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유로 2012 우승팀으로 네덜란드를 예상했습니다. 유로 대회 예선 E조 1위(9승1패)를 기록하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준우승 전력을 유지했고, 37골 8실점 기록하면서 본선 진출 16개국 중에서 최다 득점 1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베르트 판 메르베이크 감독은 실리 축구를 선호하며, 이번 대회 스쿼드에는 유럽 빅 리그 득점왕이 두 명(로빈 판 페르시, 클라스 얀 훈텔라르)이나 있었습니다. 스페인-독일과 더불어 우승 후보로 견주는데 어색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3전 전패를 당했으며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역시 축구는 팀 스포츠임을 실감합니다.
지금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강팀의 조기 탈락은 흔히 벌어진 풍경입니다. 강팀의 몰락과 더불어 약팀 혹은 다크호스의 돌풍은 늘 있었습니다. 유로 2008에서는 프랑스가 C조 4위(1무2패)로 탈락했으며, 터키-러시아가 4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지난 대회 결승 진출국이었던 이탈리아-프랑스가 본선 탈락하면서 우루과이가 4강에 올랐습니다. 유로 2012에서는 우승후보 3순위로 주목을 끌었던 네덜란드가 본선 3경기에서 모두 패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실망 뒤에는 전력이 떨어지는 팀의 예상치 못한 선전이 연출되었어야 했습니다. 메이저 대회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유로 2012 4강은 포르투갈-스페인, 독일-이탈리아로 결정됐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봤던 유럽 강팀들의 이름입니다. 약팀과 다크호스의 돌풍은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존재감을 봐도 충분히 4강에 오를 전력입니다. 유로 2008은 터키-러시아의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사람들에게 축구의 짜릿한 감동을 안겨줬지만 유로 2012 8강은 뻔한 결과를 연출했습니다. 토마스 로시츠키가 빠진 체코는 포르투갈에 열세였고, 그리스는 독일을 넘을 클래스가 아니며, 내분이 벌어진 프랑스는 스페인을 이길 것 같지 않았고, 잉글랜드는 항상 어느 순간에 탈락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로 2012는 오랫동안 추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는 대회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라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지난 4번의 유로 대회와 달리 강팀만의 대회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축구 전문가 혹은 대부분 축구팬들의 예상을 빗나가는 결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대회. 이것이 메이저 대회의 백미가 아닐까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돌풍을 일으켰던 한국처럼 말입니다. 유로 2008에서는 우승팀 스페인이 '아름다운 축구'의 매력을 선사했지만, '히딩크 매직'으로 일컫는 러시아 돌풍과 터키의 엄청난 투지를 빼놓기에는 곤란합니다.
(네덜란드의 3전 전패는 충격적이지만 정확히는 그들 스스로 무너졌죠. 선수와 감독, 동료와 동료끼리의 불협화음으로 말입니다. 그들의 졸전을 놓고 보면 승점 1점 획득은 사치였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을 샀던 팀이죠.)
저에게 유로 2000은 신선한 충격 이었습니다. 그때는 고등학생이라 지금처럼 많은 경기를 시청하지 못했지만 짬짬이 봤습니다. 볼 때마다 한국 축구와 퀄리티가 다르다는게 느껴지더군요. 그때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악몽이 아련했을 때니까요. 어느 날 미용실에서 두발을 정리하면서 TV로 유로 2000 하이라이트를 봤을때는 그곳 주인이 "재내들 하는 것 보니까, 우리나라는 월드컵 진출 만으로 잘한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슈팅, 패스, 발재간, 포백에 이르끼까지 그 당시의 우리나라 축구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유로 2000 최고의 묘미는 축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명승부가 여럿 있었습니다. 숨막히는 접전을 보면서 '친구들이 왜 유럽 축구에 열광하는지 알겠다'며 감탄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축구보다 야구를 더 좋아했으니까요. 그때도 제가 네덜란드의 우승을 예상했습니다. 개최국이니까요. 하지만 4강 이탈리아전에서 황당하게 탈락했죠.(당시 경기 내용을 보면) 그럼에도 경기가 재미 있었습니다. 웃고 떠들면서 유럽 축구를 만끽했죠. 유로 2000하면 지네딘 지단과 프란체스코 토티의 맞대결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단을 위대하다고 평가하지만 토티의 유로 2000 활약상 만큼은 지단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로 2012에서는 유로 2000에 비해서 손에 꼽을만한 명승부가 드물었습니다. 아직 4강과 결승전에 임하지 않았지만, 스페인-이탈리아의 C조 본선 1차전 한 경기만 사람들에게 명승부로 회자 될 뿐이죠. 8강에서는 독일-그리스 경기를 후하게 평가하고 싶지만 그리스 전력이 뒤떨어지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나머지 3경기는 실망스러웠죠. 체코는 포르투갈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8강 진출팀의 클래스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스페인-프랑스, 잉글랜드-이탈리아는 팀의 네임벨류와 달리 지루한 접전을 펼쳤죠.(사람 취향에 따라 재미있게 바라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메이저 대회의 특징은 전술 또는 포메이션을 통해서 현대 축구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유로 2004에서는 그리스 우승을 계기로 파워축구 또는 실리축구가 현대 축구의 대세로 떠올랐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도 강력한 파워와 단단한 수비 조직력을 자랑했습니다. 유로 2008 우승팀 스페인은 패스 중심의 공격축구를 정착 시키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4-2-3-1 포메이션이 유행했었죠.
그리고 지난 몇년 동안의 메이저 대회 흐름을 놓고 보면 그라운드에서 축구팀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개인에서 팀으로 바뀌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때의 호나우두,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빛낸 지단 이후로 메이저 대회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대회도 다를 바 없었죠. 8강을 마친 현재까지 말입니다. 호날두는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를 완전히 떨쳤는지 더 지켜봐야 하며, 마리오 고메스는 본선에서 잘했지만 8강 그리스전 선발 제외가 찜찜합니다.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아 피를로를 기대할 수 있으나 전술적으로 주연보다는 조연입니다. 다만, 피를로는 주연급 조연의 존재감을 알렸습니다.
유로 2012는 지난 몇 번의 대회에 비해서 전술의 진화가 뚜렷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내세울만한 스페인 제로톱은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입니다. 공격수를 제외하고 6명의 미드필더를 활용하면서 점유율과 패스를 강화하며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박스 안쪽을 활용하는 연계 플레이, 마무리에서 답답함이 있는 편이죠. 스페인은 공격보다 수비의 힘이 4강 진출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봅니다. 유로 2012 4강과 결승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기존 판도를 뒤집는 신선한 충격이 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