그동안 쓰고 싶었는데 오늘 올리게 되었네요.

 

이 포스팅에서 올리는 사진과 동영상은 모두 제가 촬영했습니다. 사진은 2011년 9월 박지성 축구센터에서 취재하면서 찍었습니다. 2014년 5월 PSV 에인트호벤이 수원 블루윙즈와 친선 경기를 펼쳤을 때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들도 있고요. 저만의 박지성 스페셜을 올립니다.

 

 

박지성은 올해 33세입니다. 신장은 178cm이며 축구 선수치고는 큰 체격이 아니었으나 강철같은 체력과 부지런한 움직임, 끈질긴 승리욕에 특유의 성실한 면모까지 더해지면서 항상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겠다는 마인드가 습관으로 굳어지면서 한국 대표팀과 소속팀에 걸쳐 자신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했고 특히 큰 경기에 강했습니다. 월드컵 본선 3개 대회에서 모두 골을 넣었으며 그가 전성기를 보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시절에는 '강팀 킬러', '아스널 킬러', 'AC밀란 킬러'로 유명했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던 이유 중에 하나가 리더의 부재였습니다. 박지성 같은 팀의 상징적인 리더가 더 이상 대표팀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젊은 선수 위주의 스쿼드가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죠. 우리는 한국 대표팀의 연이은 졸전과 끊이지 않는 구설수를 보며 박지성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실감했습니다. 박지성 같은 훌륭한 축구 선수가 쉽게 등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사진] 박지성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유니폼이 박지성 축구센터에 전시된 모습입니다.

 

 

[사진] 제가 2011년 9월 박지성 축구센터에서 봤던 박지성 어렸을적 일기입니다.

 

 

[사진] 박지성의 초등학교 시절 차범근 축구상 상패.

 

운이 나빴다면 박지성이라는 훌륭한 축구 선수는 등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명지대에 겨우 입학했으니까요. 명지대 테니스부 정원이 1명 비어 있어서 다행히 학교에 입학하며 축구 선수 활동을 했습니다. 만약 명지대 축구부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쯤 그가 어떤 인생을 보내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비슷한 시기에 수원 블루윙즈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죠. 최악의 경우 수원공고 시절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좋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인생이 잘 풀리게 되었죠.

 

 

[사진=박지성 교토 퍼플상가 시절의 유니폼&축구화]

 

박지성은 2000년 일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프로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2003년 1월 1일까지 교토 퍼플상가에서 뛰었으며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으로 떠나면서 10년 넘게 유럽 축구 무대를 누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 축구를 좋아하게 된 것도 박지성과 이영표의 PSV 에인트호벤 동반 입단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 이전까지 유럽 축구는 매니아들만 좋아했을 뿐이죠. 지금은 유럽 축구 경기를 흔하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사진=박지성은 2002년 7월 2일 체육훈장 맹호장 받았습니다. 훈장증에 '대통령 김대중'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사진=박지성의 2002년, 2006년, 2010년 월드컵 유니폼 및 축구화]

 

박지성하면 떠오르는 존재는 월드컵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주전으로서 4강 신화를 주도했습니다. 특히 조별본선 3차전 포르투갈전 결승골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때는 '루이스 피구 전성기였던' 포르투갈이 한국에게 부담스러운 상대였는데 그 경기에서 한국이 1-0으로 이기면서 16강에 진출했습니다. 유일한 득점자였던 박지성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16강을 이끌었죠. 당시 21세이자 대표팀에서 막내급이었던 박지성은 한일 월드컵 전 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4강 신화 주역이 됐습니다.

 

되돌아보면 박지성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주전 발탁은 의외였습니다. 대회 이전까지는 언론에서 월드컵 최종 엔트리 탈락 후보 중에 한 명으로 꼽혔는데 당시 한국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라운드에서 항상 싱싱한 모습을 보여줬던 박지성이 한국 대표팀 전력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판단했죠.

 

박지성은 치열한 주전 경합 끝에 한일 월드컵에서 3-4-3 포메이션의 오른쪽 측면 공격수를 맡으면서 수준급 경기력을 과시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선수 인지도 및 인맥과 관계없이 실력이 뛰어난 선수를 주전으로 발탁했던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은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이후 PSV 에인트호벤 지휘봉을 잡으면서 2003년 1월 이적시장을 통해 박지성과 이영표를 영입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유럽 축구에서 성공하기까지 히딩크 감독의 존재감이 컸습니다.

 

 

 

 

박지성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원정 첫 승 멤버로 활약했습니다. 비록 한국은 16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조별본선 1차전 토고전 2-1 승리를 통해 처음으로 월드컵 원정 1승을 거두었습니다. 2차전 프랑스전 1-1 무승부는 박지성 동점골이 빛났던 경기였죠. 박지성은 4년 전 프랑스와의 A매치에서도 골을 넣었는데 월드컵 본선 프랑스전에서도 득점을 올리며 강팀에 강하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A매치에서는 통산 13골 넣었으나 모두 값어치가 컸습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만들어냈던 장면들이었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한국 대표팀 주장을 맡았습니다. '캡틴 박' 신화를 만들어냈던 대회였죠. 조별본선 1차전 그리스전에서 골을 넣으며 한국의 2-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원정 첫 16강 진출에 성공했고 박지성이 팀 전력의 구심점이 되면서 후배 선수들이 큰 무대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아마도 한국 축구 역사상 '위대한 주장' 중에 한 명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박지성의 PSV 에인트호벤 시절 유니폼 및 축구화. 맨유 입단 이전 시절의 유니폼입니다.]

 

 

[사진=박지성의 맨유 시절 유니폼]

 

 

[사진=박지성이 맨유에서 이루었던 성과들을 메달 및 우승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진=2007/08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

 

 

[사진=맨유에서 받았던 메달들. 가장 오른쪽에는 2008년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메달입니다.]

 

박지성의 클럽팀 최고의 전성기는 맨유 시절입니다. 2005년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맨유로 이적하면서 7시즌 동안 205경기에서 27골 넣었습니다. 주로 왼쪽 윙어로 뛰었으나 중앙 미드필더와 공격형 미드필더, 오른쪽 윙어, 윙 포워드, 3백 전환시 오른쪽 윙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맡았습니다. 특유의 이타적인 경기력으로 동료 선수들의 공격 전개 및 득점 기회를 돕거나 허리에서 강한 압박을 과시하며 팀에 많은 승리를 챙겨줬습니다. 박지성이 선발로 뛰는 경기에서 맨유가 많이 이긴 것을 빗대서 '박지성 선발=맨유 승리'라는 공식까지 성립되었던 시절도 있었죠.

 

맨유 시절을 통해 아시아의 영웅으로 거듭난 박지성은 당시 맨유 사령탑이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퍼거슨 감독 및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한 팀이 되면서 여러 차례 우승 성과를 이루었죠. 프리미어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메달을 모두 받았던 유일한 한국인이 바로 박지성 입니다. UEFA 챔피언스리그와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결승전 선발 출전 경험이 있었죠. 

 

[동영상=2014년 5월 PSV 에인트호벤의 친선 경기 수원전에서 선수 소개때 박지성이 많은 환호를 받는 장면. 나이스블루 촬영]

 

 

[동영상=박지성이 수원전을 마치고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감동적인 모습. 나이스블루 촬영]

 

박지성은 2012/13시즌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거쳐 2013/14시즌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으로 돌아왔습니다. 2014년 5월에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박지성 축구센터에서 은퇴 선언을 했습니다. 선수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무릎이 버텨주지 못하면서 더 이상 현역 선수로 활동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죠. 2011년 1월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은퇴한 것도 무릎 때문입니다. 만 30세의 나이에 대표팀을 은퇴한 것은 한국 축구에서는 흔치 않았던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여론의 옹호를 받았던 것은 그동안 대표팀에서 세웠던 공헌도가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여론에서는 2011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제2의 박지성' 등장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박지성 같은 위대한 축구 영웅이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박지성의 유럽 축구 커리어를 뛰어넘는 한국인 선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박지성의 월드컵 커리어를 능가하는 인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21세기 이후 지금까지 한국 축구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던 박지성의 투혼을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